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연






퍼펙트 센스

감독 데이빗 맥킨지 (2010 / 영국, 독일, 스웨덴, 덴마크)
출연 이완 맥그리거, 에바 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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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바이러스의 등장, 통제되지 않는 감염질환 등은 현대인의 잠재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인류를 위협하는 위험요소다. 1980년대 AIDS가 그랬고 최근에는 호흡기로 전파되는 변종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죽음의 공포를 보여줬다. 만약 감각을 상실하게 하는 바이러스가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상상하기도 싫지만 <퍼펙트 센스>는 그런 호기심에서 출발한 영화다. 인간의 감각이 사라졌을 때 사람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잔인하게 느껴질만큼 생생하게 전달한다.


인간의 감각을 상실하게 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바이러스의 등장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물론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바이러스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은 극심한 슬픔을 경험한 뒤 냄새를 더이상 맡지 못하게 된다. 트럭 운전수가 차를 세우고 눈물을 흘린다. 마트 점원이 계산을 하다 말고 주저 앉고 흐느낀다. 인생에 있어 가장 슬펐던 일들을 떠올리고 후회한다. 영화 속 여주인공인 수잔(에바 그린) 역시 음식을 먹다가 말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울먹인다.


감각은 기억과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다. 기억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감각기관으로 정보가 들어와야한다. 이 정보는 뇌로 들어와 하나의 기억을 만든다. 뻥튀기 과자를 집었을 때 그 냄새로 어렸을 때 시골 장터에서 ‘펑’하는 소리, ‘하얀연기’, ‘고소한 냄새’ 그리고 ‘내 손을 잡고 있던 할머니’를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감각을 통해 머리 속에 있는 기억의 단편을 끄집어내기 때문이다. 이런 감각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우리가 회상할 수 있는 기억이 줄어든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기억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줄어든다는 것을 말한다. 후각을 잃어버리면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눈물과 슬픔을 느꼈다는 영화 속 설정은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묘한 설득력을 가진다.


후각은 음식을 맛볼 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가 맛있다고 느끼면서 음식을 먹는 것 중 상당 수는 후각이 없으면 느끼지 못한다. 감기나 비염으로 코가 꽉 막힌 상태에서는 진수성찬도 그다지 끌리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렇다면 인류가 후각을 상실했을 때 가장 피해를 입는 산업은? 그렇다. 요식업(식당)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충분한 맛을 느끼지 못한다. 잘하는 음식점일 수록 손해는 크다. 요리사인 마이클(이완 맥그리거)가 있는 레스토랑도 그 중 하나였다. 좌절도 잠시, 마이클은 다시 손님들을 끌어 들이기 위해 더 강한 향신료와 시각적 효과로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 낸다.


후각을 상실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레스토랑이 잠시나마 다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만류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의 감각 중 후각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아서다. 일각에서는 인간의 후각은 퇴화 중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인류가 직립을 하고 도구를 쓰는 가운데 더 이상 후각의 중요성은 낮아졌다는 설명이다. 후각이 극도로 발달한 개에 비교하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포유류나 파충류에 비해서도 인간의 후각은 열등하다. 야생 동물들이 생존에 필요한 먹이를 찾기 위해 후각을 활용하는 것과 달리 인간이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은 경제적(?) 감각이지 후각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영화 속 인류는 후각을 잃어버렸건만 세상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다시 돌아간다. 너무나 평화롭게. 따뜻한 차가 풍기는 향과 함께 과거 함께 했던 사람들을 추억할 수는 없지만 그 정도의 기억 손실은 견딜만한 모양이다. 하지만 감각 상실 바이러스는 인류의 미각마저 빼앗아 가버린다. 이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다는 것은 식당이 주는 분위기가 전부가 되버렸다. (사실 미각과 후각이 온전할 때에도 멋진 레스토랑을 찾는 이유 중 하나는 분위기나 서비스 때문이긴 했다.) 이제 요리사인 마이클이 음식을 만들 때 신경 써야하는 것은 생존에 필요한 지방과 탄수화물을 적당히 섞어 딱딱하게 음식을 만들거나 부드럽게 만들거나 하는 정도다.


