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찮게 TV를 보던 중 일전에 큰 인기를 모았던 '하얀거탑'의 한 장면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극 중에서 이선균이 가족들과 외식 중 진주라는 아이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급하게 병원으로 뛰어 들어가는 모습은 24시간 켜져 있는 당직 콜벨의 무서움을 여과 없이 보여주기에 충분했고, 꼬꼬마 의대생이었던 그 때의 나는 교수님조차 병원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벗어날 수 없음에 한탄하며 인턴 들어가기 직전 지레 겁을 먹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헌데 이랬던 내가 지금은 그보다 배로 힘들고 지겹고 화나고 짜증나는 하루살이 삯바느질 비정규직 신경외과 전공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을 보면 사람 인생도 참 모를 일이다.

여튼 나를 생각에 잠기게 만들었던 장면은 24시간 응급 콜벨이나 외식 중에도 병원에 가야하는 의사의 모습이 아닌 보호자로부터 직접 전화를 받는 이선균의 모습이었다. 환자나 보호자에게 직접 핸드폰 번호를 알려준다는 것은 자칫 의사 스스로를 위기에 노출시킬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일 수도 있다. 실제로 본원 신경외과 전문간호사들이 뇌심부자극술을 시행 받았던 몇몇 보호자들에게 긴급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개인 전화번호를 알려줬던 적이 있는데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문의 전화 때문에 곤혹스러워 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전공의는 어떻겠는가, 하루 200통 이상 걸려오는 콜도 모자라 퇴원했던 환자 보호자들의 전화까지 소화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경외과 특성상 중증 환자들이 대다수인데다 지속적인 관찰 및 추적검사가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대다수의 환자나 보호자들은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처음 진료를 받았던 의사에게 자신의 상태를 점검받기를 원한다. 설령 신경외과적인 문제가 아니라 할지라도 해당 의사에게 환자 상태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의지하고 싶어 하기에 폐렴 등의 내과적 문제조차 신경외과로 입원하여 치료하기를 원하는 경우도 상당수 존재한다. 몇몇 보호자들은 퇴원한 후에도 주치의 혹은 담당 전공의와 환자에 대해여 상담하고 싶다며 외래나 병동으로 전화 문의를 하고, 연결이 어려운 경우 담당의의 전화번호를 요구하기도 한다. 물론 환자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는 경우 상태를 잘 알고 있는 담당의가 치료에 대한 방향이나 계획 등을 수립하는데 적임자임은 두말하면 잔소리일 것이다. 때때로 시공간의 제약으로 담당의를 곧바로 만날 수 없는 경우, 환자나 보호자들은 진단 및 치료와 관련하여 전화로라도 상담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런 전화를 한두 통씩 용인하다보면 언젠가 걷잡을 수 없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나게 되고 정상적인 진료 시스템까지 마비시키고 붕괴시킬 우려가 있다.       

그래도 외상 및 단기 재원 환자를 제외한 몇몇 뇌종양 환자의 보호자들에게 나는 전화번호 알려주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 병동에서 두 달여 이상을 함께 보내며 동거 동락했던 그 환자들과 보호자들의 고마운 마음을 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는 열두 살 난 꼬마 아가씨도 있고, 대학교 후배도 있었으며, 친할머니 같았던 환자, 그리고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환자도 있었다. 때로는 신경외과가 아닌 분야의 문제로 문의해오기도 하지만 여유가 있다면야 몇 분이고 상담해주기도 한다. 덕분에 의학적으로 응급처치가 필요한 문제를 놓치지 않고 제때 적절한 치료를 받았던 환자들도 있었다. 오늘도 악성 뇌종양으로 수술을 받고 두 달 전에 퇴원했던 한 아저씨로부터 저 멀리 강원도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갑작스런 근력 마비를 어떻게 해야 하냐며 물어왔고, 즉시 가까운 병원으로 가서 CT를 촬영하고 필요하면 이쪽 병원으로 오시도록 당부 드렸다. 물론 재원 상태가 아닌 환자와 보호자들의 문의 전화를 받는 일은 매우 번거롭고 불편하다. 하지만 그들의 상태를 비교적 잘 알고 있는 내가 그들이 앓고 있는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설사 피곤하고 귀찮더라도 백번이고 더 알려줄 생각이다. 전화번호 11자리. 무언가 보상받을 수는 없지만 그것이 바로 내가 가진 것을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나눠줄 수 있는 일의 시작이 아닐는지 드라마 속 이선균의 모습을 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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