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걸면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대답을 잘 못하면서도
괜찮다고 하신다.
어디 불편한데 있으시냐고 물어도
다 괜찮다고, 견딜만하다고 하신다.

병을 진단하고 병기를 결정하기 위해 이러저러한 검사를 하는 중인데
별 말 없으시던 환자분이
나에게 언제 항암치료를 시작할 거냐고 물으신다.
치료 시작하기 전에 해결할 일들이 있다며 하루 이틀 여유를 줄 수 있냐고 조심스럽게 물으신다.
그래도 될 것 같다고...

환자는 조용히 외출을 다녀온다.
원래 하시던 일을 마무리하고 치료를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가족들도 말은 별로 없지만
다들 신경이 곤두서있는 게 느껴진다.
회진을 가면 남편과 자식들은
'의사선생님께 다 말씀드려. 어디어디 불편한지...'
'아이 참, 괜찮아요. 이 정도는... 많이 좋아진 거예요. 괜찮다니까요.'
그렇게 첫 항암치료를 받고 퇴원하셨다.
진단이 어려워 시간이 많이 걸린 터라, 환자는 병원생활이 지겨운지 서둘러 퇴원을 하셨다.

다음 치료를 앞두고 중간쯤 되는 시점에 외래에 오셨다.
그 사이 오심 구토가 심했나보다.
교과서적인 기준에 맞게 했지만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용량이 좀 많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환자에게 이번 첫 번째 항암제가 가장 중요하다. 여기서 반응이 좋지 않으면 별로 가망이 없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욕심을 부렸다.
외래에 가족들이 한꺼번에 들어왔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환자의 정서가 매우 취약해져있는 것 같다.
가족들이 무슨 말을 한마디만 해도 자꾸 짜증을 낸다.
괜찮다니까 왜 그러냐고...
괜찮다면서 참았던 눈물을 보이신다.
가족들을 다 내보내고 환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괜찮은 척 하려니까 더 힘드신 거 아니냐고... 환자는 눈물을 떨구며 고개를 끄덕인다.
입원하면 정신과 선생님 면담도 하고 잘 듣는 수면제 처방도 받아 잠도 푹 자자고 했다. 환자가 동의하고 진료실을 나가서 다행이다.

치료할 수 없는 단계의 암을 진단받고
불안, 분노, 우울함 이런 감정들이 아직 본인 마음에서 해결되지 못하고 계신 것 같다.
누가 해결해 줄 수 있겠는가.
환자 스스로의 힘이 길러지기를 기다려야지...

조기유방암 환자분들도
치료 다 마치고 현재 검사 상 아무 이상이 없는데, 재발의 두려움으로 힘들어 하시는 분들이 많다.
어떻게 하면 재발을 막을 수 있냐는 질문에,
지금 하고 있는 치료를 잘 받으시고 긍정적인 마음이 중요하다는 나의 충고는 그들의 마음에 별로 와 닿지 않는다.
'결국 정해져 있는 게 아닐까요?' 낙담하듯 질문하는 환자도 있었다.
나는 '그럴지도 몰라요.' 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아무도 모르죠. 미래를 모르고 사는 게 인생이니까 그냥 삽시다.'라고 외친다.

괜찮은 척 하는 환자의 마음을
집요하게 파헤쳐서 힘들다는 걸 고백하라고 강요할 수도 없고
환자 눈치를 보면서 비굴한 눈빛을 보여서도 안 되고
너무 무관심하게 굴면 더 안 되고
과한 관심도 과한 무관심도 아닌 방식으로
가족과 환자가 잘 지내는 비법이 있으면 좋겠다.
말하지 않아도 잘 지낼 수 있는 비법...

항암 주기가 끝날 때마다 작은 소품을 선물하기
정해진 요일에 요리를 만들어서 식사대접하기
정기적으로 함께 산책하고 외출하기
중요한 것은 일시적인 게 아니라 정기적인 거
지금의 사랑과 관심이 정기적이고 영원할 것이라는 안도감을 주는 거 아닐까?
괜찮은 척 하는 환자의 마음이 스르륵 풀릴 수 있으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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