영화 속에 나오지는 않지만 후각과 미각을 가지고 있던 시절에 비해 식중독으로 병원을 찾는 사람들은 늘어날 것이다. 상한 우유를 마시더라도 상한 줄 모를 것이고, 썩은 생선이 주는 독한 냄새와 역겨운 맛을 못 느끼니 말이다. 유통기간을 엄격히 지키도록 하고, 철저하게 세균 검사를 하거나 아애 방사선 조사로 세균을 날려버리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물론 후각이 사라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삶은 계속 될 수 있다. 후각과 미각과 함께했던 추억만큼은 다시 돌이킬 수 가 없을 지라도. 여전히 사랑하는 가족을 안고 체온을 나눌 수도 있고, 추억이 될 수 있는 사진을 찍을 수도 있다.


만약 이 상태에서 청각도 잃는다면? 더 이상 목소리는 의사를 전달하지 못한다. 펜과 노트가 없으면 배가 고픈지 뭘 하고 싶은지 알 수 없다. 이젠 멀리 떨어진 가족에게 손쉽게 안부를 물어볼 수도 없다. 전화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국가 조직을 유지하는 일도 쉽지 않아진다. 명령을 전달하고 수행하기 쉽지 않다. 사회의 주요 기능들이 중단된다. 바이러스가 인간의 감각을 하나씩 빼앗아 가고 있지만 ‘아직’ 살아있음을 감사해야할 수는 있다. 아직 볼 수는 있으니 말이다. 물론 이쯤 되면 상당수의 사람들은 혼란에 빠져 폭도가 되는 것이 평범한 반응이겠지만 말이다.


마치 어린 아이가 잠자리의 날개를 조금씩 어 ‘날 수 있는 최소한의 날개’를 알아보는 것과 비슷하게 영화는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최소한의 감각은 무엇인지 실험하듯 전개된다. 감각을 잃어가면서도 남녀의 사랑이 지속되는 모습을 그리는 이 영화는 <퍼펙트 센스>라는 역설적인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인간이 인간다운 것이 단순한 감각만은 아니라는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후각, 미각, 청각 마지막에는 시각까지 잃어버린 영화 속 주인공 남녀의 사랑이 지속되기를 기대하도록 만들면서 영화를 끝내는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조금만 엉뚱한 상상을 해보자. 인간은 고등동물로 분류되며 복잡한 도구를 쓰는 지구상의 최고의 지적인 동물이다. ‘개나 파충류’보다 후각이 발달하지 않았고 ‘박쥐나 돌고래 같은’ 미세 음파를 감지할 능력이 없음에도 컴퓨터와 같은 복잡한 도구를 사용하고 뛰어난 지능으로 지구를 지배하고 있다. 그렇다면 감각을 잃어버리더라도 인류는 여전히 ‘만류의 영장’이 될 수 있을까? 아니 생존이 가능하기는 할까? 감독은 이런 무거운 화두를 남녀연애 이야기로 포장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시각, 청각, 후각 등 생존을 위해 최소한으로 존재해야하는 감각들이 사라진 인류는 사실 고기 덩어리로 한 순간 전락할 것이다. 천적이 없던 무인도에서 살면서 날개가 퇴화했던 살찐 조류 ‘도도(Dodo)새’가 인간이 발을 디딘지 불과 한 세기도 안되서 멸절을 했던 것 처럼, 자기 스스로를 돌 보지 못하게 된 인간은 먹이 피라미드의 최상위 포식자가 아닌 최하위 바닥층에 위치하게 될 것이다. 대부분은 기아와 질병으로 목숨을 잃게 될 것이고 소수 생존한 인류들도 과거처럼 ‘만류의 영장’이라는 지위와는 거리가 먼 원숭이보다 못한 하등한 동물로 전락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상상해보라. 앞도 보이지 않고 보이지도 않고 냄새도 못 맡으며 맛도 못느낀다. 손을 더듬으면서 길을 걸을 수는 있겠지만 음식을 찾기도 쉽지 않고 찾은 것이 먹어도 되는 음식인지 구별할 수 없다. 사냥을 할 수도, 씨를 뿌려 작물을 키우는 것도 불가능하다. 살금 살금 다가와 목덜미를 물어 뜯는 들개를 피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흔히 평범한 것들의 소중함을 이야기할 때 ‘공기’를 예로 든다. 하지만 인간의 감각 역시 인간이 인간 답게 할 수 있게하는, 최소한의 생명 연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퍼펙트 센스>는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게 하는 우리가 감사한 줄 모르며 누리고 있는 감각들을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극한의 상황에서 나와 우리와 사회가 어떻게 변하게 될지 상상하고 싶은 모든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영화다.


<과학동아 2011. 12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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