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수물자라 하면 흔히 군인을 비롯한 탄약, 식량, 의복 정도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식민지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던 18세기 유럽 열강들은 열대 지 역 식민지 확장에는 전혀 다른 개념의 군수물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약’이었다.

‘War of Jenkins’ Ear’라고 불리는 전쟁은 1739년, 콜롬비아 북서쪽, Cartagena라는 항구를 두고 벌어진 스페인과 영국 사이의 전쟁을 말한다. 당시 중남미 전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스페인 식민지 중 콜롬비아는 특히 풍부한 금광을 가지고 있었다. 캐리비안에서는 이런 스페인 항구와 금을 실은 배들을 노린 영국의 사략선들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당연히 스페인 선박들 역시 영국 소속 배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 마다 보복을 하는 것이 일상 화 되고 있던 시절이었다. 서로간의 해적질이 극에 달했을 무렵 드디어 일이 터지고 말았다. 영국 사략선장 Captain Robert Jenkins이 스페인에 포로로 잡 혀 귀가 잘린 채 귀국한 것이다. 선장의 잘린 귀가 든 럼주병과 함께 전달된 메세지는 ‘너희 국왕을 데려오라. 똑같은 꼴로 만들어주마.’ 였다.

선장의 잘린 귀나 모욕적 메세지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콜롬비아의 금이 탐났을 뿐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영국은 분노에 휩싸여 대규모 군사를 Cartagena로 파병한다. 전투병만 18,760명 규모의 파병이었으니 영국도 마음을 단단히 먹었던 셈이다. 하지만 파병군의 지휘자는 열대에 그리 익숙치 않은 사람이었다. 계절이나 전염병의 위험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실수를 저지 르고 만 것이다. 전투준비를 갖춘다, 주변 탐색을 하고 정보를 얻는다 어쩌다 하다 항구 주변에 정박한채 한달 가량이 어물쩡 지나가 버렸다.

이 한달은 모기와 전염병들에게는 천국 같은 시간, 그리고 영국에서 갓 파병온 군인 들에겐 악몽 같은 시간이 되어버렸다. 황열병과 말라리아가 활개를 치기 시작했고, 전투가 가능한 병력은 그야말로 한줌도 되지 않았다. 영국군은 스페인의 조롱을 받으며 Cartagena에서 퇴각을 하고 만다. 물론 이 어리석은 지휘관의 만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배를 타고 귀국하는 도중 병사들이 조금 회 복하는 듯 싶자, 그는 용감하게 쿠바와 자메이카를 공략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리고 Cartagena와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병사들은 모기에 물려 황열병과 말라리아에 신음했고, 역시 조롱 속에 굴욕적인 퇴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만행은 전투 한번 없이 6500명의 병사를 희생 시켰고, 영국에 귀환했을 무 렵에 전투가 가능한 인원은 18,760명 중 3000여명에 불과했다.

말라리아에 의해 식민지 전선에서 병력이 그대로 증발해버리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자 영국은 당시 말라리아 치료제로 널리 사용되던 cinchona 나무 껍질을 확보하는 것이 식민지 확장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깊이 통감하게 된다. 물론 이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것은 영국 뿐만이 아니었다. 식민지 확장 전쟁 에 깊이 관여하고 있던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프랑스 등 모든 국가들이 cinchona 나무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cinchona 나무 껍 질은 남아메리카 북부에서 생산되고 있었다. 하지만 야생의 cinchona 나무 껍 질을 벗겨 쓰는 것은 공급에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또 껍질이 벗겨진 나무가 제대로 살리 만무. 남아메리카에서 생산되는 cinchona 껍질의 양은 18세기 중엽을 넘어가며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에 유럽, 특히 영국 은 cinchona 나무를 밀반출해 영국이나 다른 식민지에서 생산하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국으로 치면 문익점이라 할 수 있는 두 명의 영국 인이 깊이 관여했다.

Cinchona 껍질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자연학자도, 식물학자도, 과학자도, 혹은 정부관리도 아닌 상인인 Charles Ledger였다. 어린 나이에 자신의 운만 믿고 페루로 넘어온 그는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스페인어와 문화, 토착산물들을 공부하며 견습 상인으로 일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일생의 가장 큰 행운이라 할 수 있는 만남을 가지는데, 바로 볼리비아 원주민 Mamani를 고용한 것이다. Mamani는 지역 토착 Cinchona 나무에 대해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비단 어디에 Cinchona 나무가 많고 하는 정도가 아니 라, Cinchona 나무에 따른 항말라리아 효능 정도의 차이까지 알고 있었던 것 이다.

당시 공급되던 Cinchona 껍질의 가장 큰 단점은 바로 질이 일정치 못했던 것 이다. Cinchona 나무는 다른 나무들과 쉽게 교차수분이 되어 잡종이 생겨난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크게 달라보이지 않지만, 껍질 내에 키니네 성분 함량이 달라져 어떤 것은 독성이 높아지기도 하고, 어떤 것은 항말라리아효과 가 전혀 없는 나무들도 있다. 이런 질적 차이는 Cinchona 공급에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였다.

