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제목이 즐비한 의학서적과 한자 제목만 빽빽한 법학서, 한 책장에서 만나기 쉽지 않은 두 전문분야 책이 가득 차 있는 책장이 배현아 교수의 현 상황을 한눈에 설명해준다.





배현아 교수는 응급의학 전문의이자 의료법 전공의 법학박사로, 지금은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어렵게 딴 전문의 자격증과 어렵게 딴 또 다른 전문분야 박사학위, 이 두 가지에 모두 도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수업을 시작하는 법학전문대학원에서 의료법을 담당하게 된 배현아 교수. 그의 경력으로 보면 딱 알맞은 자리다. 이대를 제외한 다른 법전원에서도 많은 러브콜을 받았다고.





배현아 교수는 2007년 여름부터 법대 교수로 재직했다. 이제 4학기째 강의라는데, 여전히 그의 눈빛에서는 상아탑에서 연구하는 교수 같은 냉철함보다는 새로운 세계를 만난 대학 새내기의 호기심이 더 많이 느껴진다.





“의대 시절부터 법에 관심이 많아서 본과 3학년 때는 고대 황적준 교수님이 계시는 법의학연구소에서 일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부검과 식별 위주의 당시 법의학과는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를 알게 된 황 교수는 연세대 의료법윤리학 협동과정에 그를 추천해 주었다. 법학석사 과정을 시작한 2001년, 그는 인턴으로 병원을 지키고 있었다. 응급실과 ICU당직이 대부분이었던 그는 밤 근무를 꺼리는 동료들과 근무시간을 바꿔서 낮에는 대학원 수업을 듣고 밤에는 근무를 섰다.





이후 전공으로 선택한 응급의학과도 24시간 근무가 끝나면 낮 수업이 가능했다. 그렇게 숨가쁘게 몇 년을 뛴 결과 2006년 전문의가 되는 동시에 박사 학위도 받게 됐다.





“의대생 때부터 겪던 긴장감을 놓치기 싫어서 아직 ‘레지던트처럼 생활하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물론 낮에 졸긴 하지만, 하하. 아이를 볼 시간이 없어서 아이한테는 미안한 마음이죠.”





대한민국 유일의 경력





응급의학 전문의이자 법학박사, 그에 대한 주위의 기대는 어떨까?





“병원에선 법에 대해, 법대에선 의학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들 하세요, 하하. 법대 교수님들은 ‘오늘 몸이 좀 안 좋은데…’ 하시면서 조언을 구하시기도 하죠. 그런데 의사도 자기 전문분야가 아니면 잘 모르잖아요. 마찬가지로 법학박사지만 의료법 외에는 잘 몰라요. 게다가 법학부를 나온 것도 아니니까요. 그래도 이런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노력해야죠.





하루 3시간씩 10년이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면서요? 10년은 너무 기니까 하루 6시간씩 해서라도 따라 잡아야죠.”





열심히 연구하고 열심히 가르칠 생각이다. 배 교수의 의료법 강의는 내년쯤부터 2학년 이상 법전원생 대상으로 이뤄질 예정이라고. 법전원생들이야 전문적인 교육을 통해 의학적 마인드를 가진 율사로 거듭나겠지만 현장에서 법적인 문제에 끊임없이 부딪히는 현역의사들을 위한 배움터는 없을까?





이런 동료들을 위해 배현아 교수는 올해 3월부터 주 1회 열리는 보건의료법 연구과정을 개설했다. 의료법을 공부하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진료하는 요령, 당황하지 않고 상황에 대처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된다. 많은 의사와 변호사들이 수강하겠다고 요청한 상태라고.





법 분야에서 일을 하고 싶은 의사들이라면 사법시험이나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하는 길도 있다. 강의를 들을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 의사들이라면?





“의사협회에서 나온 <의료법 원론>, 김장한, 이윤성 교수가 쓴 <의료와 법>, 연세대에서 나온<보건의료법학> 이 세 권을 추천합니다.”





라뽀가 가장 중요





의사들이 배 교수에게 가장 궁금한 것은 아무래도 의료소송을 피하는 법이 아닐까. 그러나 이런 질문에는 의사들도 다 알고 있는 대답이 정답일 수 밖에 없다. 바로 의사와 환자 사이의 라뽀가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모든 의료분쟁이 소송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의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한몫 잡으려고 소송을 거는 경우는 극소수고 드라마에서처럼 의사가 정말 잘못해서, 시스템을 고치고자 소송을 거는 경우도 극히 일부다. 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의료소송에서 환자가 법정까지 문제를 끌고 가는 계기를 살펴보면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가 충분히 안정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나한테 하는 것도 맘에 안 들었는데 어디 당해봐라’하는 생각으로 고소하는 경우가 많죠. 원론적인 얘기지만 성실하게 정성스런 진료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의사는 피해자?





약물의 부작용과 시술의 합병증을 두려워만 한다면 아무도 의사라는 직업을 가질 수 없다. 현재 우리나라 의사들은 이 불가항력적인 의학의 불완전성에 대한 부담을 모두 지고 있다.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 이걸 모른 채 복숭아를 먹고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가게 주인이 손해배상하지는 않잖아요. 의사도 마찬가지죠.”





배 교수는 의사의 무과실책임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의료비가 오르더라도 사회보험 등의 제도로 온전히 의사가 지고 있는 부담을 사회가 나눠야 한다는 뜻이다.





“의료소송이 누가 잘못했나 묻는 걸로 끝나면 속 편하죠. 그런데 2차적인 문제를 만들거든요.





병원 앞에서 농성을 하는 환자를 보면서 의사들은 자존심에 상처가 생기고, 진료에 대한 의욕을 잃습니다. 문제를 크게 만들기 싫어서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합의금을 주고 해결하는 경우가 많아져요. 법을 너무 모르는 의사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맙니다.”





진료만 잘 보는 의사가 통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의료계의 모든 것들은 법과 관련되어 있다. 연구 하는 의사는 연구과정에 윤리적인 기준을 판단할 때 법이 필요하다. 개원의사에겐 두말하면 잔소리. 모르면 당하기 마련이다. 전문적으로 잘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자신이 일하고 있는 분야에 해당하는 부분만이라도 알면 충분하다. 두껍고 난해한 전문용어만 가득한 법서에 질려 관심이 있어도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당신. 조금만 용기를 내어 추천도서 첫 페이지라도 펼쳐보는 건 어떨까?






글 인상국 인턴기자(연세의대 본4) -sangkook-@hanmail.net

사진 김형진 기자 kimc@docdocdoc.co.kr




관련글 :



2009/02/06 - [건강 뉴스] - 유명 병원이름 도용, 법적 분쟁으로 비화

2009/01/13 - [건강 뉴스] - 한국인 사망원인 6위는 의료사고?

2009/01/06 - [칼럼과 수다] - 종합병원2을 통해 본 현실 속 의료분쟁

2008/12/17 - [건강 뉴스] - 세브란스 병원이 존엄사 인정을 불복한 까닭은?

2008/09/10 - [건강 뉴스] - 환자분, 그건 저희 탓이 아닙니다.

2008/03/02 - [건강 뉴스] - 고관절 보호대(Hip Saver) 업체, 하버드 연구진 소송


저작권자 © 코리아헬스로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