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이영록


진화론과 한의학, 별로 상관 없는 분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2010년의 한국 상황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며, 그 이유는 생각해 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과학 교육을 받아 왔던 공학 연구자의 입장 외에, 진화론자의 입장에서 한의학이 어떻게 보이는지 논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반 대중에게 ‘과학자’와 ‘의사’가 주는 뉘앙스를 질문하면 같다는 대답보다 다르다는 대답이 훨씬 많이 나올 것입니다. 저도 같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업무 성격으로 보아, 의사의 일은 ‘과학자’보다는 ‘공학을 전공했고, 실제 현장에서 일하는 엔지니어’와 비교해야 옳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의사의 일은 과학적이 아니다”라는 주장에 어떻게 반박을 하겠습니까?  심지어는 과학/공학을 전공한 사람도 제게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있으니 일반인들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아쉽게도, 이것은 일반인들이 두 직업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지 못한 데서 나온 오해입니다. 공학적 기술을 ‘일반인을 위해 사용하는’ 엔지니어와, 의학 기술을 사용하는 의사가 하는 작업 방식에는 사실상 차이가 없고, 모두 현대 과학에 튼튼하게 근거하고 있습니다. 
 
제 직업은 사실상 고분자화학에 가까우며, 취업 이래 지금까지 만 15년째 고분자를 다루고 있습니다. 제가 실제 경험한 사례가 설득력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사례는 DSC라는 분석기기에서 얻은 chart를 보고 고분자의 특정 현상이 보이는지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 다음장 그림 1 )
 

▲ 그림 1. 어느 고분자의 DSC chart
 
위 DSC chart를 제시하면서 고객이 한 질문은

Q ] 귀사의 DSC[1]로 저희 sample을 측정했더니 이런 chart가 나왔습니다.  조건은 10℃/min 승온입니다. 여기서 보이는 것이 Tg[2]와 Tm(녹는점)이라고 생각하는데, 확실한지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이 문제를 해결할 때 저는 그 고객에게 이런 질문을 했고, 대답을 들었습니다.

- Sample 재질이 무엇인가요?                                      대답] PET입니다.
- 측정 전 sample 외관이 어땠습니까?                           대답] 하얗고 불투명합니다.
- DSC에 sample을 걸고 어떤 가열 과정을 거쳤습니까?    대답] 이 chart에서 가열한 것 외에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이런 정보를 갖고 제가 결론적으로 고객에게 답해 준 내용은;

A ] 구매 기록을 보니, 갖고 계신 DSC에 cooler가 달려 있군요. 온도를 300도 정도까지 올린 후 대략 5분 정도 그대로 유지하고, 그 후 10℃/min 도는 5℃/min 정도로 냉각해 보십시오. 만약 Tg, Tm이 옳다면, 냉각할 때 여기서 보신 것이 역방향으로(위로 모양이 뒤집혀)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Tg, Tm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 아래 그림 2 참고 ]

  
▲ 그림 2. PET의 DSC chart; 냉각할 때는 점선 친 부분처럼, 가열할 때와 위아래가 ‘뒤집힌’ 모양이 나타난다.
 
저는 여기서 얼핏 보아 별로 과학적이지 않아 보이는 ‘몇 가지 실제적인 확인 방법’만을 제시했고 직접 고객이 확인해 보도록 했습니다.  물론 아래에 적은 것처럼, 제가 ‘과학적’ 방식으로 일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Tg는 polymer 내 chain을 이루고 있는 원자들이 열운동을 하는 양상이 바뀌기 때문에 나타납니다.   개별 원자들이 진동 운동만 하다가, 수십 개 원자 수준의 병진 운동으로 바뀌기 때문에 발생하지요.  이 기본 수준에서 Tg를 확인하려면 아마 온도 조절이 되는 AFM이면 가능할 것 같군요.  이 장비는 서울 ***에 있다고 들었는데, 외부 sample을 의뢰 받아 줄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경우에 따라 몇 주 이상 걸릴 수 있고 비용이 sample당 수십 만원 대가 될지도 모르지요]. 

 
이 편이 더 과학적일지는 모르지만, 고객이 어느 편을 더 좋다고 생각했을지는 불문가지입니다. 그러면 왜 ‘과학적’ 방법보다 ‘비과학적’ 방법이 더 나은지 질문할 필요가 있겠지요. 그 이유는 바로 '설명해야 하는 수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고객은 현재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가장 빨리, 가능하면 가장 저렴하게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하지, 근본적인 문제부터 시간과 돈을 더 들여 재확인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실제 택한 방식은 현장에서 바로 최소의 시간과 비용으로 고객의 가설을 점검할 방법을 제안한 데 반해, '과학적 방식'은 그 점을 시간과 비용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이번에는 일반적인 의사(임상의) 분들께서 어떻게 진단을 하는지 간단히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Q ] 지금 제 피부가 이런데, 몹시 가렵습니다.



▲ 그림 3. 피부 가려움증을 호소하는 환자의 환부 사진
 
의사 분들께서는 아마 첫 단계로 문진(질병의 상황 문답)을 시도하실 것입니다.

- 언제 주로 이러십니까?             주로 겨울하고 여름입니다.
- 자주 씻는 편이신가요?             네. 하루에 한 번…  뜨거운 물을 좋아합니다.
- 혹시 작은 물집이 생기나요?      그건 아닙니다.

그리고 피부 상태 및 문진, 그리고 전문의가 되는 과정에서 배운 것에 근거하여 진단과 처방을 내립니다. 

A ] 이것은 자극성 피부염이라고 합니다. 우선 이 크림(steroid 저농도 함유)을 드리겠습니다. 하루 1~2번 바르셔요. 그리고 너무 뜨거운 물은 피부를 자극합니다. 전혀 안 씻을 수는 없겠지만, 미지근한 물을 사용해 주십시오. 혹시 2~3일 내에 효과가 없으면 다시 한 번 방문해 주십시오.

보시다시피, 저 같은 엔지니어와 의사(임상의)의 판단 과정은 사실상 동일합니다.
 
어떤 문제를 다룰 때 엔지니어와 의사는 모두 자신이 배워 아는 기초 과학 지식을 기반으로, 관찰하고 있는 대상이 보여 준 단서를 기반으로 원인을 추측한 후에 해결책을 제시하는 ‘탐정식 추론 방식’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이 둘의 업무 방식이 ‘문진 판단 처방 사후 점검’으로 비슷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사후 결과를 보아 첫 추측이 잘못되면 수정하여 예상 경로를 바꾸는 식으로 답을 찾아가지요.  이 과정에서 모든 것은 이미 검증을 마친 기초 과학에 근거합니다.  기초 과학에서는 어떤 새로운 사실이 나오면 진이 빠질 정도로 철저히 검증하고 들어간다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더 정밀한 관측 수단이 나오면 다시 검증합니다.  고전 역학에서 양자론과 상대성 이론이 나온 이유도, 관측 기술이 발전하면서 원자 규모 및 광속에 관계된 측정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기초 과학의 높은 신뢰도는 철저한 검증 때문입니다.  이 기초 과학의 엄격함이 제가 예로 든 화학공학과 의학의 신뢰도를 보장해 줍니다.
 
