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혈압약하고 고지혈증약도 같이 한달치 주세요
오늘 혈압 잰 종이 좀 보여주실래요? 안 쟀는데...
한번 재고 오실래요?
그러는 동안 최근 콜레스테롤 검사결과를 찾는다. 정상.
고지혈증약의 보험기준은 나름 까다로워서 수많은 과거병력과 언제 수치가 올랐었는지 이런걸 다 따져야 하는데 외래에서 그걸 뒤져볼 시간이 없다.
삭감을 각오하고 그냥 처방해 드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대개는 설명을 한다. 환자가 이해를 못하거나 오해를 하는 것 같으면 설명시간이 길어진다. 외래 지연의 원인이 된다.

제가 암을 주로 보는 의사이다 보니까
혈압이나 지질대사 관련 전문지식도 짧고, 부작용에 대해서도 어떻게 모니터링 해야하는지 잘 모릅니다. 이 약을 처음 처방해주신 의사선생님께 가서 약제를 계속 유지해도 되는지, 앞으로 장기적으로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상의하고 진료를 받아 약제를 유지하시는게 좋겠어요. 제가 일단 한달치는 드릴테니, 앞으로 이 약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 선생님께 처방받도록 합시다.

환자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서 일단 한달치는 드린다.
이렇게 말하면, 환자는 차마 말하지 않지만 좀 깐깐하게 구는거 아니냐는 듯한 서운한 표정을 내비치신다.
사실 암환자는 중증질환 적용을 받기 때문에
암을 주진단명으로 기록하면 다른 경증질환에 대한 약처방을 하는 것에  보험상 큰 문제는 없다.
그러나 의학적으로 무책임한 처방이 될 수도 있고, 의료전달체계의 취지에 살린다는 의미에서 환자가 섭섭해 하더라도, 원칙을 지키려고 한다. 그런데 이런 걸 설명하는게 더 어렵다.

환자 입장에서는
컨디션도 않좋은데, 이병원 저병원 다니면서
따로 피검사하고 따로 약 타는게 불편하실 것 같다.
그런 점을 감안해서 내가 다 해드릴려면
내가 그 질환까지도 책임을 져야 하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 암 하나 잘 보기도 힘든데, 그건 오버인것 같다. 그렇다고 대학병원 다른 과 협진을 보게 하는 것도 더 번거롭다. 그래서 환자가 섭섭하더라도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종양내과 의사는
항암치료를 중심으로 하되, 항암치료에 흔히 동반될 수 있는 기본 합병증을 커버해야 한다.
그러다보니 아주 소소한 증상까지도 확인하고 대처법을 마련해줘야 한다. 환자와의 외래가 길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환자는 어딘가가 불편하면 이것저것 하소연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당연하다.
젤로다 먹다가 손발 벗겨지면 그때마다 피부과에 보낼 수는 없다. 왠만한 스테로이드 로션/연고를 조절해 드리면서 바르게 해야 한다. 양말 벗게 해서 발가락 사이사이 짓무르고 있는 상처는 없는지 확인하고 젤로다 용량을 조절해야 한다. 입안이 헐면 다양한 종류의 가글과 연고를 처방해 드려야 한다. 입안에 곰팡이균이 모여있는 건 아닌지 꼭 입도 들여다 봐야한다.
탁솔 맞다가 피부 가려움증이 생기면 항히스타민제와 연고도 드리고, 손발이 저리면 기본적인 신경과 약을 두세번은 시도해봐야 한다. 그때마다 신경과 보내서 근전도 검사를 하시라고 할 수는 없다. 환자가 자신의 아픈 증상을 충분히 설명하게 한다. 의사는 그걸 잘 들어야 수많은 통증의 원인 중에 환자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감별할 수 있다.
또 항암제는 기본적으로 뇌신경 기능을 억제해서 수면 장애, 정서장애가 오는 경우가 많은데, 그때마다 불면증으로 정신과 진료를 의뢰할 수는 없다. 내과 의사가 써도 안전한 약 두세가지는 시도해봐야 한다.
장기적이 항암치료를 하는 동안, 철분결핍성 빈혈이 동반되는 경우도 많은데, 철분제 주고 골수에 철이 잘 채워져가고 있는지 정기적인 검사를 해가면서 복용기간을 결정해야 하고 혈액검사 패널을 주의깊게 들여다 봐야 한다.
치료 중 B형 간염이 활성화되지는 않는지, 혈전증이 새로 생기거나 악화되는 건 아닌지, 붓기가 생기면 갑상선 기능에 이상이 온건 아닌지...
환자가 말을 많이 하도록 해 줘야 한다. 그러면 의사도 명의가 될 수 있다. 시간이 문제다.

사실 전 내과적인 영역의 지식을 섭렵해야 한다.
그런데 난 과연 이런 지식들을 잘 적용하고 치료하고 있을까? 내가 비전문적이라면, 내가 처방하는게 맞는걸까? 그렇다고 환자를 증상이 생길 때마다 다른 과 협진을 보게 해야할까?
결국 줄타기다. 어느 선까지는 내가, 그 다음은 전문가에게.
내가 자신있는 분야라면 검사도 잘 하고 결과도 잘 챙겨서 환자 투약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
내 분야가 아니라면, 전문가 선생님께 그 몫을 건네야 한다.
그 심정을 모르는 환자들은
그냥 선생님이 다 해주시면 안되요? 하시지만
그렇게는 안될 것 같다.
나는 만능이 아니므로.

그러므로 우리 환자들께 양해의 말씀을 올린다.

귀찮으시더라도 따로 약 받읍시다. 잘 관리하면서 제대로 약 먹읍시다.
대충 먹지 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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