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7년 전 전공의 시절 신혼여행을 가는 비행기 안에서 생긴 일이다. 새벽 일찍 나선 탓에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잠들었던 나를 아내가 흔들어 깨웠다.

‘응급 환자가 있어서 의사를 찾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다급한 목소리의 승무원이 기내에서 의사를 찾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의사 호출(doctor call)을 받아봤다는 의사 이야기를 들어보긴 했지만 나에게 그런 일이 생길 줄이야. 비행기에서 의사 호출을 경험한 선배들은 자신의 영웅담 보다 ‘선의로 의사 호출에 응하더라도 합병증이 발생할 경우엔 의료사고로 소송에 휘말릴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한다’는 말을 늘 강조했기 때문에 순간 주위를 살피게 되었다.

‘설마 이 넓은 비행기에 의사가 나뿐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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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다들 두리번거릴 뿐이었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승무원은 의사가 아니더라도 간호사나 기타 의료계 종사자도 나와서 도와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의과대학생 때만 하더라도 의사가 되면 이런 위급 상황에서 멋지게 나서서 환자를 구하는 것이었건만, 전공의 병원 생활 중 만난 성난 환자와 가족들의 기억에 섣불리 나서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내 전공인 비뇨기과는 생명 유지, 흔히 말하는 바이탈을 잡는 과도 아니지 않는가?

이런 복잡한 심정에 잠시 망설였지만 의사가 아무도 없다면 나라도 나가야 한다. 당연하고 즉각적으로 도달해야할 윤리적 판단이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나름대로 큰 맘을 먹은 것이였다. 외국인 항공기였기에 승무원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70세 남자 환자인데 부정맥과 고혈압으로 약을 먹고 있으세요. 지금 .. 굉장히 가슴이 답답하시데요.’

듣는 순간 내 가슴도 답답해졌다. 다른 과 전공의들과 농담을 주고받을 때 비뇨기과와 산부인과는 허리하학적인 학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산부인과 선생님들과 친하기 때문에 동질감을 내세울 때 하는 농담이기도 하고, 내과 등 타과 선생님에게 자문의뢰를 하면서 상대를 치켜세워주기 위해 ‘우리는 허리하학적인 과니 허리상학적인 과에서 알아서 잘 봐달라’고 할 때에 쓰는 농담이기도 하다. 실제로 비뇨기과는 후복막에 있는 콩팥부터 방광, 전립선 뿐 아니라 장으로 인공 방광까지 만드는, 흔히 환자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대형 수술을 하는 외과의 한 분과지만 말이다. 비뇨기과 의사로서 평소의 자부심이야 어쨌든 심장문제라고 하니 ‘허리하학적인 과’라는 핑계로 숨고 싶어졌다.

그러나 이미 의사라고 나선 상태에서 숨을 수도 없는 일. 머릿속으로 의과대학과 인턴 응급실 근무 경험을 되살리려고 노력하면서 환자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다행히 환자는 의식이 멀쩡한 상태라고 하며 지금 화장실에 있다고 한다. 화장실에서 10분이 넘도록 나오지 않고 있으며 답답하다는 이야기만 하고 있다고 했다.

‘가슴이 답답한데 왜 화장실을 가셨을까? 혹시....?’

화장실 문을 빠끔히 열고 할아버지께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 저는 의사에요. 지금 어디가 불편하세요?’

‘의사 양반, 내가 비행기 타기 전에는 화장실에서 오줌을 잘 봤거든? 딸애가 효도 관광 보내준다고 기뻐서 맥주 한컵 마셨을 뿐인데 지금 오줌이 한 방울도 안나와. 답답해 미치겠어.’

어찌 이럴 수가. 비뇨기과 의사가 타고 있는 비행기에 비뇨기과 응급환자라니!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을까? 환자에게나 의사에게나 아주 다행한 일이였다. 노인 남성의 급성요폐 원인이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으나 대부분은 전립선의 비대로 발생한다. 갑자기 악화되는 요인으로는 음주 및 약물이 있을 수 있는데, 감기약 성분으로도 요폐가 발생할 수도 있다. 할아버지는 비행기 타기 전 감기약도 복용하셨고 술도 한잔 하신 상태였다.

응급처치를 위해 비행기 내에 비치된 구급함을 열어봤다. 다행히도 해당 비행기에는 응급처치에 필요한 대부분의 장비가 있었다. 통상 소변줄로 부르는 폴리 카테터(foley catheter)도 있었다. 카테터를 삽입하자 거의 1000cc가 넘는 양이 나왔다. 정상 방광 용적 400cc의 두 배가 넘는 양이다. 이 정도로 방광이 늘어난 상황이라면 한번 소변만 빼준다고 다시 정상적으로 소변을 보기 힘들다. 다행히 폴리 카테터와 오줌백 (urinary bag)이 있었기에 제 시간에 비워주기만 한다면 여행을 다 마치고 한국에 들어오셔서 검사와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비뇨기과 의사를 만나서 여행을 계속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아버지는 연신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다. 환자와 객실로 들어섰을 때 결과를 궁금해 하던 탑승객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일부는 환호하기도 했다. 사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의사가 동행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낀(?) 탑승객들이 과음으로 인한 현기증 및 사소한 건강 상담으로 의사 호출을 4번이나 했으니 말이다. 대부분 처음 비행기를 타신 어르신들이였다. 자리에 앉을 틈도 없고 식사도 제대로 못했던 비행이었지만 평생 잊을 수 없는 신혼여행 선물을 받은 것 같은 뿌듯함을 느꼈다. 나에게 의사의 보람을 선물해준 3만 피트위의 환자분들, 지금도 건강하시기를.

추신. 많은 분들이 물어보는 것 중에 항공사 선물이 있었냐는 것인데, 일등석에 제공되던 와인 3병 받았습니다. 처음 환자 봤을 때 1병 나중에 환자 많아지자 2병 더 가져다 줬던 것 같습니다. 모든 환자 진료 후에는 의무기록 (record)를 공식 문서로 남기도록 되있었던 것이 기억에 남고 (혹 생길 수 있는 분쟁 대비용) 응급키트를 열 때엔 지상의 항공사 소속 의사와 통화를 했었습니다. 그 덕분에 응급 키트 물품들 중 필요한 것을 빨리 찾을 수 있었습니다. 물품 목차를 보는 것도 응급 상황에서는 시간이 지체될 수 있으리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았습니다. 없는게 없다 싶을 정도로 물품이 많이 들어있었습니다.

지상 착륙 후 사무장 그리고 기장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처음 응급환자 발생시 회황할 수도 있었기에 고맙다는 이야기와 오랜 생활 비행기를 탔지만 닥터 콜을 이렇게 많이 한 것은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참 항송사 측의 호의로 일등석에 제공되는 기내식을 제공 받았습니다만 저는 호출로 거의 못 먹었고 집사람은 덕분에 일등석에서 제공하는 기내식을 맛봤죠. 그리고 숨겨진 에피소드가 하나 더 있습니다. 이 비행기에 의사가 한 명더 있었는데, 그 선생님이 나오지 않은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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