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전문의 김민후

약력 :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 서울 아산병원 정신과 레지던트 수료

양광모 선생님의 '성희롱 참지 말고 제 때 해결하세요'라는 인터뷰 기사를 읽었습니다.

예전에 제가 진료했던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의 경우가 떠오르면서 짜스님의 사례도 그 경우와 상당히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의 경우, 성희롱 그 자체가 엄청난 스트레스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피해자가 직장 내에서 성희롱을 공식적으로 문제 삼았을 경우 가해자, 피해자 사이에 종횡으로 얽혀 있는 직장 내 인간 관계의 파괴를 불러올 가능성이 크고 이로 인하여 피해자가 받게 되는 스트레스 또한 성희롱 그 자체가 유발하는 스트레스에 못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진료했던 성희롱 피해자의 경우, 부서장에게 성희롱을 당했었는데 이후 공식적으로 상부에 문제 제기를 하여 상부에서 조사가 나오자 부서장의 측근인 다른 두 직원이 성희롱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거짓 진술을 하게 되고, 이로 인해 환자와 옥신각신하는 와중에 부서장과 부서장을 편들던 다른 두 직원까지 모두 다른 부서로 전출되게 되었습니다.

이 피해자의 성희롱 사건으로 인하여 피해자의 근무 부서에서 세 명이 다른 부서로 옮겨지게 된 것이지요. 이후 피해자가 근무하던 부서의 직원들은 대부분 노골적으로 피해자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도 하지 않으며 없는 사람 취급을 하게 되었는데, 평소에 피해자와 절친하게 지내던 사람들 또한 비슷한 반응을 보여 피해자는 더욱 괴로웠다고 합니다.

즉 성희롱 사건을 외부에 알려 공식적인 문제로 삼은 피해자를 같은 부서 사람들이 도와주고 격려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공적인 조직을 개인적 사유로 파괴한 '적'으로 규정하여 배신자 취급을 하게 된 것이지요.

배신자 취급이 아니더라도 성희롱 문제를 제기한 사람에 대하여 'troublemaker' 혹은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는 행동'으로 보는 시선은 매우 흔합니다.

피해자의 여성 동료라고 해서 성희롱 피해 여성에 대해 더 온정적으로 지지해 주리란 시선도 큰 오산입니다. 여성 동료가 오히려 성희롱을 제기한 여성 피해자에게 더욱 매몰차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비난하는 일이 흔하다고 합니다. 특히 성희롱 가해자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거나, 피해자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여성 동료라면 더욱 그러할 수 있습니다.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성희롱에 대한 공식적인 문제 제기가 일어난 경우, 동료들이 피해자를 도와주기보다는 오히려 은근히 따돌리고 공격하는 경우가 오히려 일반적인 듯 합니다. 또한 피해자의 업무 성과에 대한 폄하나 피해자가 추진하는 프로젝트를 동료들이 공동으로 사보타지하는 일도 흔하다고 합니다. 성희롱을 공식적으로 문제제기한데 대한 보복으로 또 다른 성희롱이 일어나거나 피해자를 스토킹, 사이버스토킹하는 일도 있다고 합니다.

제가 진료했던 그 피해자는 사실 성희롱 그 자체보다도 이러한 부서 사람들의 부정적인 반응으로 인하여 더 큰 고통을 받았었습니다. 피해자는 더 이상 기존의 부서에서 견딜 수 없어 부서 이동을 상부에 요청하였다고 하는데, 이후 내원이 중단되어 후일담은 더 이상 들을 수 없었습니다.




성희롱(sexual harassment)란 말은 1975년부터 쓰이기 시작한 신조어라고 합니다.

미국의 평등고용기회위원회(EEOC)란 단체의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서 매년 15000건의 직장 내 성희롱이 공식적으로 제기된다고 합니다.

각종 조사에 따르면 미국에서 여성 근로자가 직장 내 성희롱을 당한 경험이 있는 경우가 40% - 60% 정도라고 합니다. 유럽에서도 여성 근로자의 직장 내 성희롱 경험의 비율은 40% - 50%로 대략 비슷합니다.

