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이었다.

여느 토요일처럼 주말을 앞두고 진료를 받으려는 환자들로 외래가 북적거렸다. 진료가 거의 끝나갈 무렵 대기 환자 명단에 86세의 할아버지 성함이 올라왔다. 초진 환자이기에 평소 건강하게 살아오신 감기 환자인가보다 했다.
 

잠시 후 점잖게 차려입은 중년 부부와 함께 할아버지가 진료실 안으로 들어오셨다. 일단, 감기 환자는 아닌 듯했다. 한눈에 봐도 교과서에 나오는 우울증 환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같이 온 딸과 사위의 이야기를 빌면, 할아버지는 7년간 지병이 있는 할머니의 병간호를 혼자 하셨다. 자식들은 오지 말라 하시고 혼자 대,소변을 모두 받아내가며, 모든 걸 혼자 감당하셨다고 한다. 2년 전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그 후 2년 동안 모든 방문이며, 창문을 걸어놓고 밤이건 낮이건 불도 안 켠 채 어두운 방안에서 혼자 당신 끼니만 챙겨 드셨다, 한다. 문득 아버지 생각이 난 부부가 며칠 전 할아버지를 찾아가 보니, 주변의 사물과 화장실, 현관문의 방향 등등을 못 알아보신다고 했다.
 

진료실에서 몇 가지 평가를 해 본 결과 치매와 우울증으로 진단되었다. 혼자 지내신 시간이 오래되어 전신 쇠약감도 심했다. 보호자들에게 신경 정신과 진료와 입원을 권유했다. 보호자들이 할아버지 앞에서 난감해했다. 

'입원을 하면 누가 와 있을 거냐며.. '
 

뭐, 어르신들이 입원하면 어떻게 간병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하는 보호자들은 수없이 많이 보아 왔다. 그런데 왜 느낌이 좀 다른 걸까? 보호자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은은하고 점잖은 향수 냄새가 할아버지의 인생과는 너무 대조적이어서였을까?
 

악의가 전혀 없는 할아버지의 얼굴에서 외로웠던 시간의 흐름이 느껴졌다. 딸네 부부가 할아버지 앞에서 누가 아버지 병간호를 할 것이냐를 두고 설왕설래하는 동안도 할아버지는 무덤덤했다. 너무 익숙한 풍경이라는 듯이..
 

결국, 부부는 요양병원을 선택했다. 순간, 가슴이 저려온 나는 부부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식들의 사정도 있겠지만,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것 같은 부부인데 입원 치료보다 요양 병원을 먼저 생각하는 게 좀 서운했다.

 
설득 끝에 입원을 결정했다. 급할 때 상의할 자제분 연락처가 필요해서 물어보았더니 사위가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이번 지방 선거에 출마했나 보다. 선거용 명함이었다...



 
퇴근 전 할아버지 병실에 들렸다. 아직도 부부는 할아버지 앞에서 설전 중이었다. 누가 와 있을 것이냐..

할아버지는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만 바라보고 누워 계셨다.

" 할아버지이~~ 진지 잘 드시고 계세요. 불편한 거 있음 말씀하시고요. 병원에서 잘 도와 드릴게요"

순간, 할아버지의 눈에 초점이 생겼다. 눈가로 촉촉한 게 흘러내렸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 미안해요 "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뭐가 미안하시단 건지.
 

퇴근길 운전 내내 코끝에 딸네 부부의 점잖았던 향수 냄새가 묻어 떠나질 않았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촉촉하게 젖은 슬픈 눈매도 지워지질 않았다. 외로움이 묻어 있는 퀘퀘한 냄새도 뒤엉켜지기 시작했다. 내 코끝이 아파오더니 시야가 흐려지고 말았다.

그날은... 어버이날이었다.


오늘 글도 깜신의 작은 진료소에 부원장으로 함께하고 계신, 변방의 모 병원 내과 전문의 선생님께서 쓰신
글입니다. by 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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