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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돌이켜보면, 레지던트 1년차는 다시 할 수 있지만 의대 본과 1학년은 정말 다시 하고 싶지 않다. 의대 4년 동안 가장 안 좋은 학점이 나왔던 것이 본과 1학년 과정에서 배우는 ‘해부학’이었고, 지금도 다시 그많은 구조물들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암기해야 한다면 정말이지 자신이 없다.

의대를 졸업한 사람, 그리고 의대생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의대생들이 공부하는 양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알 것이다. 단연코 말하는데, 세상 그 어느 분야에서도 의대만큼 많이 공부해야 하는 곳은 없다. 창의성이나 결과의 문제가 아니라, 짧은 시간 안에 그 많은 걸 암기해야 하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바꿔 말하면 의대를 졸업할 정도면, 그 정도의 마음가짐과 투자로 다른 분야의 시험 중에 합격하지 못할 분야는 없다. 참고로 (정확한 출처는 기억하기 어렵지만) 6년제 의대의 평균 재학 기간은 7.4년이라고 한다. 그만큼 6년 내에 모든 과정을 끝내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는 의미다.
하지만 내게 의대 공부란, 남자들이 군 생활이 술안주가 되듯 무용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원칙을 알려줬다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때도 그렇고, 의예과까지 나는 내가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고등학교 때는 전국 등수 한 자리도 해봤고, 그래서 사실 수능이 그리 어렵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수능 성적은 생각처럼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의대 본과에 올라와서, 정말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하는구나, 라는 걸 깨달았다. 짧은 시간 안에 정말 많은 양을 이해하고 또 정확하게 암기하는 사람들이 믿기지 않지만 실제로 있으며, 그런 사람들이 의대에서 1등을 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몇 마디만 나누어 봐도 정말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내가 나온학교는 정원이 140명이었는데, 그중 20등까지는 정말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다. 내가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 이 20명 안에 들어가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들과 나는 머리의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 원칙은, 최선을 다해서 1등을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면 매번 최소 50등 이내에만 들어가자는 것이었다(안타깝게도 내가 다닌 의과대학은 매번 시험마다 석차가 나왔다). 의대에서는 졸업할 때까지 수백 번의 시험을 보는데, 모든 시험에서 50등 이내에 드는 것은 쉽지가 않다. 물론 나도 사소한 시험들에서는 우연히도 1등을 한 적도 있지만, 아무도 공부를 안 하는 ‘기생충학’ 같은 과목이었기 때문에 큰의미는 없다. 정말 뛰어난 20명은 어떻게는 항상 그 등수 안에 들어간다. 하지만 21등부터 100등 사이는 성적이 유동적이다. 공부를 하면 25등이고, 시험 전날 놀거나 술을 마시면 100등이 된다. 항상 남들보다 더 공부하고 덜 놀고 책을 보면 30등에서 50등 사이는 유지할 수 있다.

근데 재미있는 것은, 수백 번의 시험에서 이 페이스를 유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늘 50등만 해도, 최종 성적은 30등 가까이 나오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성적의 기복으로 평균점을 깎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나도, 피부과를 제외하면 나머지 과는 원서를 내면 합격할 수 있는 성적을 졸업 성적으로 받을 수가 있었다.

사는 것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내가 분명 뛰어나게 두각을 보일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내가 부족해서 아무리 노력해도 중상밖에 안 되는분야도 있다. 하지만 그 중상을 늘 유지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노력을 해서 중상을 유지, 그리고 그 이상을 해내려고 하면, 최종 결과는 상위에 가깝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가늘고 길게 살라는 말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생각해봐도 인생은 마라톤에 가깝다는 건 분명하다.

작성자 : 박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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