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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이 식물인간 상태인 환자의 존엄사(尊嚴死)를 허용하는 판결을 내렸다. 서울 서부지법은 2008년 11월 28일 식물인간 상태에 빠진 어머니로부터 인공호흡기를 제거해달라며 김 모 씨(75세, 여)의 자녀들이 낸 소송에서 김 씨로부터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고 판결했다. 이번 소송은 살아 있는 환자에 대한 연명 치료를 중단해달라며 환자의 가족들이 법원에 소송을 낸 첫 번째 사례라는 점에서 그동안 주목받아 왔었다.

재판부는 ‘환자의 치료 중단 의사는 원칙적으로 치료 중단 당시 질병과 치료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았음을 전제로 명시적으로 표시해야 유효하지만 질병으로 의식불명의 상태에 처한 경우 환자가 현재 자신의 상태 및 치료에 관한 정보를 제공받았더라면 표시했을 진정한 의사를 추정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학계와 의료계는 무의미한 의료 집착적 연명 치료에서 벗어나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확인해준 판결이라며 환영하는 분위기다. 반면 종교계는 이런 것이 허용되면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할 수 있다며 우려스러워 하는 표정이다.

이번 판결을 통해 그동안 쉬쉬 되어 오던 이와 유사한 사례들이 쏟아져 나올 것으로 예상되며, 이를 둘러싼 논란은 가열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번 판결이 윤리적으로,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타당한지 아닌지 여부를 떠나서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있다. 이런 경우 법이나 윤리보다 우선시될 수 있는 것은 환자 본인의 판단과 의지라는 점이다.

이런 상황을 가정해보자. 재판 중간에 환자를 단 1분만 정신을 차릴 수 있게 할 수 있다고 해보자. 재판관이 환자에게 물었다.

“자, 이제 환자는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그러면 환자는 대답할 것이다.

“제게는 이렇게 인공호흡기를 달고 사는 것이 전혀 의미가 없어요. 치료를 중단해주세요.”

“저는 이렇게 인공호흡기를 달고서라도 꼭 살고 싶어요.”

이렇게 되면 재판관은 판단할 이유가 없어진다. 환자 뜻을 존중해서 환자의 뜻대로 하면 되는 것이고, 윤리적 법적인 판단의 잣대를 들이댈 필요가 없어진다. 환자 스스로의 생명에 대한 스스로의 가치와 판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히 환자는 인공호흡기에 의지한 식물인간 상태여서 이런 의사 표명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안이 복잡해지고 사회 통념상 통용되는 윤리적, 사회적, 법적 잣대로 판단을 하다 보니 논란이 계속되는 것이다.

만일 평소에 환자가 자녀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나에게 만일 이러이러한 상황이 오면 이러이러하게 해달라’고 말했더라면, 더 나아가 이를 문서화해둔 것이 있었다면 남은 사람들끼리 지루한 법적 공방이나 윤리 논쟁을 벌일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서양에서는 사전의사결정서(advance direct)라고 해서 의식이 맑고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한 시기에 미리 환자 본인의 뜻을 서면으로 밝혀두는 일이 보편화되어 있다.

하지만 국내 현실에서는 아직 ‘advance directive’가 아직 제도화되기는커녕 개념조차 도입되지 못했다. ‘advance directive’의 정확한 한국말 번역도 없는 실정이다. 그나마 DNR(do not resuscitate)이라고 해서 ‘심폐 소생술 거부 동의서’라는 것이 있어서, 죽음이 임박했을 때 심폐소생술을 할지 말지 정하는 것이 도입되어 있는데, 이마저도 잘 시행되고 있지는 못하는 듯싶다.

서울대병원 허대석, 오도연 교수팀의 조사에 의하면, 병원에서 임종했던 말기암 환자 165명 중에서 DNR에 대해 동의하고 임종 준비로 들어가는 시점은 보통 임종 8일 전이었다. 이렇게 늦게야 죽음에 대해 준비하다 보니 가족들이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끝까지 심폐 소생술을 해달라고 하는 경우도 4.2퍼센트나 되었다.

문제는 또 있다. 동의서를 받았던 143명의 환자 중에서 가족이 없었던 1명을 제외한, 나머지 142명은 DNR을 가족이 작성했다. 정작 환자 본인은 본인 목숨에 대한 의사 결정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국립암센터 윤영호 교수팀의 연구에 의하면, 임종이 임박한 경우 암 환자의 96.1퍼센트는 환자 본인에게 말기 상태임을 알려주기를 원하고 있으나 가족들 중에서는 78.3퍼센트만 환자에게 알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환자 대다수는 본인의 병 상태에 대해 정확히 알고 싶어 하나 보호자들은 정확히 알리는 것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환자는 본인 상태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한 채, 본인의 목숨에 대한 의사 결정 과정에서 의료진과 가족으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본인의 병 상태를 충분히 이해하고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한 시기에 환자 본인의 뜻을 서면으로 밝혀두는 일이 국내에서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그리고 갑자기 환자에게 무슨 일이 닥친다면 의료진도, 가족도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못해 우왕좌왕 하게 되고, 김 모 씨의 경우처럼 식물인간 상태가 된다면 연명 치료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논쟁을 벌이게 된다.

물론 환자 본인에게 나쁜 소식을 전하고, 병 상태를 정확히 이해시키고, 미래에 생길지 모르는 나쁜 상황이나 죽음에 대해 미리 얘기하며 환자의 뜻을 물어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갑자기 일을 당하고 나서 가족들이 겪게 되는 혼란도 감당하기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교수는 본인의 유서, 재산 현황, 통장, 장례식 절차, 보험증권 등을 준비해서 장롱 속 서류 가방에 준비해놓았다. 사람이 살다 보면 언제 어떤 일이 갑자기 생길지 모르는 건데, 혹시라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경우 남은 가족들이 이 서류 가방만 열어 보면 자신이 죽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렇게 미리 준비를 해놓고 본인의 뜻을 알려두면 본인도 좋고, 가족들도 좋을 것이다.

신문과 뉴스가 존엄사 논쟁으로 뜨겁다. 그것이 옳고 그름을 토론하기 전에, 우선 챙겨야 할 대안은 얼마든지 있다. 호스피스, advance directive, DNR,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솔한 대화. 이런 것들을 통해서 환자의 평소 의중을 잘 알아두고, 이를 더욱 분명히 해둔다면 존엄사 논쟁은 더욱 쉬워질지 모르겠다. 우리도 이제 죽음에 대해서 마음을 터놓고 환자와 얘기해보면 어떨까. 죽음에 대해 터놓고 얘기하고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사회 풍조가 마련되기를 기대해본다.

참고문헌

  • Oh DY, Kim JH, Kim DW, Im SA, Kim TY, Heo DS, Bang YJ, Kim NK. CPR or DNR? End-of-life decision in Korean cancer patients: a single center’s experience. Support Care Cancer. 2006 Feb;14(2):103~8.

  • Yun YH, Lee CG, Kim SY, Lee SW, Heo DS, Kim JS, Lee KS, Hong YS, Lee JS, You CH. The attitudes of cancer patients and their families toward the disclosure of terminal illness. J Clin Oncol. 2004 Jan 15;22(2):307~14.


작성자 : 김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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