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나라에는 참 재미있는 법이 시행에 들어갔다. 세계적으로도 드문, 미성년자에 대한 야간 게임 통행금지(?)가 그것이다. 물론 게임중독에 빠진 아이들을 보호한다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게임과 놀이라는 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서 서글프다는 느낌도 든다. 그래서 오늘은 TED 강연 중에서 놀이와 관련한 훌륭한 강의를 하나 소개할까 한다. 게임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살아가는 의미와 관련하여 지나치게 유교적인 사고에 여전히 지배되고, 논다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인 우리 사회에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스튜어트 브라운의 강의이다.


15세기만 하더라도 놀이는 매우 일반화되어 있었다고 한다. 스튜어트 브라운은 유럽의 어느 앞마당의 놀이를 소개하는데, 무려 124가지의 서로 다른 놀이를 하고 있다. 나이를 불문하고 이런 놀이에 빠져있는 것은 이 사회에서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더 나아가서 놀이는 자연에서도 흔하게 관찰이 가능하다. 스튜어트 브라운의 강의에서 소개된 시베리안 허스키의 놀이, 그리고 여기에 동화되어 발레를 추는 야생의 북극곰은 죽음으로 끝났을지도 모를 싸움의 위협을 넘어서서 서로가 놀이를 하는 합의를 본능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상을 보면 우리들의 본능 속에 놀이에 대한 열망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멋진 놀이에 대한 강의를 하는 스튜어트 브라운도 원래 살인범을 연구하다가 놀이의 가능성에 눈을 떴다고 한다. 비극적인 대량 살인행각을 벌였던 텍사스 타워 살인범인 찰스 휘트맨을 연구하다가 그가 아주 심각하게 놀이가 부족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연구를 지속하면서, 놀이의 부재와 정상적인 발달상의 놀이에 대한 점진적인 억압이 이런 충동적인 비극을 막지 못하는 취약함을 불행하게도 그에게 선사한 것이다.


인간이 처음으로 놀이를 하는 것은 엄마와 아기가 눈을 맞추고 아기가 사회적 웃음을 처음 짓는 순간 엄마가 기뻐하며 이런 저런 말을 아기에게 하고 웃으면, 아이도 옹알이를 하고 웃으면서 즐거워하는 순간에 벌어진다. 놀이와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뇌과학 연구를 해보면 이 때의 뇌의 반응은 놀이를 하면서 즐거워하는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놀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놀이에는 정말 다양한 것들이 있다. 위 아래로 뛰고, 몸도 흔들어보는 동작들이 커다란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다. 막춤이나 댄스도 그런 측면에서 정말 좋은 몸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건을 가지고 다양한 조작을 해보는 것도 좋은 놀이이다. 동물들도 자신이 조작할 수 있는 어떤 물건이 있으면, 이것을 가지고 한참을 논다. 아마도 동물을 키워본 사람들이라면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경우에는 손이 매우 정교한 동작을 가능하게 하므로, 다양한 놀이를 하는데 아주 적격이다.


몸으로 하는 놀이가 중요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JPL(NASA의 제트 추진 연구소)의 컨설턴트인 신경과 의사 프랭크 윌슨과 기술자인 네이트 존슨의 연구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들은 캘리포니아 일부 고등학생들에게 문제해결 능력이 사라졌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들이 발견한 것은 자동차 고장을 고치는 등의 문제 해결 능력이 없는 학생들은, 전반적으로 손 자체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연구를 좀더 진척을 시켜서 프랭크 윌슨은 "손"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실제로 JPL, NASA, 보잉 등의 회사에서는 연구개발 인력을 채용할 때 일류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다해도 차를 고쳐보지 않았거나, 어릴 때 손으로 놀아보지 않았다면, 문제해결능력이 떨어진다고 간주한다. 이렇게 놀이는 현실적이고도 중요한 것이다.


몸 놀이 말고도 상상놀이도 매우 중요하다. 아마도 어렸을 때 여러 가지를 상상하고 무엇인가를 만들거나 그렸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노는 사람이 되기 위해 상상놀이 만큼이나 중요한 것도 없다. 어렸을 때 너무나 쉽게 했던 소꿉놀이도 이런 상상놀이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놀이는 호기심과 탐험으로 시작된다. 호기심과 탐험은 놀이의 한 부분이다. 어울리고 싶다면, 사회적 놀이가 필요하다. 사회적 놀이는 사람들을 모이게 만드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최근의 나꼼수 현상도 어찌 보면 사회적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가 사회적 놀이의 형태로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오늘 정봉주 전의원의 대법원의 유죄 확정판결이 낫더군요. 정말 안타깝습니다. 정치적 의도를 가지지 않는다면 그런 판결이 나올 수 있었을지)


그렇다면, 놀이는 인간의 뇌에 어떤 역할을 할까? 아쉽게도 놀이와 관련한 연구에 연구지원금이 많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많은 것을 모른다. 되려, 사회에서는 놀지 못하게 만드는 것에만 관심이 있으니 이를 어떻게 해야 할까? 스튜어트 브라운은 그런 측면에서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다. 놀이와 관련된 뇌신경학을 살펴보고, 전문가들을 모아서 연구를 할 수 있는 국립놀이연구소(National Institute of Play)를 설립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동물의 세계에서는 놀이가 객관화되었다. 어린 쥐들은 자라면서 본능적으로 놀이에 빠지는 시기가 있다. 소리를 지르고, 레슬링을 하고, 서로 넘어뜨리는 놀이를 하고 자라는게 정상인데, 실험 대상 쥐들에게 노는 것을 금지하고 다른 쥐들은 또 허용을 해주는 실험을 한다. 그리고, 양쪽 그룹의 쥐들에게 고양이 냄새가 배어있는 굴레를 채워주면 본능적으로 도망가서 숨는다. 여기까지는 죽기 싫어서 도망간 것이므로 차이가 없다. 그런데, 그 뒤에 두 그룹이 차이가 난다. 안 놀아본 쥐들은 다시는 나오지 않고, 숨은 그 자리에서 죽는다. 놀아본 쥐들은 환경을 천천히 탐구하고, 다시 세상으로 나오려고 한다. 이 같은 현상은 놀이가 생존에 얼마나 중요한지 시사한다.


놀이의 반대는 일이 아니라 우울증이다. 놀이 없는 인생을 상상해보면 유머도, 불장난도, 영화도 게임도, 환상 등도 없는 인생이 된다. 우리는 평생 놀이를 할 수 있다. 인간들은 평생에 걸쳐 놀도록 설계가 되었다. 그리고 놀이 신호를 보내는 능력도 있다. 인간 신뢰의 근간은 놀이 신호를 통해 쌓여간다. 그런데 문화적인 이유건 다른 이유건 어른이 되면서 그 신호들을 잃어버리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생체 인류학자들은 인간이 가장 유아적이고, 가장 유연하며 가장 가소성이 높은 생명체라고 한다. 즉, 가장 장난스럽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융통성이 발생한다.


일과 놀이를 같이, 즉 노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지 말고 생활 자체에서 매 분, 매 시간 동안 몸을 이용한, 물건을 이용한 사회적인 놀이, 환상 놀이, 변화를 일으키는 놀이에 빠져볼 수 있다면? 아마도 더욱 풍성하고 활력 넘치는 인생이 될 것이다. 그런 환경으로 일터를 만들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고, 개인의 인생도 그렇게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싶다. 우리는 놀이에 대해 조금은 더 관대해져야 한다. 아래 스튜어트 브라운의 훌륭한 강연을 임베딩하였으니, 더 자세한 내용은 그의 강의를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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