이 두 집단의 업무 방식이 비슷하게 ‘비과학적으로 보이는’ 근본 이유라면 업무의 기본 정신이 위에서 말했듯이 “(일반인을 상대로) 고객의 문제를 가장 빠르고 저렴하게 해결한다”라는 것입니다.  엔지니어가 시간을 끌면 고객이 금전적 손해를 볼 것이며, 의사가 시간을 끌면 고객의 생명이 위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한된 돈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도 똑같지요.  이런 상황이라면, 학자들처럼 기초 이론을 꼼꼼히 확인해 나가기보다는, 이미 잘 확인된 사실에 기초하여 판단을 빨리 내리는 편이 절대적으로 낫습니다. 
 
하지만 ‘판단을 빠르고 정확히 한다’는 결코 쉽게 될 일이 아니지요.  바둑의 고수들이 특정 패턴의 문제를 일일이 추론하지 않고 정석이나 기보를 공부해 세부를 외워 버리듯이, 엔지니어들이나 의사들이나 빠른 판단력과 기술을 몸에 익히기 위한 직업 훈련은 반복적이고 고됩니다.  일반의 오해처럼 비과학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빠른 판단을 위해서 학업 과정에서 기존에 과학적으로 정립된 사실들을 머리 속에 넣고 출발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엔지니어'와 의사들입니다.

이런 '표준화'된 엔지니어와 의사의 교육 과정이 그들에게 최소한의 필요한 지식을 심어주는 데 성공하여 그들의 평균적인 '품질'을 올리는 데 기여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렇다고 그들 사이에 질의 차이가 없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위에서 제가 말한 엔지니어와 의사의 일 성격을 요약하면, ‘이미 배운 과학적 사실에 근거하되, 경험에 의거하여 가장 정답에 가까운 아이디어를 가장 빨리 제시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이것은 사실 art와 가깝지요.  경험은 사람마다 정도가 다를 수밖에 없으며, 노력과 재능에 따라서 개개인이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은 당연히 다릅니다.  이 때문에 불가피하게 엔지니어와 의사들 사이에는 능력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지요.  그렇다고 이것이 '그들은 비과학적이다’ 라거나 ‘그들의 추론 전제 자체가 잘못되었다(=돌팔이)'란 말을 증명하지는 못합니다.  
 
다시 강조합니다만, 이 두 직업의 ‘과학성’은 ‘실제적인 기술(skill)’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평시에 일할 때에는 기술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인 업무 방식인 ‘문진 판단 처방 사후 점검’의 근거가 모두 기초 과학에 근거한다는 점이 이 두 직업을 ‘과학적’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 점을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제가 고객과 한 문답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 Sample 재질이 무엇인가요?  --> 고분자의 결정화 이론(고분자 물리학)및 재질 별 결정화 특성(고분자 화학 및 물리학)
- DSC에 sample을 걸고 어떤 가열 과정을 거쳤습니까? --> 고분자 가공 이력(고분자 물리) 점검
 
A ] 구매 기록을 보니, 갖고 계신 DSC에 cooler가 달려 있군요.  온도를 300도 정도까지 올린 후 대략 5분 정도 그대로 유지하고, 그 후 10℃/min 도는 5℃/min 정도로 냉각해 보십시오.  만약 Tg, Tm이 옳다면, 냉각할 때 여기서 보신 것이 역방향으로(위로 모양이 뒤집혀)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Tg, Tm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 Tg의 가역성(고분자 물리학)을 이용.  미시적 고분자의 분자 운동 이론에 근거

피부염 문진에서 ‘작은 물집’이 있었다면 의사는 아마도 진균이 보이는지 물집 내용물을 현미경으로 검사하여 진균에 대한 생물학적 지식을 활용했을 것입니다.  스테로이드는 근본적으로 면역을 억제하기 때문에 염증을 가라앉히는데, 이것은 면역학 내용이지요.  둘 모두 더 기초적인 이론들, 각각 고분자 물리학과 면역학(및 생물학)에 기초한 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 사례에서 본 것처럼, 화학공학과 의사라는 두 직업이 모두 현재 탁월한 성과를 보여 주는 근본적인 이유는 추론의 기반이 되는 ‘기초 과학 지식’이 건전하기 때문입니다.  즉 제가 고객들에게 말할 때는 고분자공학, 고분자화학, 기계공학 등에 일차적으로 근거하고, 근본적으로는 이들은 화학,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물리학과 수학에 수렴합니다.  엔지니어들의 지식은 이런 위계 구조가 기반입니다.  아래에서 화학공학의 예를 보면, 기본적으로 배우는 몇 가지 과목들이 유기화학, 물리화학, 분석화학 등 결국에는 물리학과 수학이라는 기초 학문에서 뻗어 나오고 있습니다.
 


▲ 그림 4. 화학공학; 위계 구조의 실례
 
그러면, 의학은 어떤 학문에 근거한 위계 구조를 갖고 있는가요?
 
공학과 마찬가지로 가장 근본적 단계에서는 물리학에서 많은 것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화학 반응은 원자 주변에 있는 전자들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이라 양자역학으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화학의 모든 것의 심층은 물리학으로 귀착됩니다.  한 예로, 약의 유효 성분을 분석하고 화학적으로 세포에 어떤 효과를 주는지 조사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화학, 근본적으로 물리학 얘기입니다. 그리고 의사들이 해부학 시간에 배웠던 인체에 대한 여러 가지 사항들은 생물학적 사항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인간은 경추 수가 7개라든지, 간과 심장은 하나고 신장은 2개라든가 하는 것 말입니다. 요약하여, 의사들이 행하는 실제 기술은 일차적으로는 (생)화학과 생물학, 근본까지 내려가면 모두 수학, 물리학(화학)과 ‘진화’ 생물학에 의존하는 셈입니다. 이에 의거하여, 몇 가지 과목에 대해 의학의 위계 구조를 그린다면
 


▲ 그림 5. 의학; 위계 구조의 실례
 
제가 ‘진화’를 강조해 놓은 이유는, 생명체가 근본적으로 진화를 통해 현재처럼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도 물론 포함해서 의학에서도 진화적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 불행히도 불과 20년 정도 전까지만 해도 충분히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점은 아직도 '치료가 어렵긴 해도, 결국 노화는 치료할 수 있는 일종의 질병'이라는 인식이 꽤 폭넓다는 것에서도 분명합니다.  세균이 항생물질에 대해 진화적 반응으로 저항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항생제가 등장했을 때 미처 예상하지 못한 사례도 있었지요.  현대 의학이, 그리고 현장에서 의업을 다루는 일선 의사 분들이 진화적인 관점을 충분히 고려한다면, 이러한 문제는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다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그러면, 한의학은 어떻습니까?
 
한의학이 어떤 이론 체계를 갖고 있는가 제대로 알아보려고 시도해 보았습니다만, 그다지 명쾌하게 잡히는 것이 아직까지 없습니다. 그리고 주로 적용하는 ‘이론’이 사람마다 꼭 동일하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제가 아는 한의학 전공자에게 물어 본 적도 있습니다만, ‘철학과 비슷해서 뭐라 딱 잘라 말하기가 어렵다’는 대답만 들었지요.
 
