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감염과 HIV의 진행 속도


장내기생충과 HIV 유병률 지도를 곰곰이 들여다보면 두 질병의 유행지역이 묘하게 겹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이런 감염성 질환은 대체로 사회적 불안과 빈곤, 의료보건 시설의 부재 등으로 인해 급속히 늘어나는 경향이 있지만, 이 두가지가 어떤 연관성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라는 의문을 품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특히 나는 현재 전세계에서 가장 HIV 감염률이 가장 높은 스와질랜드로 파견 나가기에, 기생충 감염이 HIV 감염률이나 증상, 전염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까.. 이런 점들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장내기생충들은 아주 오랜 시간동안 숙주인 인간과 함께 해오면서 다양한 면역조절기술들을 개발해 왔다. 이런 면역조절시스템들은 각 기생충들마다 다른 기전과 작동방식을 지니고 있고, 인간의 면역계에 다양한 영향을 미친다. HIV는 백혈구의 일종인 CD4+ T helper cell들을 감염시켜 증식하는 독특한 생활사를 보여주는데, 역시 면역계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히는 바이러스다. 상대의 면역계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두 생물의 만남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을까?

HIV와 장내기생충은 주요 위험지역이 크게 겹치는데도 불구하고 같은 맥락에서 연구된 적이 별로 없다. 더불어 장내기생충과 HIV에 동시에 감염되어 있는 경우도 엄청나게 많다. 게다가 장내기생충 박멸을 위해 HIV 감염자와 비감염자 구분없이 대량으로 약품을 투여하고 있는데, 기생충이 HIV의 증식이나 발병을 억제시키는 기능을 하고 있었다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지 않을까? 혹은 특정 기생충이 HIV 감염에 인간을 더 취약하게 만들 수 있지는 않을까? 이런 경우에는 기생충을 적극적으로 박멸하는 것이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장내기생충 감염과 HIV 감염은 상당히 다르다. 장내기생충은 여러 문의 다양한 기생충들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생하고 있지만, HIV은 한 종류의 바이러스다. 질병의 진행 양상도 다르다. 장내기생충은 인간과 아주 오랜 시간 함께해왔다. 인간이 처음 나무에서 내려왔을 때부터 함께했거나, 늦어도 가축의 등장과 함께 인간 생활의 한 부분이 되었다. 감염된 사람들도 대부분 감염되었는지도 모르고 평생을 살아가거나, 감염량이 아주 높지 않은 이상 장애가 발생하거나 사망에 이르는 경우는 비교적 드물다.

그에비해 HIV는 근 25-30년 새에 등장한 바이러스다. 인간이 이 바이러스에 노출된 것은 극히 최근에 일이며, 감염되면 예외없이 사망하게 되는 질병이다. 그리고 장내기생충은 인간의 면역계를 조절하는 방법을 사용하는데 반해, HIV는 면역계를 완전히 파괴시켜버린다. 장내기생충의 이러한 면역조절기능은 다른 질병과 동시에 감염되었을 경우 흥미로운 현상들을 보여주는데, 말라리아와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장내기생충이 과연 말라리아 감염위험을 낮춰주거나 증상의 정도를 감소시켜주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뇌염 말라리아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감소하거나 위험성이 낮아지는 것이 관찰되었다.(1) 즉 장내기생충의 면역조절기능은 다른 감염성 질환에도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증거가 된다.

1990년대에는 기생충 감염이 HIV 감염위험을 높이고, 병의 진행을 가속한다는 가설이 힘을 얻었다. 당시는 기생충이 면역조절기전이 어떻게 발현되는지가 자세히 밝혀지던 시기였다. 장내기생충 감염은 숙주에게 Th2 면역반응을 촉진시키는데, 이는 장내기생충에특화된 면역반응이다. 하지만 이 Th2 면역반응이 촉진되면 바이러스에 특화된 면역반응인 Th1 반응이 낮아지게 되는데, 그만큼 HIV가 침입하게 쉬워진다는 주장이었다. 또 Th2 반응이 촉진되면서 늘어나는 Th2 lymphocyte들은 HIV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 또 면역반응으로 인해 lymphocyte 표면에 HIV co-receptor들의 숫자도 늘어나기 때문에 감염되기 더 쉬운 조건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또 이것이 장점이 될 수도 있다. 바이러스의 증식과 복제는 숙주세포의 transcription factor가 얼마나 활발하게 활동하느냐에 달려있다. 기생충에 의해 CD4+ 세포들의 transcription을 억제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HIV의 증식속도가 느려질 수도 있다. 이처럼 면역학적 증거들은 기생충과 HIV가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도, 해가 될 수도 있다는 증거들이 서로 맞서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 실제 필드에서는 어떤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을까. 역학적 증거들을 살펴보자. 안타깝게도 기생충과 HIV의 공감염(co-infection)에 대한 역학조사들은 그리 많지 않다. HIV와 장내기생충이 미치는 영향력과 피해를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역학조사로 데이터를 얻더라도 이 결과를 분석하는 과정은 단순치 않다. 기생충과 HIV가 서로에게 입히는 쌍방향의 영향력을 측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생충의 면역조절기전으로 인해 HIV에 대한 노출이나 위험성의 변화가 있을 수 있고, HIV의 면역계 파괴에 의해 기생충에 감염되거나 증상이 심화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기생충 감염은 HIV에 더 쉽게 걸리도록 만들까?

