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래 간호사가 차트를 진료실 책상 앞에 내려놓으며 조그맣게 말해줬다.

“술 냄새가 많이 나거든요.”

심상치 않다는 뜻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환자를 맞았다. 50대 정도 되어 보이는 검게 그을린 피부의 아저씨 한 명이 친구와 함께 들어왔다. 책상 앞에 앉는데 술 냄새가 푸욱 풍겨왔다. 소주 두어 병은 마신 듯한 냄새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나요?”

“아, 내가 지금 막 팔다리가 저리고, 막 여기저기 아프고 그래요.”

“언제부터 그러신데요?”

“오래됐지. 근데 요즘 더 심한 거 같아서, 내가 입원을 좀 하려고 해요.”
 

다짜고짜 입원부터 하시겠단다. 난 잠시 후 다가올 고난을 느끼며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술 냄새가 많이 나시네요.”

“아, 내가 술을 좀 마셨죠. 술이야 맨날 마시지.”

“술을 계속 드셨다는 거죠? 일단 술이나 좀 깨어봐야 정확한 진찰이 가능할 거 같은데요.”

“거 참, 그러니까...... 일단 입원해서 좀 보자니까.”

“술 드신 상태에서는 입원이 안돼요. 급한 증상으로 보이지도 않고.”

“그러니까 입원해서 술도 깨고 그러고 치료하면 되지.”

“일단 술부터 깨고 오세요. 그러면 다시 진찰하고 입원해야 할지 봐드리도록 할게요.”

“그럼 이제 술 안마시면 되지. 입원하면 술 안 마신다니까?”

“매일 드시던 술을 끊으신다고요? 일단 술 안 마시는 거부터 확인하고 입원할지 결정할게요.”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술 취한 사람을 입원시켰다가 사고라도 나거나 환자끼리 싸움이라도 붙으면 큰 낭패가 아닌가. 게다가 급성기 질환도 아닌데 굳이 입원치료를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전에도 이런 분들 입원시켰다가 무단외출하고 병원에서 술 마시고 간호사한테 욕하고 하다가 결국 경찰까지 왔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뜻대로 되지 않자 아저씨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내 앞에서 허리에 주먹을 턱 얹고는 나를 내려다보며 신경질을 낸다.
 

“아니, 내가 입원하겠다는데 씨...... 왜 안 된다는 건데?”
 

입원을 시키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이 확고해지는 순간이다. 나는 아저씨를 올려다보았다. 눈을 마주치며 내가 물었다.
 

“아저씨, 지금 저한테 화내시는 건가요?”

“아니, 내가 지금 화내는 건 아니지. 내가 홍성 깡팬데...... 화내는 건 아니야.”
 

술에 취해 약간 비틀거리는 아저씨를 보고 나는 웃음이 날 뻔 했다. 정말로 무서운 깡패라면 자신이 깡패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자신이 깡패라고 말한다는 것 자체부터가 아저씨는 아주 악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옆에서 지켜보던 친구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중재안을 내놓았다. 일단 링거액이라도 맞고 오늘은 집에 간 다음에, 술 깨도 아프면 다시 오자는 거였다. 나도 흔쾌히 동의했고 아저씨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물러섰다.

포도당에 비타민을 섞어 처방한 후, 한 고비 넘긴 것에 대해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난 아직까지 환자나 보호자에게 맞아본 적은 없다. 멱살까지는 잡혀봤어도 주먹질을 당한 적은 없다. 하지만 내 주변 의사들이 환자나 보호자에게 맞는 것은 종종 보아왔다.

오늘같이 좋게 넘어가는 경우야 괜찮지만, 의료분쟁이라도 발생하는 경우에는 정말 내 몸 하나 간수하기 힘들다. 어제 기사를 보니 환자단체와 시민단체가 ‘의사 폭행 방지법’ 철회를 요구했다고 한다. 나는 조금 이해가 안 간다. 그저 맞지 않게만 해달라고 하는 건데 이게 철회해야 할 만한 일일까?

얼마 전에 응급실에 갔더니 술 취한 환자 하나가 사방팔방에 욕을 해대고 있었다. 안전을 위해 억제를 했더니 의사 얼굴에 침을 뱉었다. 의사는 어떻게 했을까? 속으로 욕을 삼키며 침을 닦아냈다. 그 뿐이다. 몇 달 전에는 의료분쟁이 생긴 환자 보호자들이 중환자실에서 의자를 집어던지고 마구 동료의사에게 몰매를 가한 적도 있다. 그들이 폭력행위에 대한 처벌을 받았을까? 네버. 슬프지만, 그런 모습이 바로 요즘 의사들의 초상이다. 정말 슬픈 일이지만 말이다. 때리지만 말아달라는데, 그것도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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