현장과 가장 밀접한 층위에는 한의학의 진단, 약학, 그리고 침술 등이 있을 것이며, 이들은 기혈론에 근거하는 듯하며, 제일 밑바닥에는 음양오행이나 이와 비슷한 이론이 있는 모양입니다. 사실 이게 음양오행이건 뭐건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판단을 내리는 심층에 다른 순수(또는 응용) 과학이 있지 않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지요. 저는 음양오행하고 현대의 기초 과학의 접점이 대체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 그림 6. 한의학; 위계 구조(?)
 
다시 강조합니다만, ‘과학성’을 판단하는 핵심은 ‘실제 기술(skill)’이 아니라, 그것을 받쳐 주는 심층에 있는 체계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자면, ‘사기꾼 또는 돌팔이’와 ‘(과학적인) 의사’를 분별하는 기준은 실제 기술이 얼마나 좋은가가 아니라, 밑바닥에서 판단을 좌우하는 기반 과학 체계라는 것입니다. 한의학의 기반이 현대의 기초 과학처럼 엄격하게 검증을 거친 체계가 아니기 때문에 신뢰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이 “한의학의 기술이 모두 쓸모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 주십시오. 현대 의학이 전통적으로 내려온 민간 처방에서 신약을 찾아내기 위한 노력을 많이 하고 있지만, 이것이 한의학의 기초가 논리적이고 굳건하다는 입증이 되지 못하는 이유가(물론 한의학 지지자들은 입증이라고 많이 주장합니다만) 바로 이것, ‘기술의 심층’입니다. 시행 착오를 거듭하다 보면 맞는 기술이 당연히 나오겠지요. 하지만 요즘 ‘사람 몇 명 죽였더니 이제 좀 알겠다’는 사고방식이 얼마나 공감을 살 수 있겠습니까? 바로 여기서, 기초 이론이 별로 믿을 만 하지 못한 한의학 쪽의 처방과, 기초 이론이 든든하게 검증되어 있는 의학 쪽의 처방 중 어느 편이 사람을 살릴 가능성이 높은가에 대해서는 말을 할 필요가 없겠지요.
 
‘기초 이론’에 근거한 신뢰도 평가 문제 사례를 제시하겠습니다. A와 B라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일에 대해 A가 거짓말을 할 가능성은 10%, B는 50%라고 합시다.  같은 문제에 대해 두 사람의 의견이 엇갈릴 경우, A와 B 중 어느 편의 말이 어느 정도 옳겠습니까? 직관적으로 답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당연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런 추상적인 문제를 잘 풀지 못하는데, 진화적으로 사람은 구체적인 문제들을 다루면 충분했기 때문입니다.[3]
 
이 문제를 베이지언 매트릭스(Bayesian matrix)로 풀어 보겠습니다. A, B, 참말과 거짓말로 나누면 각각 네 가지 가능성이 나옵니다. 양편이 다 참말을 할 수도 있고 양편이 다 거짓말을 할 수도 있는데, 문제에서 ‘의견이 엇갈린 경우’라고 했으므로 이 가능성을 제외하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즉 아래 그림에서 ‘zone 1’과 ‘zone 4’를 빼야 하지요. zone 2와 3만을 분석하면, B 편이 맞을 확률은 10%인데 반해(5%/50%) 틀릴 확률은 90%나 됩니다(45%/50%).  즉 이 경우에는 'A의 말을 듣는 것이 90% 옳다'가 정답이 됩니다.  다시 말해, B가 평소에 참말을 할 확률이 50%인데도 불구하고, A의 말을 듣는 것이 9배나 더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 그림 7. ‘AB참말거짓말’ 문제의 Bayesian matrix
 
위 문제에서 A를 ‘의학’으로, B를 ‘한의학’으로 놓으면 현재 대한민국 대중이 직면한 상황이 되겠습니다.[4]

지금까지는 주로 의학의 신뢰성이 어디서 나오는가와 한의학의 신뢰도가 왜 떨어진다고 생각하는가를 얘기했습니다. 사실 한의학을 비판하는 데에는 이 점만 제대로 파고 들어가더라도 200%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국의 의학 현실에서는 의사뿐 아니라 환자들을 위해서라도 아직 무엇인가가 2% 부족합니다. 그것이 오늘 제가 다루는 주제입니다. 바로 생물학 분야에서 진화론적 사항에 대한 고려가 부족한 것입니다.
 
의사들이 학부인턴레지던트 과정을 거쳐 의업을 시행하고 계신 지금까지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해 왔는가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약, 인체의 구조 신경계, 면역계, 소화계, 호흡계, 내분비계, 배설계, 순환계, 운동계 등 그리고 임상 진단 및 판단 기법에 대해서는 (제가 위에서 말한 ‘기술 획득’을 위해) 지겨울 정도로 배우고 실습을 했겠지만, ‘왜 인체가 현재의 모양이 되었나’ 든가 ‘왜 인간이 어떤 경향의 행동을 보이는가’에 대해서는 거의 배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닙니다.

이에 대한 적절한 비유라면, 컴퓨터의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의사들이 배운 것들은 컴퓨터의 하드웨어에 상당하는 부분으로, ‘컴퓨터의 구조, 각 부분간 연결 장치, 입출력 장치..’ 등이지만, 사실 컴퓨터가 어느 특정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서는 하드웨어 못지 않게 소프트웨어도 중요합니다. 하드웨어 중 하나인 CPU가 초당 1000개의 데이터만 다룰 수 있는데 소프트웨어가 초당 백만 개의 데이터를 다루도록 프로그램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고, 그 반대 경우도 비효율적이긴 마찬가지입니다. 컴퓨터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는데 하드웨어의 문제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의 문제일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양편을 모두 고려하지 않으면 올바른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습니다.
 
진화생물학은 지금까지 의사들이 (그리고 대부분의 학교 생물 과정에서) 공부해 오던 인체의 하드웨어 사항에다 소프트웨어적인 것들을 보완해 줍니다. 하드웨어의 각 부분이 ‘현재 왜 그렇게 되었나’를 설명하는 것이 바로 진화생물학입니다. 우선 진화생물학은 진화의 과정에서 생물의 어떤 특징이 다음 중 무엇에 해당하는지 설명하는 틀을 제공합니다.
 
- 적응; 특정 문제에 대응하여 성공적인 번식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하는 진화된 해결책[5]
e.g. 날기 위해 진화한 새의 날개, 빛을 감지하는 동물의 시각계…

- 부산물; 적응 과정에 수반된 특성. 보통 개체의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거나 해로운 경우를 이렇게 칭함
e.g. 인간의 배꼽. 탄생 전 생존에 필수적이었던 탯줄이 떨어진 자리에 생긴다.[6]

- 임의적 변화(noise); 돌연변이를 포함해 발생 때의 여러 우연한 일에 따라 생김. 개체의 생존에는 이롭거나, 중립적이거나, 해롭거나 모두 가능
e.g. 배꼽의 구체적인 모양[7]
 
어떤 생물학 현상에 대해 연구할 때 이 셋 중 어느 범주인지 판단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의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뒤쪽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겠습니다.
 


▲  그림 8. 전 생물계의 진화적 계보(source; Wikipedia)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이라면, 진화생물학적 사고는 단지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물에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다 아시다시피 모든 생물은[8]

- 유전 물질로 DNA(몇 예외에서는 RNA)를 사용한다.
- 이 유전 물질의 정보를 ‘번역’해서 단백질을 만들어 낸다.