아직 명확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몇몇 조사들을 종합해 보면 기생충에 감염된 사람들에게서 HIV 감염자가 조금 더 많을 수 있다고 관찰되었다. 사실 몇몇 기생충증, 특히 주혈흡충증(Schistosoma haematobium) 같은 기생충 감염은 HIV 감염 위험을 증가시킬만한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주혈흡충증은 방광 혈관에 기생하면서 혈뇨를 유발하는데, 이런 경우 성기 주변에 혈액이 잔류하게 되거나 성관계 중 사정 시 정액에 혈액이 같이 나오게 된다. 이렇게 혈액에 직접적으로 노출되면 감염 위험은 급격히 증가하게 된다. 최근 짐바브웨에서 여성들을 상대로 진행된 조사에서는 이런 주혈흡충 감염이 HIV 감염 가능성을 눈에 띄게 증가시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2)

반대로 일부 결과들은 기생충 감염과 HIV 감염이 서로를 방해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3) 즉 기생충 감염으로 인한 면역조절로 HIV가 먹잇감이 되는 면역세포를 찾기 힘들었을 수도 있고, 반대로 HIV 감염이 면역계를 파괴해 숙주 면역계 조절에 실패한 기생충이 장내에 제대로 자리잡을 수 없도록 방해했을 수도 있다.

이렇게 반대되는 결과들이 쌓이고 있는 것은 장내 기생충들이 서로 다른 면역조절시스템을 사용하기 때문에, 각각의 경우에 따라 HIV와 함께 더 큰 악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서로가 자리잡는 것을 방해하는 것을 방해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대체로 지금까지 진행된 역학조사들은 HIV와 기생충 사이에 명확한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지금까지의 조사들은 규모도 작고 제대로 컨트롤 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조사들은 단순히 HIV 환자군 내에 기생충 유병률을 조사한 경우가 많았고, 특별히 기생충과 HIV사이의 관계를 조사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된 데이터를 얻기 힘들었다는 점도 있다.


기생충 감염과 HIV의 진행 속도

지금까지 HIV 환자에게서 기생충이 발견되면, 기생충 감염으로 인한 증상의 유무나 피해정도와 상관없이 일단 치료하고 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기생충 감염과 HIV에 어떤 관계가 있다면? 이것 또한 측정하기 굉장히 까다로운 조건이다. HIV는 꾸준히 진행되는 질병이기 때문에 추적조사로 기생충 치료가 HIV의 진행정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정확히 가려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체로 기생충 치료와 HIV의 진행속도에는 통계적으로 특이할만한 사항이 없다는 결과를 내놓고 있는데, 주혈흡충과 관련되어서는 몇가지 특이 사항이 목격되었다. HIV 환자들 중 주혈흡충 감염 때문에 치료를 받은 환자들이 기생충이 죽어 없어진 후 급작스럽게 HIV viral load가 상승한 것이다.(4)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프라지콴텔로 죽은 주혈흡충이 숙주의 면역계에 급작스레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주혈흡충의 위장술은 아주 뛰어나서 숙주는 혈관내에 있는 주혈흡충을 잘 잡아내지 못한다. 하지만 주혈흡충이 죽게 되면서 갑자기 면역계에 노출되고, 기생충을 목격한 면역계는 Th2 반응을 전개하게 된다. 이렇게 Th2 반응이 일어나면 바이러스를 억제하고 있던 Th1 반응이 낮아지게 되고 그만큼 바이러스가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즉 기생충을 무작정 치료하기 보다는 그 이면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Reference:
1. Nacher M. Interactions between worm infections and malaria.Clin Rev Allergy Immunol 2004; 26: 8592.
2. Kjetland EF, Ndhlovu PD, Gomo E et al. Association between genital schistosomiasis and HIV in rural Zimbabwean women. AIDS 2006; 20: 593600.
3. Lindo JF, Dubon JM, Ager AL et al. Intestinal parasitic infections in human immunodeficiency virus (HIV)-positive
and HIV-negative individuals in San Pedro Sula, Honduras. Am J Trop Med Hyg 1998; 58: 431435
4. Elliott AM, Mawa PA, Joseph S et al. Associations between helminth infection and CD4+ T cell count, viral load and cytokine responses in HIV-1-infected Ugandan adults. Trans Roy Soc Trop Med Hyg 2003; 97: 103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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