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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Bolshakov from flickr

인턴으로서 환자에게 정성을 쏟고 관심을 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시간 여유가 있는 스케줄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을 수 있지만, 연신 콜폰이 울려대는 상황에서 환자 한 분 한 분과 대화를 나누고 안부를 묻는다는 것은 웬만한 인품을 갖춘 자 아니면 힘들다.

시간에 쫓기며 주어진 일을 해결하고 곧바로 다음 일을 해야 하니 검사나 처치를 할 때 설명은 짧아지고 말은 빨라지고, 이런저런 질문에 짜증을 내기 십상이다. 그래서인지 의식이 없거나 선명하지 않은 – 대화나 설명이 필요없는 – 환자를 상대할 때는 그나마 하던 형식적인 것들도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피곤한 표정 그대로, 성의 없는 손짓 그대로 환자 앞에 서는 일이 많다. 더구나 인턴은 짧게는 1~2주, 길게는 한두 달 후에 새로운 스케줄로 바뀌고 떠날 예정이다 보니 깊은 애정을 가지는 일은 드물다.

그런데 이런 생각에 변화를 하게 된 사건이 두 번 있었다.

한번은 3월 초턴 시절의 신경외과. 신부전으로 부종이 심하고, 뇌출혈로 의식도 희미한 환자였는데 침상생활만 하다 보니 욕창까지 생겨서 뭐 하나 쉬운게 없는 환자였다. 부종으로 채혈은 쉽지 않은데 환자 상태가 좋지 않으니 검사는 자주 나오고, 투석 때문에 양팔은 채혈 금지여서 어쩔 수 없이 대퇴동맥혈을 뽑았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서혜부를 바늘로 찌르다 보니 한 달 즈음 되니까 딱딱하게 혈종이 생길 지경이었다. 거기다가 부종으로 비대해진 거구를 옆으로 돌려서 하루 세 번씩 욕창 치료를 하다 보면 땀은 쏟아지고, 기저귀에서 나는 대소변 냄새에 머리는 어지럽고…. 환자에게 애정을 쏟으려야 쏟을 수가 없는 상황.

4주간의 신경외과 근무가 끝났을 때 이제 다시는 이 환자 채혈도 안 해도 되고, 치료도 안해도 된다는 생각에 무척 기뻤었다.

그리고 파견을 마치고, 다른 과 근무를 하며 한 달여 시간이 흘렀을 때 누군가 ‘선생님’ 하며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을 때 난 그분을 다시 보았다. 보호자 없이 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분만 보았다면 분명히 몰라봤을 것이다. 부종이 빠지자 보통 체격의 평범한 할아버지 모습이었다. 의식도 완전히 돌아와서 대화도 나누신다. 나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고 하셨지만 ‘정성껏’ 치료해줬다는 아드님의 말에 연신 ‘고마워요.’ 인사를 전하셨다.

‘아. 내가 그토록 귀찮아하던 일이 이분에게 큰 도움이 되었구나.’

이때 한 번의 깨달음을 얻었지만 바쁘고 피곤한 생활 속에서 서서히 잊혀갔다. 그 후 또 한 번의 경험은 불과 3주 전이다.

심혈관집중치료실에 계시던 할머니 한 분은 판막수술 후 경과관찰을 위해 중환자실로 입실하셨는데 섬망이 심하고 신경질도 많이 부리셨다. 인턴인 내가 할머니에게 해주는 일은 하루 한번 tracheostomy 사이트를 소독하고 거즈를 바꿔주는 일이었는데 할머니의 정신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과 나의 귀찮음이 합해져서 참 무성의하게 해 드렸다. 바꿔 드린다는 말도 없이, 소독할 때 불편하고 자극이 될 거라는 말도 없이… 앞에 서서 약 바르고 거즈 갈아 끼우고 홱 돌아서기를 열흘. 그리고 할머니는 흉부외과 병실로 전실 되었다.

나의 다음 스케줄이 바로 흉부외과. 병동에서 할머니를 보았다. 할머니께서 나를 보고 처음 한 얘기가 ‘중환자실에서 치료 잘 해주던 선생님이네. 고마워요.’ 였다. 나를…. 기억하시다니. 할머니의 인사에 순간 당황했다. 익숙한 이름이 아니었다면 몰라뵈었을 뻔했다. 무성의하게 대하던 내 모습도 기억하실 텐데 ‘고맙다.’라는 말씀을 먼저 하시는 할머니께 죄송하기도 했다.

나는 할머니를 기억하지 못했다. 내 기억 속의 할머니는 섬망을 보이는 의식이 흐린 환자였는데 병동의 할머니는 구수한 사투리로 수다를 늘어놓는 이웃 할머니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기 좋아하는 분이 그동안 집중치료실에서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아. 의식이 흐릿해도 그분들은 우리 얼굴, 우리 행동 하나하나 다 기억하실 수 있구나.

조심해야겠다. 뒷일을 조심 하자가 아니라 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지금의 환자에게 마음의 상처를 줄 수 있으니까 관심을 두고 배려하겠다는 뜻이다. 고맙다는 인사에 부끄러운 의사가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어.
Writer pro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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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Kim / 이음™

- 경북대학교병원 인턴 수료
- 대구파티마병원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이메일: me@luv4.us | 블로그: http://luv4.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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