위 사항이 공통입니다. 이것은 현존하는 전 생물의 조상이 존재하고, 그 조상에서 모든 생물이 진화에 의해 갈려 나왔다고 주장해야 간명하게 설명이 됩니다(그림 8 참고). 인간도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어느 한 생물종’일 뿐이며, ‘하드웨어’의 측면에서 보면 다른 생물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 사실은, 진화의 원리가 모든 생물에 적용된다는 점을 확인해 줍니다.
 
한의학에서는 이런 공통성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음양오행이 각 생물에서 어떤 작용을 하고 있냐는 질문에 어떻게 답할까요? 진화생물학적 사고는 한의학의 바탕에 있는 비과학적 사고를 드러내 줄 수 있습니다.
 
제 이글루스 블로그(http://fischer.egloos.com)에서 의학과 한의학에 대해 토론이 있었을 때 한 한의학 의사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분명히 (서양) 의학과 과학 쪽에서는 못 대답할 것이라 자신했나 봅니다.

일부 분들의 소위 '과학'엔 '생명' 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이 있는가??  자기 재현성, DNA 유전자 정보의 전달, 물질의 대사 이런 원론적인 수준에 머무는 이야기 말고, 인간, 한 사람의 성인(한의학적인 용어로는 바로 平人!! )이 살아가는 모습을 설명하는 이론이 있는가?? 지금 당장의 현실 속에서, 인간이 삶을 살아가면서 아파하고 감정을 갖고 욕심을 부리고 잘못된 생활 습관을 갖고 … 그 병이 낫고 하는 모습에 대한 총체적인 생명관(生命觀) 이 있는가??
 
한의학에는 있다. 인간이 나고 자라고 성장하고 성행위하고 먹고 자고 마시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과정과, 균형 잡힌 음식,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 않았을 때 어떻게 병이 생기는지에 대한 설명이 아주 상세하게 되어 있다.[9]

현대 진화 생물학을 잘 모르고 한 질문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제시한 출생, 성장, 성행위.. 기타 얘기들은 전부 진화생물학에서 충분히 설명해 놓은 것들입니다. 과학에서 전혀 못 하고 있는 양 얘기하면 좀 곤란하지요. 제가 보기엔, 이 분은 이 문제들이 전형적인 진화생물학적 문제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야 어쩔 수 없습니다만, 한의학적으로 설명한다면 맞을 가망이 거의 없어서 문제지요.
 
진화생물학적 사고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에게 진화생물학적 사고 방식을 설명할 때 필수적인 것이 있습니다.

자동차에 비유하자면, 자동차가 왜 움직이는지를 누구에게 물어보는가에 자동차 수리공인가 아니면 물리학자인가 따라 답변이 달라지는 것과 같다. 자동차 수리공은 당연히 기계적인 관점에서 시동을 걸면 전기에너지가 솔레노이드와 시동기를 거쳐 어떻게 엔진을 움직여 변환되는지를 아주 자세하게 설명해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자동차에 연료가 충분하면 엔진이 작동하고 엔진이 바퀴에 연결되어 자동차는 움직인다는 식으로 설명할 것이다. 반면 물리학자는 가솔린이 연소되면서 어떻게 화학 결합을 끊어 운동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이 운동에너지가 어떻게 다양한 기계 장치를 작동시키는지 설명하려 할 것이다. 둘 다 정답이다. 단지 설명 수준이 다를 뿐이다.
 
이런 구별은 중요하다. 수리공은 앞서 설명한 원리에 따라 차를 고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물리학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떤 새로운 기계적인 문제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대학생 시절 여름 한때 트럭을 운전한 경험이 있어서 이것을 잘 안다. ‘왜그’라는 이름의 그 수리공은 서투른 솜씨로 엔진을 고칠 때마다 엔진이 망가진 원인을 아는 나를 항상 데리고 다니면서 엔진 속을 만지작거리며 물리학 주문을 중얼중얼 외우곤 했다. “연료, 불, 공기가 필요해… 연료, 불, 공기.”  반면 물리학자는 운동 역학으로 차가 움직이는 원리를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제대로 점화 플러그를 찾아 고치지는 못할 것이다.
 
진화생물학자는 수리공의 답변을 근접적(proximate) 또는 기계론적(mechanistic) 대답이라고 하고, 물리학자의 답변을 인과론적 또는 궁극적(ultimate) 대답이라고 한다.[10]

진화생물학자의 특징은 항상 위에서 말한 ‘궁극적 원인(ultimate cause; 또는 궁극인)’과 ‘근접 원인(proximate cause; 또는 근접인)’을 구분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전자로 답을 합니다.
 
한 가지 예로, 일벌에 쏘이면 왜 아픈가 하는 의문에 어떻게 답하는가를 한 번 보시겠습니다.
 


   ▲  그림 9. 일벌(source; Wikipedia)
 
1. 일벌의 독에는 멜리틴(mellitin)이 들어 있으며, 이것은 포스폴리파제 A2를 활성화하여 인지질 막을 분해하여 아라키돈산이 방출되게 한다. 이 결과로 염증과 통증이 일어난다.

2. 벌은 일벌들의 산란관 및 난소를 독침과 독 분비선으로 전환시켰으며, 적이 왔을 때 독침을 이용하여 (일벌과 같은 유전자를 가진) 여왕을 보호하려는 용도로 이 독침이 진화했다. 적에게 효과적으로 고통을 주어 여왕을 보호하는 목적만 달성할 수 있다면, 멜리틴이 아니라 진화적 역사에서 사용 가능한 어떤 물질이라도 상관 없다.
 
1번은 근접인이고 2번이 궁극인이지요. 양편 모두 해당 설명 수준에서는 옳은 서술인데, 생명 전체를 보는 관점에서는 2번이 더 ‘심층’에 있는 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체가 변화해 가는 원동력(driving force)은 바로 진화적 압력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체가 ‘번식’을 할 때,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은 유전 물질밖에 없습니다. 가령 인간의 경우에는 난자와 정자로 전해지는 DNA와, 난자의 세포질에 있는 미토콘드리아 뿐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이런 상황이라면, 자손을 많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유전 물질이 세대를 거듭하면서 다수를 점하리라는 것은 명백하며, 소위 ‘신체’는 유전 물질을 더 많이 퍼뜨리도록 행동할 것이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논리를 가장 쉽게 설명한 최초의 대중 해설서가 리처드 도킨스의 그 유명한 ‘이기적 유전자’입니다. 좀 극단적으로 말해서, 인간의 신체를 포함하여 우리가 눈으로 보는 생명체 그 자체는 충분히 자손을 남긴 후에는 죽건 말건 유전 물질의 입장에서는 상관이 없다는 얘기입니다. 즉, 유전 물질의 입장에서는 생명체의 몸은 1회용 소모품일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종류의 복제자(DNA라 불리는 분자)를 위한 생존 기계들이다… 신체는 유전자가 스스로를 보존하여 변화하지 않기 위해 만든 수단이다.[11]

인간의 두뇌와 박테리오파지의 ‘몸’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답 ] DNA를 위한 일회용 장치.
    


