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치료 중
백혈구 촉진제라는 걸 맞으면
골수 내에 있는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않은 백혈구들이 자극을 받아 튀어나온다.
골수에 있는 백혈구가 말초로 튀어나오는 과정에서
환자들은 등이나 엉덩이 (골수가 많이 만들어지는 곳) 통증을 극심하게 경험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통증이 오고 난 다음에 백혈구 수치가 오르는 걸 몇 번 경험해 본 환자들은
몸이 심하게 아픈 걸 보고, 내일쯤 백혈구가 오르나 보다 그렇게 짐작하신다.
백혈구 촉진제를 맞고 아픈 통증은 진통제로 잘 조절되지 않아서 약을 먹으나 마나라고들 하신다.
왜 이렇게 아프대요?
그 약을 맞으면 그렇게 아플 수 있어요.
왜냐하면
...... 와 같은 이유 때문이에요.

아, 그래요? 그렇다면 참아야죠.
전 또 뼈로 병이 진행된 줄 알아서 불안했거든요.
어디만 아프면
병이 진행된 줄 알고 가슴 졸인다.

탁솔계열의 항암제를 맞으면 주사 맞은 지 48-72시간이 지난 후 몸살이 온다.
그것이 이 항암제의 대표적인 부작용이다.
손발 끝이 저릿저릿하기 시작해서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 같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의 이상한 불편감과 통증이 동반된다.
그렇게 아픈 자신을 견디기 어렵고 아프니까 기분도 다운된다.
그래서 아예 진통이 오기 전부터 미리 드시라고 진통제를 처방해 드리는데,
진통제 설명서에 마약성 진통제라고 쓰여있는 걸 보고 지레 겁을 먹고 약을 안 드신다.
잔뜩 아파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때 가끔 한 알씩 드신다.
그런데 그렇게 먹으면 효과가 없다. 악효가 나타나는데 2-3시간 이상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규칙적으로 며칠 먹는 게 훨씬 좋다. 아예 처음 며칠 간은 아프든 안 아프든 규칙적으로 3-5일 정도 드시는 게 좋다.
그렇게 설명해 드리고 약을 처방하지만, 정작 먹는 건 약을 타가지고 간 환자 맘이다.
진통제 안 드시고, 끙끙 앓다가, 힘들어서 다신 항암치료 못 하겠다고 울상으로 외래에 나타나신다.
제가 그 약은 구토감 그런 거 없는 대신에 아픈 게 특징이라고 했잖아요.
그게 부작용이니까, 통증 오기 전에 미리 드세요.

언제 선생님이 그런 말 했어요?
그런 줄 알았으면 그냥 먹을걸.
근데 그게 마약성 진통제인데, 그거 계속 먹으면 중독되지 않나요?

괜찮아요. 절대 중독 안 돼요. 그냥 드세요.
알겠어요. 항암제 때문이라면 먹을게요.
난 나만 그런 줄 알았어요. 원래 그런 거군요!


자기가 왜 아픈지,
왜 불편한지
그 이유를 환자가 이해하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냥 의사가 알아서 해주겠지, 그냥 선생님을 믿으니까 시키는 대로 해야지, 그런 환자도 있지만
자기 방식으로 자신의 질병에 대해 설명하려고 하는 환자들,
본인의 인식체계 내 질서에 따라 병을 이해하려고 하는 환자들,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문제 해결을 위해 자구책을 구하는 환자들의 노력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이
때론 의사의 언어와 충돌하여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하고
때론 말도 안 되는 선택으로 이어져 어이없는 결과를 초래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환자가 스스로의 상태를 잘 이해하고 있으면
의사의 처방을 이해하고
자신이 스스로를 위해 노력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 더 주체적으로 노력한다고 믿는다.

방명록을 통해
자신의 몸에 발생하는 여러 문제,
주위 사람들의 권유와 좋다는 의료정보들에 대해 질문을 하시는 분들을 보면
짧은 외래 진료 시간 동안
환자들의 마음속에 얼마나 많은 갈등이 오갔을까 짐작한다.
질문할까 말까
물어볼까 말까

진료 시간 뒷부분으로 가면
환자들이 그런다.
오늘은 진료가 너무 지연돼서 저는 질문 안 하고 블로그에 질문 올릴께요.
정말 죄송하다. 아무리 글쓰기가 자유로워도 말로 하는 것만 못한데...

어떤 모 종양내과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종양내과 의사는 너무 환자를 많이 보면 안 된다.
한 세션에 30명 이상 보는 건 종양내과 의사에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맞는 말씀이다.
입원 환자 회진도 천천히 돌면서 환자들의 목소리를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한다. 시스템에도 나에게도 한계가 많다.

모 선생님은 지적하셨다.
환자 보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쓰는 건 스스로를 소모하게 된다고.
대학병원에서 의사로 일한다는 건 진료도 중요하지만, 연구나 교육에도 비슷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므로 적절히 시간을 배분할 줄 알아야 한다. 여전히 나에게 한계가 많다.

그러나
난 내 능력 닿는 데까지 설명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 환자들을 강한 주체로 만들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고 생각한다.
환자가 스스로 자기 몸에 대해, 자기 병에 대해 주체가 되어야 건강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는다.
19세기 병원에서 20세기 의사가 21세기 환자를 치료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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