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int
사용자 삽입 이미지

상기 이미지는 내용과 무관합니다.

photo by eflon from flickr



보험회사에서 직원이 외래에 와서
소견서나 진단서를 요청하면 기분이 별로 안 좋아진다.
내가 과민하게 반응하는 걸까?
물론 환자에게는 내색 안 한다. 환자는 어떻게든 혜택을 봐야 하니까.

기분이 안 좋은 이유

1. 진단서를 쓰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서 다음 환자의 진료가 지연된다. 

보험회사마다 요청하는 항목이 다르다.
중심정맥삽입술을 한 날짜를 정확히 써넣어라.
외래 내원한 날짜나 입원 날짜를 일일이 다 기록하라.
(통원치료확인서, 입퇴원확인서 이렇게 사실을 확인하는 기록지로 대체하지 않고
  직접 날짜를 쓰라고 하는 때도 있다. 차트를 다 열어봐야 한다.
  외래 컴퓨터가 다소 느리므로 차트 열고 닫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귀찮지만, 환자를 위해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걸 날짜 확인하고 일일이 기록하는 동안 외래가 지연된다.
이런 진단서를 5-6개 정도 쓰면 순식간에 30분 지연된다.
내가 왜 이런 서류를 쓰면서 소중한 다른 환자의 외래시간을 지연시켜야 하는가. 이해가 안 된다.
사실 이들이 원하는 양식에 맞춰서 쓰지 않아도 된다.
이들이 원하는 항목은 의학적으로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다.
보험회사 약관 때문이겠지...
그냥 해준다.
귀찮아도.

2. 무례하게 의학적 입증을 다시 요구한다.

"HER2 유방암 환자에서 겨드랑이 림프절이 양성이거나 1cm 이상의 종양이면 수술 후 1년간 허셉틴을 쓰는 것은 재발률을 낮추는데 도움된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5년 전에 대규모 임상연구로 반복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며
우리나라도 다소 늦은 편에 속하지만
2009년 7월부터는 허셉틴 유지요법이 보험으로 인정되어 환자에게 투여하기 시작하였다.
최소한 지금의 의학적 합의에 의하면 자명한 사실에 대해
보험회사가 의사에 대해
그 치료가 왜 이 환자에게 필요했는지를 입증하라며 진단서를 쓰라고 한다.
내가
왜 그런 약을 썼는지
왜 그런 시술을 했는지
왜 이 환자에게 이런 치료를 했는지에 대해
의사인 내가 왜 삼성, ING, 이런 민간 보험회사에 대해 나의 의학적 판단을 증명해야 하는가.
심지어 국가도 아니고.
그렇게 쓰는 의사의 노력에 대한 비용은 전혀 책정되어 있지 않다.
그냥 민간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왜 이걸 증명해야 하지?

사실 이들이 원하는 대로 쓰지 않아도 된다.
그냥 내 스타일 대로 의사가 환자의 상태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항목만 적어도
그들은 나에게 따질 권한이 없다.
내가 안 써줘도 그만이다.
그것은 법적으로 나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빡빡하게 굴면 환자가 보험금을 타는 데 지장이 있다. 어려워진다.
그래서 나도 그냥 참고 쓴다. 그래도 두 번째 경우를 만나면 매번 분노 급상승이다.

---------------------------------------------------

이번 일을 처리하러 나온 보험회사의 개별 직원의 잘못이 아니라는 거 알면서도
나는 곱지 않은 말을 그들에게 내뱉고 만다. 그들은 의학적으로 전혀 말이 안 되는 질문을 하면서 그 내용을 기록해 달라고 한다.
의학적으로 전혀 말이 안 되는 질문을 들으면, 그런게 아니라, 이러이러한 의미가 있는 거라고 설명해줄 수도 있는 일인데, 나는 버럭 화가 난다.
이 바쁜 와중에 그런 어이없는 질문을 하면서 시간을 잠식하는 건가요? 라고 묻고 싶다.

진단서는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된다.
법원용
보험용
직장용
보건소용
...

병원으로 전원이 필요한 환자를 위해서 쓰는 진단서.
그동안 내가 어떻게 치료했는지,
그동안 어디가 나빠져서 어떤 약을 썼고 왜 바꿨고
마지막까지 쓴 약은 무엇이었고,
최종 치료는 몇 일까지였는지,
마지막 CT의 정식 판독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어떤 해석을 추가로 하면서 환자를 진료했는지,
환자를 보면서 여러 의사가 나누었던 의견들을 다 정리해서
얼마든지 길고 자세히 써드린다. 내 전화번호도 적어 드린다. 환자 보다가 이해가 안되는 과거력이 있으면 전화하시라고.
의사로서의 자존심이기도 하고
환자를 위해 필요한 절차이기도 하다.
이러한 정리를 위해 시간이 소요된다면 난 짜증 내지 않는다. 짜증 내서도 안 된다. 이것은 의사로서 의무이기도 하니까.

그렇지만 보험회사용 진단서는 좀 다르다.

70년대 후반, 우리나라에서 의료보험제도를 처음 만들 때,
적절한 수가를 산정하기 위해 보건복지부 직원들이 의사를 찾아다니며 의견을 듣는데,
밤늦게 아이를 받고 나온 산부인과 의사에게 적정한 분만 수가를 물어봤더니
'네가 피 튀기며 애 받아봤어? 이게 돈으로 환산된다고 생각해?' 라는 다소 과장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결국, 의사도 환자만 보고 있다고 해서 적절한 사회적 position과 전문가적 지위가 인정되는 것은 아니니, 필요한 만큼 협조하고 사회에 이바지하며 오만함을 버려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보험회사용 진단서를 쓰는 것, 이건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Writer profile
author image
이수현 / 세브란스병원 종양내과 임상조교수

학부에서는 물리학을, 대학원에서는 사회학을, 그리고 다시 의학을 공부하여 지금은 종양내과 전문의.전공은 유방암. 진료실에서 미처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문의는 블로그로!

http://bravomybreast.com/

"칼럼과 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험회사용 진단서를 쓸 때 화나는 이유

트위터 이웃에게 기사를 전하세요. [retweet] 클릭!



TRACKBACK :: http://www.koreahealthlog.com/trackback/3921

헬스로그

Copyright ⓒ 2009 예스헬스.All rights reserved.
서울시 마포구 상수동 324-1 한주빌딩 4층 (주)예스헬스 webmaster@healthlog.kr
이 사이트의 모든 컨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전재·복사·배포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