▲ 그림 10. 사람의 뇌와 박테리오파지의 ‘몸체’(source; Wikipedia)
 
앞에서 한의사 분께서 제기한 질문인 “인간이 나고 자라고 성행위하고 먹고 자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과정에 대한 진화론적인 설명을 가장 간단히 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답을 하기 전에 간단히 설명할 것이라면, 신체 못지 않게 생명체의 ‘행동’도 생명체가 유전 물질을 더 퍼뜨리는 데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유전 물질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신체도 만들지만, 그 신체가 생존하기 위한 ‘행동 지침’도 정해줍니다. 진화생물학자들은 신체의 여러 기관과 행동을 똑같이 취급하고 있습니다. 성행위를 왜 하는지도 ‘간의 존재 이유’와 똑같이 기능적인 관점에서 다루고 있지 않습니까?

1. 生(birth) ; 새로운 ‘복사본’ 유전 물질(DNA)이 독립적 개체로 출발
2. 성장(growing) ; 다른 ‘복사본’ DNA를 출발시키기 위한 준비 시간
3. 성행위(copulation) ; 성이 분리된 생물에서, 자신의 ‘복사본’ DNA를 갖고 있는 다른 개체를 만들어내기 위해 다른 개체의 DNA와 자신의 DNA를 결합하는 과정이 필요함.  성행위는 이 ‘DNA 전달 행동’임.
4. 섭식(eating) ; 개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하는 행동
5. 수면(sleeping) ; 지구에 밤과 낮이 있기 때문에, 어느 한 편에 주로 활동하는 동물의 경우에 활동하지 않는 시간에 주로 개체의 수리 및 ‘중앙 처리 장치 최적화’ 등의 활동을 행하게 됨
6. 노화(senescence) ; 생물의 수명에는 피식과 질병을 포함한 사고 때문에 한 도가 있으므로, 평균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수명 정도만 살 수 있도록 ‘보수’를 하게 됨. 이 때문에 전체적으로 시간 경과에 따라 생체 기능이 쇠퇴함
7. 질병(sickness) ; 몇 가지 원인이 있는데…
1) 외상(外傷)과 방어
2) 감염증
3) 유전자
4) 환경의 급변
5) 구조적 결함(진화적 타협)
8. 사망(death) ; 노화와 질병, 사고 등의 이유로 개체의 항상성 유지 노력이 끝나는 현상

대부분 이해가 어렵지 않겠지만, 세 가지 점에 대해서는 제가 좀 설명을 덧붙여야 하겠습니다.

수면 현상에 대한 진화론자들의 이론은 이렇습니다. 생물들은 밤과 낮 중 어느 한 편에 특화하여 활동하는 편이 이로울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활동하지 않을 때는 쓸데 없이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보다는 그냥 조용히 움직이지 않는 편이 나을 수 있겠지요. 이렇게 되면, 활동하는 시간에 하기 어려운 일들을 활동하지 않는 시간에 하는 개체들이 이로울 것입니다. 상처의 치유 작용이나, 특히 뇌라는 중앙 처리 장치가 있는 경우는 뇌에서 쓸데 없는 기억 등을 지우는 과정이 보통 우리는 이것을 ‘꿈’이라고 얘기합니다 활동하지 않는 시간 동안에 작동합니다. 이 이론은 ‘잠’이란 현상이 상당히 보편적이란 점 외에, 인간의 꿈 속에 시각적 이미지는 등장해도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는 현상 등을 잘 설명해 줍니다.

노화의 진화적인 설명은 뒤 슬라이드를 좀 할애해 놓았으니 거기서 자세히 하겠습니다. 단 꼭 기억해 주셨으면 하는 것은, 노화가 있는 경우 같은 환경에서 대체로 자손을 늘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며, 따라서 이것은 질병이 아니라 자손을 늘리기 위한 진화적 적응이란 것입니다.

질병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상처 및 병원체 감염이야 특별한 것이 없지만, 유전자 자체가 질병을 야기하는 수가 있습니다. 당대에서 나타나는 돌연변이뿐 아니라 개체에 병을 일으키는 유전자가 대대로 전해질 수도 있지요. 개체를 병들게 하더라도 유전자만 후대로 전해지면 된다는 자연선택 논리를 이해한다면 알기 쉽습니다. 이런 유의 유전자 질환은 우리 나라에서는 그다지 주목 받은 것이 없어서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만, 페닐케톤뇨증(phenylketonuria)이 아마 그런 경우라고 의심해 볼 만 합니다. 환경 급변은 인간이 형성된 시대와 현대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로, 근시가 가장 좋은 예일 것입니다. 진화적 타협은 인간이 갖고 있는 진화적 역사적 유산 때문에 생기는 일로, 가령 사람의 눈이 머리 뒤에도 있으면 좋은 일이 많겠지만 사람은 눈 두 개 귀 두 개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요. 그리고 사람은 아가미가 없어서 물에 빠지면 질식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문에 생기는 질병의 가장 좋은 사례가 망막 박리와 허리 디스크입니다.

물론 이런 설명을 한의학 쪽에서는 전혀 들은 바가 없습니다.

진화적 사고방식이 단순히 탁상 공론이 아니라 자연계에서 보이는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예만 간단히 언급해 드리겠습니다. (사진; Wikipedia)

(1) 박쥐는 몸 크기가 쥐와 비슷한 것도 많습니다만 수명은 보통 10배가 넘습니다.
(2) 연어는 한 번 알을 낳은 후 이 사진처럼 바로 늙어서 죽어 버립니다.



 
(3) 많은 동물의 경우 대체로 성비가 1:1입니다. 하지만 어느 집단에서 자손의 숫자를 생각하면 1:1은 대단히 비효율적인데도 자손을 낳을 수 있는 암컷의 숫자가 많을수록 자손이 많아지겠지요 이 성비가 계속 유지됩니다. 따라서 이 비율이 왜 일반적인지는 설명이 필요한 문제입니다.

(4) 아래 사진은 망막 박리의 모습입니다. 인간에게 이 질병이 왜 그리도 흔한지 평생에 걸쳐 대략 수백 명 당 한 명 꼴로 나타납니다 그 궁극적인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근접인은 다 알고 있을 테니, 그건 별로 흥미가 없습니다.
 




 
(5) 위 사진은 황열병 바이러스입니다. 보통 감기나 결핵, 매독, AIDS처럼 사람에서 사람으로 전파하는 질병보다, 모기가 옮기는 황열병/뎅그열, 벼룩이 옮기는 페스트, 이가 옮기는 발진티푸스, 그리고 오염된 물을 통해 옮는 장티푸스나 콜레라 등의 증세가 훨씬 더 격렬합니다.[16]

(6) 아래는 아귀의 그림인데, 이 그림 안에는 아귀 네 마리가 있습니다.
 


  
(7) 위 사진은 침팬지 암컷의 ‘sex skin’입니다. 단 배란 기간에만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왜 안 그렇지요?[17]

(8) 아이들은 대체로 채소를 싫어하지 않습니까? 좋아하는 애 보셨나요?

