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수철교수님의 장편소설 <침대>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나는 침대다. 아니, 나는 침대가 아니다. 내가 처음부터 인간들을 위한 침대였던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 그루 나무였다. 하얀 나무줄기와 곧은 자태로, 숲의 귀족이라고 불리는 자작나무였다.(9쪽)” 침대를 잠자리로 삼은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인턴생활을 떠돌던 1년간 그리고 미국에서 연수를 하던 2년여가 전부였기 때문에 침대가 주는 깊은 맛을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만, 침대를 둘러싸고 다양한 군상들이 벌이는 삶을 침대가 화자가 되어 독자들에게 전하는 소설은 참으로 독특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삶과는 멀리 떨어진 동토 시베리아에 뿌리를 내리고 살던 자작나무가 억센 인연의 고리를 타고 났는지 베어져 침대가 되고 시베리아를 떠나 리에파야 항구에서는 노일전쟁에 출전하는 발틱함대의 병원선을 타고서 대한해협까지 왔다가는 일본 해군의 기습으로 함대는 무너지고 침대는 일본 군대의 전리품으로 노획되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한일병탄을 전후해서는 다시 대한해협을 건너 한국 땅에 이르게 되는데, 그때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소용돌이의 현장을 지켜본 역사의 증인이 되고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작가는 침대를 통하여 급변하는 우리의 근-현대사를 축약하고 그 이면에 엮여 있는 인간 군상들의 면목을 발가벗기고 있습니다.
화자인 내가 침대로 살아온 세월은  러일전쟁이 일어난 1904년보다 앞서 시작되었으며, 그 전에 자작나무로 살아온 생애까지 합하면 실로 장구한 세월을 인간과 자연을 통하면서 살아온 셈일 뿐 아니라 침대에 피를 뿌린 인간들의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으니 그 인간들의 피에 실린 혼까지 덧붙여져 영물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국 “나는 전쟁에 의한 무차별적 살육에서부터 사랑을 통한 숭고한 희생에 이르기까지, 인간사와 관련된 모든 일들을 내 온몸으로 겪어냈다. 그러면서 나는 인간들과 그들의 삶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질 수 있었다.(10쪽)”고 서두에서 자신의 삶을 요약하여 전하는 침대의 말처럼 정말 다양한 인간들이 화자와 관계를 맺으면서 살고 죽어갔습니다.

작가가 “처음 침대에 대한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을 정한 후로, 내 머릿속에서는 수없이 많은 일화들이 쉬지 않고 만들어졌다. 게다가 그 일화들이 서로 엮이면서 어찌나 다양한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쏟아져 나오는지, 그것들을 어떻게 한자리에 쓸어 담아야 할지 몰라 행복에 겨운 고민을 해야 할 정도였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58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소설에는 신화로부터 설화, 고대역사로부터 근현대역사는 물론 문학과 예술 등 다방면에서 이야기 거리를 끌어다 상황을 엮어내고 있습니다. 읽다보면 언젠가 읽거나 보았다는 기시감이 드는 것은 상황에 잘 어울리는 이야깃거리를 짧게 요약하여 버무려내고 있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이야기의 진행을 잠시 떠나 유영하던 정신은 곧바로 이야기의 흐름에 복귀하게 됩니다. 가끔은 침대를 쟁취하기 위하여 신이 인간들 사이에 전쟁을 일으키도록 부추기는 장면처럼 오버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는 장면도 없지 않았습니다. 침대를 사이에 둔 남녀들의 삼각관계는 영화 <은행나무침대>를 연상케 합니다만, 스토리의 앞과 뒤에서 잠깐 언급되는 정도이기 때문에 잠깐 스쳐지나가는 느낌일 따름입니다.

작가의 치밀한 구성은 마지막 에피소드로 접어들면서 진면목이 드러나게 됩니다. 시베리아에서 자작나무로 살면서 만나게 되는 샤먼 미누는 우그리아라는 여인을 두고 몽마 칼리우과 혼신의 힘을 다한 싸움을 벌이다가 결국은 자작나무를 베어 침대를 만들고 그 침대에 세 사람의 혼을 봉인하는 것으로 칼리우를 인간세계로부터 격리시키게 되는데, 이야기의 끝에서 우여곡절 끝에 봉인이 풀리게 되었는지 이 세 사람이 운명적으로 재회하게 된다는 구조를 담아낸 것입니다. 마치 케쿨레가 꼬리를 물고 맴도는 뱀의 모습을 보고 벤젠고리를 형상화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처럼 말입니다.

침대가 자신에게 머무는 사람과 교감한다거나 심지어는 그 사람을 조종할 수 있다는 설정은 어떻게 생각하면 소름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만, <침대>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무엇엔가 홀린 듯 침대에 이끌리고 있는 점도 특이하다고 하겠습니다. 만약 저라면 이런 침대에 몸을 눕히는 상황은 피하고 싶을 것 같습니다. 모름지기 침대는 편안하게 잠들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작가는 “사람이 침대 위에서 아름다운 꿈을 꾸기도 하고 악몽에 시달리기도 하는 까닭은, 침대라는 것이 애초에 천사와 악마, 구름과 진흙의 성질이 합쳐진 때문이며, 인간이 침대에서 태어나고 침대 위에서 죽는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찌 보면 침대란 인간에게 인큐베이터인 동시에 관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38쪽)”고 정의하고 있는 것은 장구한 세월에 걸친 스토리를 무리 없이 진행하려는 장치라 싶습니다. 워낙이 방대한 분량을 담은 소설로서 화자인 침대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등장인물의 세세한 부분보다는 화자인 침대 혹은 침대와 함께하는 등장인물의 심리상태의 흐름을 면밀하게 따라가는 점도 관심을 둘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침대

최수철 지음
580쪽
2011년 6월 10일
문학과 지성 펴냄


목차

제1장 침대의 탄생
제2장 대항해
제3장 이상한 나라의 침대
제4장 불타는 침대들
제5장 광대들
제6장 전쟁과 침대
제7장 잠과 꿈의 독재자
제8장 육체의 소유권
제9장 이 세상의 모든 침대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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