직장 내 성희롱에 대한 문제제기가 대부분 여성 근로자에게서 나오기는 하지만 남성 근로자에게서 나오는 문제제기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2007년에 미국의 고용평등위원회(EEOC)가 파악한 직장내 성희롱 보고 중 16%는 남성 근로자에게서 제기되었으며 11%는 여성 상관에 의한 남성 근로자에 대한 성희롱이었다고 합니다.

2006년 영국에서 시행한 연구에 따르면 성희롱 피해자의 5명 중 2명은 남성 근로자였지만, 공식적으로 성희롱 문제를 제기한 경우의 8%만 남성 근로자였다고 합니다. 즉 남성 근로자도 성희롱을 생각보다 많이 당하고 있으나 (자존심 때문인지) 실제로 공식적인 문제 제기를 하는 경우는 여성 근로자보다 훨씬 낮은 수준인 듯 합니다.

2007년 홍콩에서 시행한 연구에서는 직장 내 성희롱 피해의 1/3이 여성 상관으로부터 남성 근로자에게 성희롱이 가해진 경우였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성희롱은 비단 여성 근로자 뿐 아니라 남성 근로자에게도 광범위하게 일어나며 이는 심한 스트레스와 건강 문제, 재정적인 문제(성희롱을 피하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는 등의 사태로 인한)를 일으키게 됩니다.

한국에서는 아마도 구미에 비하여 여성 상사의 비율이 적으므로 남성 피해자는 훨씬 적을 가능성이 높고, 성희롱 피해를 당한 여성 근로자의 경우 위에 제가 진료했던 환자의 경우처럼 집단적 정서가 강한 한국 조직의 특성상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를 해도 '배신자' 혹은 'troublemaker' 혹은 '관심끌려고 하는 행동'으로 매도당하고,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를 안 하면 계속 성희롱을 당하는 힘든 처지에 있는 경우가 구미보다 더 많으리라 짐작합니다.

심각하고 만성적인(지속적인) 성희롱을 당하는 피해자의 경우 때에 따라서는 강간에 못지않은 심리적 타격을 입게 된다고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페미니스트인 Camille Anna Paglia는 성희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Realize the degree to which your niceness may invoke people to say lewd and pornographic things to you--sometimes to violate your niceness. The more you blush, the more people want to do it."

'Niceness'란 말과 정확히 일치하는 한국어 번역을 찾기가 어려워 원문 그대로 소개해 봤습니다. Paglia의 주장은 너무 착하고 순진하며 쉽게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성희롱을 당하기 쉽다는 내용으로 파악됩니다.

그렇지만 직장에서 우리는 항상 착하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합니다. Paglia의 충고를 모든 직장 내 인간관계에 적용한다면 모난 성격에 좌충우돌하는 사람이 될 것이고 이 경우 성희롱을 당할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겠지만, 원만한 대인관계를 얻지 못하니 이 또한 스트레스가 클 것입니다.

대체로 성희롱을 가하는 상대가 피해자에게 권력을 쥐고 있는 상사인 경우가 많으므로, 상사의 성향을 파악하여 성희롱을 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라고 판단이 된다면 Paglia의 주장처럼 '내가 만만치 않은 사람이고 순진하지 않음'을 미리 알려서 선수를 치는 것이 좋을 수도 있겠습니다.

만약 성희롱 피해자가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기로 결심하였다면, 양광모 선생님 인터뷰에서도 소개해주셨듯이 문제 제기에 앞서 물적 증거를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겠으며, 공식적인 문제 제기 후의 직장 내 인간 관계에서 오는 후폭풍이 심각한 것이 오히려 일반적이라는 사실을 미리 각오하고, 동료들의 매도나 따돌림을 당할 가능성에 대해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미리 친한 동료들을 통하여 자신에 대한 지지를 확보해 놓는 것이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지속적이고 심각한 성희롱은 강간에 버금가는 심리적 충격을 피해자에게 줄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러한 부당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가 집단정서에 의하여 가해자보다는 오히려 피해자를 매도하고 더욱 괴롭히고 있지는 않은지 잘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 편집자 주 : 김민후 선생님은 연세대학교 졸업, 서울 아산병원 레지던트 수료 후 현재 봉직의로 재직중이십니다. 전문가 칼럼 투고를 원하시는 분은 공지사항을 참고하셔서 원고를 이메일(editor@healthlog.kr)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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