최근에 흉부외과 박선생님의 글을 읽고 흉부외과에 비할 바는 못 되는 편안한 전공의 시절이였지만, 나름 힘들었던 과거가 떠올랐습니다. 일전에 중환자실 당직에 대해 포스팅한 적이 있습니다. 요는 당직 의사의 당직 시간을 줄이더라도 환자에게 큰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인데, 우선 해외와 국내와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고 또 중환자실 담당하는 마취과 전공의에게는 적용 될 수도 있겠지만, 환자를 담당하고 있는 해당과의 전공의에게는 사실 현실성 없는 이야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사의 책임감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또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뉴스들이 쏟아지지만, 적어도 대학병원에서 수련과정에 있는 전공의 시절을 보면 지나치게 책임감을 강요받고 또 스스로도 과도한 책임 의식 속에 자책하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휴가 기간이나 근무가 비번일 때에도 손이 바뀌는 것을 불안해하는 환자와 보호자의 요구뿐 아니라, 스스로의 책임의식에 병원에 남아있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photo by Pitole

돌이켜 병원을 나와 당시 함께 근무했던 선배들과 동기들이 하는 소리지만, 비뇨기과에서 무슨 중환이 그렇게 많다고 힘들게 살았을까 웃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시엔 정말 심각하게 고민되는 문제였고, 환자의 상태에 따라서는 비번을 반납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윤리적으로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안에 일이 있거나 정말 급한 일이 있으면 너무나 어렵게 사정을 이야기해 윗년차의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수련 병원이면 항상 응급환자는 있는 법이고, 대부분 상황이 좋지 않으니 거의 항상 비번을 챙기기가 눈치 보이게 됩니다.

순간 순간 결정을 하고 책임을 져야하는 직업과 직책에 있어서 근무와 근무가 아닌 시간을 구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두뇌노동직(?)에 해당되는 일들이죠. 어느 직업이든 힘들지 않은 직업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제가 의사다보니 의사란 직업의 책임과 근무에 대해 좀 더 과중하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의사라는 직업이 예전과 같이 한 두 마디로 정의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화된 분야가 있고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의사’라는 단어로 일반화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개업한 의사나 봉급 받고 사는 의사, 병원을 경영하는 의사, 의과대학교수, 전공의들, 전공 분야에 따라 상황이 다르고 삶이 다르기 때문에 이젠 의사라는 단어가 주는 상징성은 오히려 제대로 사안을 접근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절히 그 대상을 제한하거나 대체할 단어가 떠오르지는 않네요.

의사가 환자에게 가지는 의무 중에 설명의 의무라고 있습니다. 많은 의사들이 이 설명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고 미디어에서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환자의 선택을 늘리기 위해 정보를 더 많이 줘야하고 충분한 설명을 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이야기에는 저 역시 찬성입니다. 그런데 이 설명의 의무 중 상당 부분에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은 환자들의 선택권보다는 책임 공방이라는 것입니다.

즉, 어떤 약물을 먹었는데 생기는 예상되는 부작용이나, 어떤 수술을 하게 되면 생길 수 있는 부작용에 대한 설명의 의무를 이야기합니다. 최근 미국에서 여러 약물을 복용하고 있는 노인이 운전 중에 의식을 잃어 한 소년을 차로 치게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소년은 운명을 달리하게 되었고 이 소년의 가족은 노인의 주치의를 고소했습니다. 약물로 인한 의식 소실에 대해 설명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멀리 미국까지 가지 않아도 이런 사례는 국내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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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중요한 설명이 환자에게 정보를 주는 과정이 아닌 책임을 벗어나기 위한 설명이 되버리는 순간 환자는 의사에 대한 신뢰를 거둬들이기 쉽습니다. 그렇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럴 수 밖에 없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정말 건강과 밀접하고 중요한 질병을 다루는 의사들에게 이러한 책무가 더 무거워지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사들 (흉부외과 의사와 같은 외과 계열 뿐 아니라 생명을 다루는 주요 전공 대부분)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많은 분들이 이미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의료는 우리의 생활과 밀접하고, 이런 의료를 제공하는 의사의 존재는 필수적입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만, 비난도 피하고 고민도 안하고 사는 방법이 질병을 다루지 않아야하는 것이고, 질병을 다루더라도 환자들의 인기를 끌 수 있는 방법이나 검증되지 않은 비급여 치료 항목을 가져야한다는 것이 지금 우리의 의료 현실입니다. 웰빙 시대에 망하지 않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보면 답이 나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감으로 그 자리에 버티고 있는 많은 의사들에게 이 사회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또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최근까지 운동처방을 하며 진료를 해온 의사 블로거 마바리 선생님이 더 이상 운동 처방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조만간 인터뷰를 통해 이야기를 나눠볼 생각입니다만, 웰빙 시대에 망하는 의사에 해당되는 삶을 살아 왔었기에 운동처방을 그만 두고 지금 운영하는 병원을 접겠다는 결정이 쉽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의료는 공공재라고 이야기하면서도 그 이용에 있어서는 남을 위한 배려가 있을 수도 없는 구조이며 실제 이용에 있어서도 '나'는 예외일 때가 많습니다. 의사들의 이기적인 모습을 비난하지만 국가나 이용자 역시도 이기적입니다. 의료의 공공성을 위해 남의 행복과 혜택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할지 누구도 고민하지 않고, 모든 문제에 있어 병원과 의사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쉽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의사에게 무엇을 바라시나요? 우리 자녀들은 어떤 의료 환경에서 살았으면 좋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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