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만 두 살이 된 여자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할머니와 함께 진료실에 들어옵니다.  아이가 변 볼 때 많이 아파해서 보니 항문에 무언가가 생겼다고요.  관찰해보니 아이의 항문은 한쪽이 찢어진 치열이었고 그것에 의해 항문 바깥쪽으로 피부가 부어오르면서 염증성 피부꼬리가 생겼습니다.  아이의 치열은 어른의 치열과는 조금 달리 생각해야 합니다.  원인에 있어서는 유아기적 심리스트레스가 배변습관의 부조화를 일으켜 발생하는 경우가 있고, 경과에서는 배변시의 항문통증이 음성피드백으로 작용하여 배변거부와 이로 인한 만성적인 변비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저것을 물어보니 엄마는 직장 때문에 서울에서 일하고 있고 아이는 할머니가 키우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휴가차 엄마와 함께 있다고요.  아이는 평소에도 잘 먹지 않고 음식을 거부한다고까지 합니다.  변도 딱딱한 채로 잘 나오지 않아 며칠 전에는 할머니가 관장약을 사서 관장을 해주기도 했답니다.  저는 두어 가지 약을 처방하고 좌욕을 시킬 것을 권하면서 아이가 엄마와 떨어져 살며 받을 수 있는 심리적 스트레스가 치열을 유발했을 수도 있음을 설명하며 아이에게 좀 더 안락감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라 권하였습니다.  생계가 달려 멀리 떨어져 일하는 엄마에게 당장 아이와 함께 생활하라는 이야기는 차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고등학생인 한 여자아이가 엄마와 함께 진료실로 들어오는데 아이는 한쪽 발을 절뚝입니다.  진찰을 해보니 라면에 부을 물이 흘러 발등에 떨어지면서 화상을 입었네요.  그것을 괜찮을 줄 알고 며칠 놔두었다가 염증이 생겨 병원으로 찾아온 것입니다.  화상처치와 함께 이틀 후에 오라고 했더니 옆에서 엄마가 난감한 표정으로 진료시간이 몇 시까지냐 묻습니다.  5시까지라고 하자, 아이가 학교 마치고 시간이 빠듯한데다가 바로 학원에 가야한다며, 그 다음날에 오면 안 되겠냐고 제게 묻습니다.  조금 황당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아이 화상이 중요하시면 이틀 후에 오시구요, 화상보다 학원이 중요하면 그 다음날 오세요."  그랬더니 대번에 오라는 날짜에 오겠다며 민망해합니다. 

어린아이부터 대학생 또는 이미 직장생활을 하는 젊은 사람들까지, 종종 보호자 격으로 부모님과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로 어머니가 함께 오시더군요.  그런 분들 중의 십중팔구는 환자인 본인보다 보호자로 함께 온 부모님이 먼저 이야기를 꺼냅니다.  아이가 어려서 부모님의 상세한 설명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저는 일단 첫 한두 마디를 들은 다음에 환자로 온 아이나 젊은 분들에게 직접 이야기하기를 권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자신의 상태를 가장 정확히 아는 사람은 환자 자신이고, 대개의 환자들은 직접 자신을 설명할 능력이 되는 충분한 나이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옆에 서서 마치 자신이 아이에게 얼마나 사랑을 쏟아 붓고 있고, 얼마나 관심 있는가를 증명하려는 듯, 애써 설명하고 있는 부모님의 모습은 그다지 좋아 보이는 모습도 아닌데다가 다 성장한 자식에게 아직도 유아기적 시절의 애정을 보여주려는 노력이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그 중에서도 아이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관심은 공부하는 아이의 스케줄을 관리해주고 따라다니면서 이런저런 지시(부모로서는 조언과 부탁이라 이야기하겠지만..)를 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양, 모든 판단을 내려주는 학부모를 보다보면 속으로 짜증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런 모습에는 저 역시 표정관리가 종종 이루어지지 않아 진료를 마치고 나면 간호사에게 가벼운 핀잔을 듣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부모의 애정을 받을 수 없어 신체적 이상까지 겪어야하는 아이들은 또 얼마나 애처로운가요.  생계 때문에, 또는 여러 사정상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발달 심리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몸과 마음은 따로가 아닌지라, 몸에까지 이상을 일으켜 병원을 찾는 아이들은 정말 안타깝습니다.  위의 경우와 같이, 단순히 아이의 안 좋은 부분에 대한 의학적 처방만으로는 당장의 증상호전은 기대해도, 지속적인 문제의 발생가능성은 치료자로서도 답답함과 어떤 한계를 느끼게 합니다.  차라리 모른 척 또는 몰라서 약만 처방하고 기다려보라는 이야기만 건네면 저도 애써 걱정하지 않고, 양육자에게도 아이에 대한 일말의 미안함을 안겨주지 않아도 될 텐데 괜스레 이야기했나 싶을 때도 종종 생깁니다.  아이의 상태에 대해 책임과 책망을 부모나 양육자라고 해서 덮어씌울 수도 없는 일이니 실체 없는 사회적 존재에 그 책임과 책망을 돌려보아도 허전한 마음만 남습니다. 

진료실에 있다 보면 참 많은 아이들과 부모를 만나게 됩니다.  아이 옆에 붙어 면밀한 관심을 가져주지 못한 미안함을 아이의 상처를 빌미로 제게 불평불만의 모습으로 표출하는 부모들, 소위 일진이라는 아들을 통제할 방법이 없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저 공부와 과외만을 강요하는 어떤 엄마, 그리고 보호자라고는 만나기 꺼려하는 할아버지밖에 없어 쉼터에 머물면서 맹장수술을 위해 보호자 자격으로 사회복지사 언니를 불러야만 했던 어떤 여중생..  물론 이렇게 마음 복잡하기만 한 환자들만 만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환자들과 보호자들을 만나다보면 제 마음이 혼란스럽고 복잡하기만 해집니다. 저야 그저 환자로 대하며 당장의 문제에만 접근해주고 재발여부와 상관없이, 그리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들 없이 처방만 잘 내려주면 되겠지만, 이미 넓어진 오지랖은 저를 그러하지 못하게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답답해하고 화를 내어본들, 대상은 그들이 아니고 이미 실체 없는 사회구조속의 무언가에 향해있습니다.  그 후엔 허탈함과 허망함일 뿐인 기분만 느끼곤 하죠.  어린아이들의 말없이 몸으로 보여주는 스트레스, 아이와 부모 사이에서 느껴지는 어떤 다양하기도 한 관계, 환자로 제게 오는 아이들의 다양한 모습 다양한 환경들은 저를 찾아오는 어른들을 보는 것과는 다른 어떤 세상의 모습을 느끼게 합니다.  그런 세상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세상은 그런 아이들 신경 쓰지 말고 그저 사회가 말하는 발전과 변화, 성장에만 신경 쓰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 또다시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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