하지만 Mamani는 이런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놀라운 눈썰 미를 가지고 있었고, 가장 효과가 좋은 나무의 씨앗들만을 골라 Ledger에게 안겨주었다. 하지만 불운은 한꺼번에 찾아온다던가. 당시 Cinchona 나무 씨앗 밀반출은 중범죄에 남아메리카 지역에서는 중범죄에 속했다. 제한된 생산량을 가진 중요한 군수물자로 취급되던 Cinchona 씨앗을 스페인령에서 밀반출 하여 영국으로 보내려던 Mamani는 감옥 내에서 고문으로 사망하고 만다. 어찌 어찌 일부의 씨앗이 영국에 도착하기는 하나, 사업수완이라고는 눈씻고도 찾 아볼 수 없던 그의 형이 판로개척을 하지 못하는 바람에 씨앗은 씨앗대로 쓸모 없어져 버리고 Ledger는 Ledger대로 무일푼이 되어버렸다. 결국 영국에 최고품질의 Cinchona를 들여올 수 있었던 남자는 호주 어디에선가 무일품으로 87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두번째 사람은 고등교육이라곤 받아본 적도 없지만 타고난 관찰력으로 19세기 영국왕립식물학회의 의뢰를 받아 남미로 파견된 Richard Spruce였다. 32 살 되던 1849년, Spruce는 왕립식물학회에 고용되어 HMS Britannia에 몸을 싣 는다. 그는 이 탐사가 아마존과 안데스 고원을 넘나드는 15년이 넘는 대장정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탐사 초기는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학회에 고용되었다고는 하나 간신히 생활비를 면하는 수준이었고, Spruce 는 새로운 지역에서 만든 식물 표본을 박물관이나 연구소에 팔아 근근히 연구비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 경제난에서 벗어난 것은 영국 정부가 Cinchona 씨앗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1850년대 후반 네덜란드는 밀반출한 Cinchona 씨앗과 묘목들로 자바섬 인근에 대규모 Cinchona 플란테이션 농장 을 세워 안정적인 공급망을 확보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영국 정부도 양질의 Cinchona 씨앗과 묘목을 확보하는 것을 일차적인 목표로 삼고 Spruce를 고용 한 것이다.

정부에게 고용된 이후 경제적인 고난은 어찌어찌 면했지만, 진짜 고난의 탐사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중남미에서 Cinchona 나무는 무분별한 벌채 와 집중적인 채집으로 거의 멸종위기에 놓여있었다. 항말라리아제로서의 효과 가 충분한 씨앗과 묘목을 확보하기 위해 Spruce는 3000미터 고원에서 말라리 아에 시달려가며 탐사를 계속 해야만 했다. 조랑말 등에 매달려 길이라고 할 수도 없는 절벽을 타고 가는 묘기는 일상이었고, 묘목의 밀반출을 막기 위해 쫓아오는 정부군이나 산적들을 피해 도망다니는 것은 밥먹는 것 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1854년 Orinoco 강 근방에서 Spruce는 굉장히 심한 말라리아에 걸리고 만다. 그 동안 모아온 Cinchona 나무 껍질을 씹으며 겨우 회 복한 그는 탐사를 계속해 마침내 에콰도르에서 양질의 Cinchona 나무 군락을 발견한다. 1859년부터 에콰도르에서 반출한 Cinchona 껍질로 수많은 사람들 이 목숨을 구했고, 이 묘목과 씨앗들을 바탕으로 영국은 비로서 인도에 Cinchona 나무 플란테이션을 설립하는데 성공했다.

Spruce의 탐사 초기 기록을 보면 그는 약간의 건강염려증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라리아가 유행하던 지역으로 거침없이 떠난 그의 열정은 대단하다는 말도 부족하다. 에콰도르에서의 성공을 뒤로하고 그 는 다시 안데스 산맥으로 새로운 식물들을 찾아 떠난다. 하지만 탐사가 얼마 진행되기도 전에 정체 불명의 질병에 감염되어 전신 마비가 온 그는 영국으로 급히 후송되어 겨우 회복하게 된다. 이후 왕립식물학회 내 Kew Garden에 고용되어 죽는날 까지 300종의 새로운 식물을 보고하고 그의 탐사일지를 마무 리하는데 남은 여생을 보냈다.

키니네 확보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19세기 식민지 확장의 역사와도 이어지는 부분이 있다. 이 치열한 역사의 이면에 어떤 저의가 있었던간에 열정에 불타는 식물학자들에 의해 Cinchona 나무의 대량생산에 성공하여 수 많은 사람들 의 생명을 구했다는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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