(9) 사람을 죽이는 것은 대부분 남자입니다. 특히 연쇄살인범이 여자인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18]
 


 
(10) 아래 사진은 플레이보지 창업자 휴 헤프너(Hugh Hefner)와 그의 ‘파트너들’입니다. 나이가 많더라도 지위가 높은 남자는 여자들 여럿, 특히 젊은 여자들과 관계를 갖는 수가 많지요. 반면 그 반대의 경우는 아주 드물기 때문에 뉴스거리가 될 정도입니다.
 


 
이 문제들과 비슷한 예들을, 앞에서 ‘인간의 정상적인 삶에 대한 설명이 한의학 안에 들어 있다’고 주장하신 분께 설명해 보라고 문제로 제기했습니다. 답이 나왔을까요?

의학적 견지에서는, ‘인체의 비정상 상태가 무엇인가’에 대해 진화론적 시각이 흥미 있는 통찰을 제공합니다.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와 보니 불행히도 불이 났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 그림 11. 집의 ‘정상 상태’와 ‘불 난 상태’(source; Windows clipart)

그 때 여러분께서는 평소의 집의 모습과는 달리 불타고 있는 집, 연기, 그리고 물을 끼얹는 소방관을 보셨을 것입니다. 모두 다 ‘비정상 상황’입니다. 이 중 어떤 것을 돕고 어떤 것을 없애야 하겠습니까? 설마 소방관도 비정상이니 내쫓아야 한다고 말할 사람은 없겠지요?[19]

이와 같이 ‘비정상 상황’에서 없애야 할 것과 인체의 자연 방어 반응을 가려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제는 열과 설사가 인체의 자연 방어라는 것은 너무 널리 알려져 있어서 제가 구태여 말하기가 쑥스럽습니다. 이 외에 기침과 재채기, 통증, 염증 모두 인체가 외부 자극에 대해 보이는 적응적 반응이지요. 그러면 이런 것들이 나오는 대로 내버려 둬야만 한다? 진화론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생 생명체들은 이런 것들을 정상적 수준 이상으로 촉진하여 이득을 얻는 수가 많기 때문에 한 가지 예로, 말라리아로 인한 고열은 사람을 앓아눕게 만들어서 모기가 더 잘 피를 빨게 만듭니다 ‘인체에게 적당한 수준’으로 맞춰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20] 단순히 열만 해도, 지나치면 뇌손상을 가져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진화론적 시각이 더 공헌할 수 있는 사례 중 대표적인 것 세 개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선 면역계에 관한 얘기 두 개를 하지요.

저도 어릴 때는 다소간 알러지가 있었습니다. 알러지를 일으키는 IgE, 성가시기만 한가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IgE처럼 복잡한 체계는 뭔가 쓰임새가 없었다면 진화적 시간 안에서 존속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심지어 동굴 물고기는 서식처의 빛 강도에 맞춰 점차적으로 시력이 약해지다가 결국에는 눈이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눈도 ‘쓸모 없으면 퇴화’의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인간이 지금처럼 된 석기 시대까지 IgE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질문하는 편이 올바를 것입니다.

IgE의 순기능으로는 기생충과 미생물에 대한 저항이라는 현재의 정설에 덧붙여, 진화생물학자 마지 프로핏(Margie Profet)이 제안한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프로핏은 알러지가 많은 환자에게 암이 적다는 연구 결과가 그 반대의 경우보다 다섯 배가 많음을 알아냈으며, 또 다른 가능성으로 미지의 독소를 재빨리 인체에서 몰아 내는 한 가지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제안했습니다.[21]

전에 이렇게 순기능이 있었다면, 드물던 알러지 현상이 현재 왜 이렇게 많이 퍼졌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 학자들이 지적하듯이 원하는 대로 원인을 골라잡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석기 시대 환경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면 적절한 시기에 기생충에 노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고, 현대의 환경이 낫다고 생각하면 어린 시절에 집먼지진드기 등에 노출되면 곤란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이 둘의 공통점은, 현대 환경이 석기 시대에 비해 너무나 많이 변화했다는 것입니다. 석기 시대에 인간이 어려서 노출된 기생충이나 미생물은 현대에 비해 판이할 것이며, 이 점에 대한 상세한 연구는 알러지에 대한 여러 가설들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과연 알러지는 소위 ‘화재 경보기 원리’의 한 가지 예일까요, 아니면 잠재적인 위험원을 제대로 알려 주는 지표일까요?

알러지에서 알 수 있듯이, 면역계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만성 육아종 질환은 중성백혈구나 단핵구의 총수 및 탐식기능은 정상이나 식세포 내로 들어온 균을 살균하는 기능에 결함이 있어 박테리아와 진균감염이 반복되는 질환이다.  이는 세포 내 과산화수소, 할로겐, 과산화물 등의 생성불능으로 식세포 내로 들어온 균을 효과적으로 죽이지 못하기 때문이다.[22]


여기에 인용해 놓은 것과 같이, 백혈구가 세균 및 침입자를 죽이는 방식을 잘 뜯어보면 사람 자신에게도 위험할 수 있습니다. 이 산화성 화합물들은 조직에 산화 손상을 입히며 결국 암의 위험을 증가시킵니다.  현재 감염증이 많은 저개발 국가들에서 암의 발생률이 높은 것이 관련성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는데, 감염된 곳 주변에 백혈구가 집중 폭격을 퍼붓는 것이 분명히 관련이 있습니다.[23]

조금 더 나아가서, IgE는 현대 사회에서는 사람을 계속 귀찮게 하지만 암이나 기생충에서 보호하여 오래 살게 할 수 있습니다.  백혈구는 당장의 감염증을 격퇴해 주지만, 장기적으로는 암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장기간/단기간의 이득 교환(tradeoff)이 가장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을까요?  바로 노화입니다.

노화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일반 대중들에게 노화가 정확히 왜 나타나는지는 아직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만든 기계와 노화가 같은 점도 많습니다. 

[ 공통점 ]
1. 금방 고장나는 경우에는 수리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2. ‘한꺼번에 고장나게’ 만든다.
3. 시간이 많이 지나면 새거로 바꾸는 편이 낫다.
4. ‘정식 수명’이 다하더라도 대개 좀 더 사용할 수 있다.


일정 수명이 되면 거의 한꺼번에 고장나게 되어 있다든가[24] 보통 ‘공칭 수명’이 넘어도 금방 고장은 안 난다든가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두 가지가 있는데, 기계는 자손을 남기지 않으며 사람은 상처가 나도 자기 복구 기능이 있다는 점입니다.
 


스타크래프트에서 저그 유닛은 리제너레이션 기능이 있지 않습니까?  만든 지 어느 정도 시간 경과 후 죽는다면 실제하고 비슷할 텐데 말입니다.

제가 썰렁한 농담을 했습니다만, 사람은 꽤 큰 상처를 입어도 자기 복구를 상당히 잘 할 수 있습니다.  특히 간 같은 특정 기관의 자기 치유 능력은 정말로 우수합니다.  그런데도 나이가 먹으면서 같은 손상을 입더라도 잘 치유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단지 ‘수리 비용이 점차 증가하기 때문에’ 일어날까요?

생물이 오래 산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일차적으로 외부의 포식자나 사고를 피해야 하며, 반면 내부적으로는 손상을 복구해야 합니다.  내부 손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위에서 백혈구가 침입자를 공격하면서 조직에 입히는 손상 등을 얘기합니다.  이 외에는 체온 때문에 생기는 포도당단백질 결합체의 생성 등도 한 가지 요인입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동안 적절한 수만큼 자손을 낳아야 하겠지요.

