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이성 암환자의 치료가 효과적으로 잘 되고 있는지,
지금 쓰는 약을 계속 쓰는 게 좋을지, 아니면 약을 바꾸는 게 좋을지를 판단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CT 로 판단하는 것이 원칙이다.
CT에서 보이는 병변의 크기가 몇 퍼센트 커졌는지 혹은 작아졌는지의 기준이 정해져 있다.
예를 들면 총 병변 지름의 합이 20% 이상 커지면 병의 진행으로 판단, 약제를 바꾸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기준을 적용할 수 없는 애매한 상황들이 종종 발생한다.
총 병변의 합이 약간 커지는 분위기인데 20%는 안 될 때.
병은 조금씩 조금씩 커져가는 것 같고 - 그러나 '확실히' 나빠진 건 아니고 -
각종 피검사 수치들은 고만고만.

그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굳이 의사가 아니더라도
가족들이 보았을 때, 환자 스스로 생각했을 때
컨디션이 좋냐 안 좋냐, 일상생활을 잘 하고 있냐, 힘들면서 못하고 있냐,
잠을 잘 자는지, 소대변은 잘 보는지, 밥은 잘 먹는지 등의
일반적인 전신 상태이다.

객관적인 검사 기준으로는 애매해도
환자의 일상생활이 잘 유지되고 전신 상태가 점점 좋아지는 양상이면 나중에 보아도 경과가 좋다.
그런데 환자가 여기저기 자꾸 아프다고 하고, 뭔가 힘들어하고, 몸무게가 감소하고
영 컨디션이 별로 안 좋은 거 같다 싶으면 나중에 보았을 때 지금의 애매한 검사결과들은 결국 나빠지는 방향으로 간다.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지금의 애매한 검사결과들이 명확히 해석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현대 암 진단과 치료의 한계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연구들이 많이 진행되고 있지만...)

CT에서 보이는 병변의 변화는
수십억 개의 암세포가 덩어리를 형성할 때 비로소 가시적으로 나타난다.
그렇게 눈으로 변화를 확인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데, 그 전에 환자의 몸으로 말하는 변화. 그것이 통증으로 나타나는 게 아닐까?

내가 보기에
암환자들에게 있어서 설명할 수 없는 통증, 조절되지 않는 통증이 그런 지표 중의 하나이다.
외래든 입원이든
환자를 보면 젤 먼저 물어본다.

"컨디션 괜찮으세요?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세요?"
"불편한 데가 어딘지 손으로 다 짚어보세요"

일단 진통제를 잘 안 먹으려고 하는 환자에게는
진통제 강의를 좀 해야 한다.
장단점 의의, 부작용, 앞으로 용량 및 유지기간 등등
약장사처럼 '일단 한번 먹어봐' 심정으로 복용을 강요한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매일 진통제를 복용한 다음
한주일/두주일 후 반응평가를 해 본다.
진통제를 드시고는

"아주 좋아졌어요. 편해요." 환하게 웃는다. "진작 먹을 걸 그랬어요." (내말이!)

그런데 내가 신경 써서 약을 쓰는데도 잘 조절되지 않는 경우,
환자가 계속 힘들어 하는 경우
CT로 암의 크기나 몸 상태에는 큰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질병 진행을 알리는 싸인인 경우가 많다.
환자는 몸으로 말하는 존재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암환자가 아프다고 할 때, 어디 불편하다고 할 때,
그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객관적인 변화가 증명되기 전에 주관적인 변화가 선행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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