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건대 우리에게 우리의 일을시킬 pk가 있었다면 (카이, 2012)

나는 꿈꾸었노라, 동료인턴과
내가 가지런히
응급실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동틀녘 숙소로 돌아오는 꿈을,
즐거이, 꿈 가운데.

그러나 기력 잃은
내 몸이여,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일을 시킬 pk가 있었다면!
이처럼 지치랴, 아침에 저물 손에
에라이 새로운 탄식을
얻으면서

폴리에, ABGA랴,L-tube랴,
내 몸은 떠 가나니, 볼 지어다.
pk의 반짝임은, 그들의
아득임은,
물결뿐 떠올라라, 응급실 필드안에.

그러나 어쩌면 황송한 이 심정을!
날로 나날이 내 앞에는
병력청취와
술기와 노티할 일들이 이어져있다.
나는 나아가리라. 한 걸음, 또 한걸음.

보이는 응급실 정문앞엔 온 교대해줄
인턴동무들
저 저 혼자 ...... 응급실에서 활활
타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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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 : [명사]
[의대] 의과대학 본과 실습생을 일컫으며, 응급실에서 인턴대신 ABGA 를 비롯한 온갖 술기를 대행해 주는 인턴에게 있어서 고마운 존재를
일컫음. PK들마다 능력치는 조금씩 다르다.




[해설]

이 시는 24시간의 응급실
근무를 마치로 해가 뜨는 공간을 걸어서 돌아오는 꿈으로 시작한다. 이 시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꿈에 의한 장치는 하루에 노동을 함께할
즐거운 "PK동무"들도 없거니와 "기력"도 없다는 상실의식을 더욱 절실하게 한다.

시에는 지금은
잃어버린 본4 국시 끝날 이후의 즐거운 추억이 석양처럼 깔려있다. 화자의 현실은 암담하다. pk가 존재하지 않는 병원 응급실에서 근무중인데
그마저도 탄탄대로가 아닌 환자의 병력청취와 술기와 해당과 노티를 하며 1타 3피 멀티플레이어로 활활 타올라야 하는 처지이다. 이는 화자의 앞길이
위태롭고 막막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럼에도 화자는 그 길을 걸어가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다. 그 길이 유유히 갈 수 있는 길이 아니고
한걸음씩 가야하는 힘겨운 길인데도 말이다.

도대체 그는 어디를 향해 그토록 힘든 길을 가려고 하는 것일까? 그곳은 바로 "응급실
정문"이다. 응급실 정문은 동네 곳곳에서 위급한 환자들이 들어오는 곳이다. 하지만 그 곳에는 아침 8시이후 화자와 교대를 해줄 동료 인턴들이
들어오는 곳이기도 하다. 동료 인턴들이 저마다 활활 타오르면서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화자가 꾸는 또 하나의 꿈이다. 미래
지향적인 꿈이다. 근무 24시간 뒤 교대가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믿는 꿈인 것이다.

이것은 상실의식에 잠기어 탄식하기 보다는 그
것을 되찾고자 하는 화자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또한 화자가 기력의 상실을 노래하면서 "pk"의 존재를 찾는 것으로 보아, 기력의 상실은
pk의 상실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렇다면 pk는 인턴의 노동을 도와주는 고마운 존재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이 시는 인턴과
pk의 공동체의 삶을 더 많이 반영하고 있다. 또한 잃어버린 것을 꿈속에서만 찾으려는 낭만적이고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현실에서 찾으려는 의지가
드러나 있다. 비록 현재 화자의 처지가 의과대학 실습생이 없는 곳에서 근무하는 처지라고 해도 화자는 분명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우리의
현대시에서 저항시로 꼽히는 작품들은 많지 않은데, 이 시는 직접적인 저항의지가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이다. 화자는 절망적 상황속에서
체념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강력히 표출하고 있다. "나는 나아가리라, 한 걸음, 또 한걸음"이라고 말하는 화자의 단호한 의지는
24시간 근무-24시간 오프라는 고난을 극복하려는 미래 지향적 전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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