우선, 외부의 포식자나 사고로 죽을 확률이 높은 경우 내부 손상을 수리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집니다. 이것은 일회용품의 경우 부속품을 따로 팔 필요가 아예 없는 이유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생물의 경우, 동물원에서 안전하게 키우더라도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하는데, 생물 자신이 내부 손상을 별로 수리하지 않기 때문에 얼마 못 가 내부 기관이 망가져서 죽게 됩니다.  이런 생물은 죽기 전에 자손을 많이 남겨야만 하지요.  쥐나 토끼처럼 여러 생물들의 저녁거리인 동물은 번식력이 거의 천문학적인 대신, 실험실에서 키워도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합니다.  이런 생물들은 먹는 음식에서 얻는 에너지를 내부 수리 및 기생체를 막는 면역계보다는 번식으로 돌립니다.

그러면, 특정한 방법으로 몸을 보호하는 동물들은 어떻습니까?  기본적으로 포식자에게 잡혀 먹힐 확률이 낮으므로, 내부 손상 수리에 자원을 투자해도 얻는 것이 많습니다.  이런 동물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새나 박쥐, 가시나 껍질을 뒤집어쓴 동물들, 그리고 특히 사람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체구가 크면 잘 안 잡아먹히기 때문에 수명이 증가하는데, 몸을 보호할 특정 수단이 있는 동물들은 비슷한 체구면서 보호 수단이 없는 동물에 비해 수명이 훨씬 깁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노화가 존재하는 이유는 시간이 지나면서 어차피 개체가 사고나 포식 등으로 죽기 때문에,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신체를 수리하기보다는 번식하도록 자원을 할당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동물이 성적으로 성숙하여 번식을 시작할 수 있게 되면 바로 노화가 시작된다는 사실은 이 이론을 입증합니다.

아래는 한국의 2007년 인구 통계에서 얻은 연령별 사망률입니다.  사망률이 가장 낮은 곳은 몸이 한창 좋다고들 하는 20대가 아니라 놀랍게도 남녀 공히 10~12세 무렵으로, 인간이 번식을 시작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연령 부근입니다.  그리고 일관되게 남성이 여성보다 사망률이 높음을 알 수 있습니다.
 

▲ 그림 12. 한국 인구의 연령(x축) 별 사망률 곡선.  2007년 자료.

노화에 대한 이 관점은 앞으로 짧은 기간 내에 인간이 200세까지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꺾어 버립니다. 물론 현재처럼 인간이 평균적으로 오래 사는 상황은 인류 역사상 전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진화적 시간만큼 지속된다면 인간의 평균 수명은 반드시 증가할 것입니다만, 문제는 인간의 진화적 시간은 한 세대가 적어도 20년 정도 되기 때문에 대략 수 만 년 단위란 것입니다.

교훈 하나; 현재까지 알려진 어떤 수단이라도 인간의 노화를 지연시킬 수는 없습니다.[25]  노화 방지를 선전하는 거의 모든 수단은 고로 진실과 거리가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지요. 물론, 여러 다양한 한약들도 포함해서요.

지금까지는 이론적 얘기가 많았는데, 실제 환자와 면담할 때에 진화론적 견지가 어떤 득이 있는지 보시겠습니다. 진화론적 환자 상담은 기존 방식보다 환자에게 훨씬 설득력이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세 가지 사례를 제시하고 싶습니다. 기존 방식의 상담 예는 들지 않고 진화론적 비교 사례만 언급하겠습니다.

첫 예인 통풍 사례는 제가 답을 여기 적습니다만, 나머지 두 가지는 생략하겠습니다. 제 블로그에 이미 올라와 있거나 아니면 다른 곳에서 답을 쉽게 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1) 통풍(gout)
의사 ] 이 병은 관절 내부에 요산 결정이 침전하여 생깁니다. 모래가 관절 속에 들어갔다고 보시면 됩니다.        
환자 ] 왜 제 관절에 요산 결정이 생기나요? 선생님은 저보다 나이도 많은데 멀쩡하지 않습니까?
의사 ] 산화 방지제가 노화를 방지해 준다는 얘기는 들으셨지요? 요산은 강력한 산화 방지제며, 고릴라나 침팬지 등 인간의 ‘친척’보다 인간에게 함량이 높습니다. 현재로는 이들보다 사람이 오래 사는 한 가지 요인으로 추정됩니다. 단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 양이 좀 지나쳐서 관절 속에 결정이 쌓이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특히 퓨린이 많이 함유된 음식은 결국 요산을 만들기 때문에 이 현상을 촉진합니다. 물론 이렇게 아픈 증세를 방치할 수 없으니 적절한 식사와 약으로 요산 함량을 낮춥시다.

2) 입덧(morning sickness)
환자 ] 선생님, 이 지긋지긋한 구역질 때문에 마음대로 못 먹는 것은 물론이고 이를 제대로 닦기도 힘들군요. 도대체 왜 입덧이 생기나요? 그리고 어떻게 좀 해 주실 수 없을까요?

3) 1형 당뇨병(소아당뇨병)
환아의 부모 ] 선생님, 우리 애의 당뇨병이 DR3이라는 유전자 때문이라 의심된다고 하셨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당뇨병을 일으키는 유전자가 생길 수 있나요?

여기 설명의 약 절반은 ‘의학이 과학적이다’란 것을 설명하는 데 사용했으며, 나머지 절반은 진화생물학이 의학에 도움을 많이 줄 수 있으며 환자에게 설득력이 높다는 것을 보이는 데 사용했습니다. 더 좋은 점은, 진화생물학에서 내리는 결론들은 한의학 쪽에서 전유물처럼 말해 오던 ‘인간의 본질’을 아주 논리적으로 밝히는 데 결정적으로 유용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소위 생로병사가 모두 들어갑니다.

사실 진화적 사고방식을 심리학에 적용한 진화심리학까지 예를 들었다면 한의학에서 답을 줄 수 없는 문제의 예로서 더욱 좋았을 텐데, 여기서 그럴 시간은 없을 것 같습니다.

현재 한의학이 처한 상황을 가장 잘 지적해 주는 말은 제가 대략 30년 전에 읽은 책에서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 점성술사들은 [ 일식 등의 ] 천변(天變)을 예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가 이런 현상들의 규칙을 이해하게 되면, 그것은 이미 천변이 아니게 되는 일에 무척이나 고민했을 것이다. 점성술은 천문학으로 바뀌고 있었으며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26]

현재 한의학 교육 과정에서는 의학 과정의 해부학, 약학, 기타 여러 가지를 배운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다면 한의학이 무슨 필요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해부학 등의 과목은 기본 체계 자체가 의학이며, 심층에서는 진화생물학과 같습니다. 이것이 한의학과 조화를 이룰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가 어렵습니다.

