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형흡충(Dicrocoelium dentriticum)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에 도 소개되었던 기생충으로, 그 놀라운 생활사로 뭇 기생충 덕후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기생충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복잡다난한 생활사의 진실을 밝혀 낸 것은 한 천부적인 능력의 기생충학자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별 로 없다.

창형흡충은 주로 양의 담도에 기생하는 흡충의 일종이다. 양의 담도에서 무럭 무럭 자라난 흡충은 양의 대변을 통해 알을 배출하고, 이 알을 지나가던 달팽이가 섭취한다. 달팽이 안에서 알껍질을 벗고 유충으로 성장한 창형흡충은 달팽이가 기어다니면서 흘리고 다니는 점액(slimeball)을 통해 또 다시 배출된다. 이 점액질은 다시금 개미의 먹이가 되는데, 여기서부터 정말 이야기가 재미있어진다.

개미 안에 있는 창형흡충의 유충 백여마리 중 단 한두마리만이 개미의 신경절(subesophageal ganglion)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는다. 신경절에 자리 잡은 유충들은 개미를 ‘조종’해 최종숙주인 양에게 잡아 먹히기 쉽도록 온도가 낮아지는 해질녘에 풀 끝에 매달린다. 그리고 낮에 해가 떠 다시 몸이 덥혀지면 언제 그랬냐는듯 일상생활로 돌아간다. 이는 가축들이 주로 풀을 많이 뜯는 아침/저녁 시간에 잡아먹힐 확률을 높이고, 더운 낮에는 말라죽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 아닐까 추측되고 있다.

이런 독특한 창형흡충의 생활사는 이 기생충이 발견된지 수십년이 흐르도록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었다. 오히려 창형흡충의 생활사는 간흡충(Fasciola hepatica)의 그것처럼 달팽이 하나만을 중간숙주로 하여 양이나 소가 유충에 오염된 수초나 물을 마셔 감염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실제로 창형 흡충이 원래 발견되던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저명한 기생충 학자들이 창형흡 충의 감염경로는 간흡충의 것과 동일하다는 논문을 여러편 발표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에 의문을 품은 미국의 기생충 학자가 있었으니 바로 Wendell Krull이었다. Krull은 평생을 기생충과 중간숙주들의 생활사를 밝혀내고 실험 실에서 생활사를 재현하는데 바쳐온 학자였다.

1940년대 후반, Krull의 동료 중 한명이 간흡충과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었 다. 간흡충의 전파에는 숙주가 되는 달팽이와 물, 수초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 에 양이 풀을 뜯는 목초지에 물이 넉넉치 않은 지역에서는 잘 전파되지 않는 특성이 있다. 첫해 연구에서는 비가 넉넉히 내려 충분한 샘플을 구할 수 있었 지만, 둘째 해에는 극심한 가뭄이 들어 Krull의 동료는 간흡충을 이용한 실험을 거의 중단해야만 했다.

하지만 Krull은 간흡충의 전파력은 줄어들었지만, 창형흡충의 여전히 왕성하게 퍼져나가고 있다는 기묘한 상황을 눈치챘다. 경험 많은 기생충학자로서 Krull은 창형흡충의 생활사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기존의 논문들에 심각한 오류가 있음을 알아채고는 창형흡충 연구에 돌입했다. 또 하나. 경험 뿐만 아니라 유충(cercaria)의 외형의 분석하는데 타고 난 능력을 가지고 있던 Krull의 재능은 단순히 외형(morphology)만으로 달팽이 뿐만 아니라 다른 숙주가 있을 가능성이 있음을 감지했다. 1930년대 독일의 기생충학자들이 이미 달팽이의 점액이 감염원이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가설을 제시한 바 있었다. Krull은 이를 바탕으로 양에게 감염 된 달팽이의 점액, 혹은 감염된 달팽이를 먹여 감염시켜보려는 시도를 반복하 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기존의 학자들이 주장하던대로라면 이러한 감염시도는 분명히 성공했어야 했다.

수많은 나날들을 풀밭에서 웅크리고 기어 다니며 달팽이의 흔적들을 관찰하며 보내던 Krull은 개미들이 이 점액을 먹이로 오인하고 둥지로 가져가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고 감염된 달팽이의 점액을 섭취한 개미를 양에게 먹인 결과, 양은 성공적으로 창형흡충에 감염되었 다. 그리고 마침내 1952년, Krull의 연구결과가 논문으로 발표되고, 기생충 들중 가장 놀라운 숙주 조종행위를 보여주는 창형흡충의 진정한 생활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자신의 경험과 지식, 그리고 관찰 결과를 가지고 실험을 통해 기존의 학설을 과감히 뒤집어버린 Krull은 비단 창형흡충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기생충들의 놀라운 사생활을 파헤쳐냈다. 그럼 다른 저명한 학자들은 왜 생활사를 밝 혀내는데 실패했을까.

지금으로서는 추측일 뿐이지만, 아마도 실험설계 단계에서 대조군의 양들을 철저히 격리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하고 있다. 당시에는 달팽이만을 염두에 두었고 개미가 감염원이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대조군의 양들이 머물고 있는 축사가 개미에 노출 되는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양들이 모두 흡충에 노출 되고 말았고, 실험 자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Reference:
1. Ewing SA. 2001. Wendell Krull: Trematode and Naturalist. Stillwtaer, Oklahoma: College of Veterinary Medicine, Oklahoma State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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