[ 추천 도서 ]

1. ‘Why we get sick’, Randolph Nesse & George C.Williams(1994) ; ‘다윈 의학’을 잘 설명한 고전적인 저서.
2. ‘The selfish gene’, Richard Dawkins(1976) ; 현대 진화론의 사고 방식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저서지만, 현재 한국어판은 번역이 나쁘기로 악명이 높다.
3. ‘Why we age’, Steven Austad(1997) ; 부분적으로 약점은 있지만, 매우 많은 생물에게 왜 노화란 현상이 존재하는지 잘 알 수 있는 좋은 책
4. ‘The red queen’, Matt Ridley(1993) ; 1990년대 이후 Dawkins와 함께 과학 교양서 저술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힐 Matt Ridley의 대표작. 성(性)이 왜 존재하는지 간명하고 아름답게 설명
5. ‘How the mind works’, Steven Pinker(1997); 인지심리학과 진화심리학 양편을 책 하나로 알 수 있는 역작. 다소 읽기 어려우나 충분히 일독할 가치가 있음
6. ‘Plague time’, Paul Ewald(2000) ; 현재 위험성이 충분히 인식되지 않고 있는 만성 전염병의 영향에 대해 논한 책

제가 추천 도서 여섯 개를 골랐습니다. 아마 ‘이기적 유전자’는 거의 다 보셨을 테고요, 그렇다면 가장 먼저 ‘Why we get sick’을 추천드립니다. 이 책을 읽으셨다면 제 말이 좀 지루하셨을 정도로, 후반부는 거의 이 책의 사례에서 발췌한 부분이 많습니다. 노화에 특히 흥미가 있으시다면 ‘Why we age’가 좋습니다. 이 책은 부분적인 결함도 있습니다만 전반적인 노화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는 아주 상세한 설명을 제공합니다.

의사 선생님들을 위해서는 마지막의 ‘Plague time’에서 새로운 시각을 볼 수 있습니다.

[ 맺음말 ]

별볼일 없고 생물학과 의학과는 좀 동떨어진 공돌이를 한의학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자로 만든 데는 진화생물학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게다가 진화생물학은 의사 선생님들께서 질병을 보는 시각뿐 아니라, 대중이 의사를 보는 좋지 못한 시각을 개선하는 데도 도움을 많이 줄 수 있습니다.

진화생물학 및 진화심리학을 좋아하는 한 아마추어로서, 이 학문이 의사 선생님들 사이에서 관심을 끌고 궁극적으로 환자에게까지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끝)
 
편집자 註,'한 진화론자가 본 한의학'의 각주입니다. 본 주제의 각주는 이영록 선생님이 직접 작성하셨습니다.
 
 
* * *
 
 
[1]  DSC(differential scanning calorimeter) ; 시료를 열을 가하면서, 시료가 열을 방출하거나 흡수하는 것을 측정하는 장비. 고분자 분석에서 가장 널리 사용하는 장비에 속한다.
 
[2] 유리전이 온도(glass transition temperature) ; 어떤 물질의 비결정 영역이 유리처럼 딱딱하다가 특정 온도를 넘으면 갑자기 고무처럼 말랑말랑해지는 현상.
 
[3] 진화심리학에서 반드시 언급되는 ‘Wason test’가 좋은 사례입니다. ‘한 쪽 면에는 숫자가, 다른 면에는 알파벳이 있는 카드 네 장이 테이블에 놓였고, A, B, 2, 3이 보인다. 한 쪽 편에 모음이 있으면 다른 면에는 짝수가 있다는 규칙을 증명하려면 어떤 카드를 뒤집어야 하는가?’가 질문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문제를 논리적으로 동일하면서 ‘이득과 손해’를 판단해야 하는 사회적인 맥락으로 바꾸면 정답률이 훨씬 올라간다는 점입니다. [ ‘Evolutionary Psychology’(마음의 기원), David Buss, 김교헌 외 역, 나노미디어 刊, p.386~87 ]
 
[4] 한의학이 정식 (이중맹검) 약효 시험을 하는 경우가 많지 않음을 감안하면, 실제 약효 측면도 믿기 어렵습니다. 대체로 ‘입소문’에 약효를 근거하는데, 플라시보(placebo)를 제대로 통제하지 않고 어떻게 약효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지 참 궁금하기는 합니다.
 
[5] ‘Evolutionary Psychology’(마음의 기원), David Buss, 김교헌 외 역, 나노미디어 刊, p.33
 
[6] Ibid., p.68
 
[7] Ibid., p.69
 
[8]  ‘광우병’의 원인인 프리온(prion)이 DNA 없이 자체 복제를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만, 아주 희귀한 예외며 압도적 대다수의 경우 DNA/RNA가 유전 물질입니다.
 
[9]  Source ; http://ktmd0c.egloos.com/1594383
 
[10]  ‘Why we age(인간은 왜 늙는가)’, Steven Austad, 최재천,김태원 역, 궁리 刊, p.102~03
 
[11]  ‘The selfish gene(이기적인 유전자)’, Richard Dawkins, 이용철 역, 동아출판사 刊, p.42 & 46
 
[12]  ‘Did Adam and Eve have navels?’(아담과 이브에게는 배꼽이 있었을까), Martin Gardner, 강윤재 역, 바다출판사 刊, p.146~53
 
[13]  ‘Why we get sick’(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 Randolph Nesse & George Williams, 최재천 역, 사이언스북스 刊, p.319~22
 
[14]  Ibid., p.152
 
[15]  Ibid., p.154~56
 
[16]  ‘Plague time(전염병 시대)’, Paul Ewald, 이충 역, 소소 刊, p.39~43
 
[17]  사진은 http://news.softpedia.com/news/NotSynchronizedOvulationsImpedeLousyMalesfromSex48967.shtml 에서 가져왔습니다. 인간이 왜 배란이 은폐되었나 하는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은데, 가장 좋은 안내서로는 ‘Why sex is fun’(by Jared Diamond)을 추천합니다.
 
[18] 연쇄살인 용의자 유영철의 사진입니다. 사진은 http://issue.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23/2008072301084.html 에서.
 
[19]  ‘The pony fish’s glow’(진화의 미스터리), George Williams, 이명희 역, 두산동아 刊, p.197~98
 
[20]  Ibid., p.198~99
 
[21]  ‘Why we get sick’(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 Randolph Nesse & George Williams, 최재천 역, 사이언스북스 刊, p.231~32. 원 논문은 ‘The function of allergy; Immunological defense against toxins’, Margie Profet, The quarterly review of biology, Mar. 1991, 66, no.1, pp.23~62.
 
[22]  '인간과 유전병', 박재갑 편, 동아출판사, p.137
 
[23]  ‘Why we age(인간은 왜 늙는가)’, Steven Austad, 최재천,김태원 역, 궁리 刊, p.214
 
[24] 가장 잘 인용되는 것이 헨리 포드의 일화입니다.  “절대로 고장나지 않는 부품이 있소?” “킹핀(kingpin)만 제외하고는 다 망가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거기 너무 돈을 많이 들이고 있다는 얘깁니다.  다른 것과 비슷하게 다시 설계하십시오.” 이 일화는 ‘The third chimpanzee(제 3의 침팬지)’, ‘Why sex is fun’, ‘Why we get sick’등 여러 곳에서 등장합니다.
 
[25]  ‘Why we age(인간은 왜 늙는가)’, Steven Austad, 최재천,김태원 역, 궁리 刊
 
[26]  ‘천문학; 100問 100答’, 전파과학사 간(아마 講談社 원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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