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휴일에 교보문고에 가곤 한다. 한주 동안 읽을 책도 사고, 하릴없이 서가를 거닐면서 새로 나온 책은 어떤 것이 있는지, 어떤 책들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는지, 사람들이 어떤 책을 찾는지 살펴보다보면 재미있기 때문이다. 최근 나온 신간들 제목이나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고, 사람들이 몰려 있는 코너에 가서 사람들이 어떤 책을 보는지 살펴보면, 사람들이 무엇에 관심을 갖는지를 엿볼 수 있다.

최근 몇 년간 꾸준히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라와 있는 책은 누가 뭐래도 재테크와 영어 관련 서적이 아닐까 싶다. 요즘 세상에서는 영어를 잘해야 취직도 하고 승진도 할 수 있다. 또, 요즘 세상에서는 월급을 모아봐야 집 한칸 마련하기 어렵기 때문에, 월급을 성실하게 꼬박모아 목돈 마련하기 보다는 재테크 방법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재테크와 영어를 다룬 책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디자인이나 책 제목도 다양해진다. ‘일주일 만에 원어민처럼 말하기’, ‘저절로 외워지는 영단어암기법’, ‘술술 기억되는 기적의 영어 학습’, ‘누구나 토익 900점 받을 수 있다’, ‘부동산으로 10억 벌기’, ‘재태크에 미쳐라’, ‘다섯 개의 통장’, ‘노후 30억 만들기’ 등.

이런 종류의 책 제목을 살펴보면, 제목들이 솔깃하고 자극적이기 이를 데 없다. 과연 일주일 만에 원어민처럼 말할 수 있게 되고, 외우지 않아도 저절로 영어단어가 머릿속에 들어오고, 부동산만 하면 누구나 10억을 벌수 있을까. 정말 그렇다면 영어공부 10년 해도 말문을 못 트는 우리 옆집 대학생은 무엇이고, 10억도 못 만든 옆집 아저씨들은 인생을 헛산 건인가. 그런 신묘한 비법을 전수받지 못한 바보들이란 말인가.

이러한 현상은 서점의 건강코너로 와 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암은 완치 된다’, ‘기적의 민간요법들’, ‘나는 이렇게 암을 고쳤다’, ‘고치는 암’, ‘음식으로 암을 다스린다’.

과연 그들의 말대로라면 왜 매년 암환자 6만여명이 죽어가고 있고, 왜 암은 아직도 불치의 병일까. 먹는 것만으로도 암이 낫고, 민간요법으로 암을 고칠 수 있다는데, 왜 많은 환자들은 암으로 죽어가고 있을까. 그리고 종양내과의사인 나는 바보스럽게도 왜 그 힘들다는 항암치료를 권하고 있을까. 버섯만 먹어도 암이 낫는다는데…

여기에 대해서 조금 더 냉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12년 현 시점에서 대한민국의 암환자를 유혹하는 건강보조식품은 수백 수천가지가 있다. 이들은 각종 현란한 광고를 내세우며, 암환자를 유혹하고 있다. 특히 말기 환자들이나 병원에서 좋지 않은 얘기를 들은 암 환자들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들이 파는 것은 건강보조식품이 아니다. 그들이 파는 것은 희망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건강보조식품 판매이나 내면의 본질은 희망 판매다. 우리 주변에는 이렇게 현상과 본질이 괴리돼 있는 것이 많이 있다. 비슷한 경우로 고3 입시학원에서 파는 것은 공부가 아닌, 학부모의 마음의 위안이다. 스타O스가 파는 것은 커피가 아니라 문화이고, 루이O통이 파는 것은 핸드백이 아니라 사회적 신분이다. 맥O널드가 파는 것은 햄버거가 아닌 부동산이고, 자동차회사가 파는 것은 자동차가 아니라 할부금융이다.

암환자를 상대하는 그들이 파는 것은 헛된 희망이고, 의사인 내가 전하는 것은 냉정한 현실이다. 그들이 파는 것은 완치가 될 수 있다는 꿈이고, 내가 전하는 것은 완치가 안 된다는 현실이다. 꿈은 꿀 때는 좋다. 하지만 늘 깨고 나면 현실이다. 나한테도 기적이라는 것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꿈은 늘 깨곤 한다.

기적은 일어난다. 복권에 당첨될 확률이 아무리 희박해도 매주 복권에 당첨되는 사람은 늘 나온다. 말기 임에도 불구하고 항암치료 없이 몇 년씩 생존하는 환자들도 분명히 있기는 하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계획을 짜는 사람은 없다. 복권에 당첨된다는 전제하에 아파트 구입계약서에 먼저 도장 찍는 사람은 없고, 홈런을 칠 것이라는 전제하에 작전을 짜는 야구감독은 없다.

호랑이 굴에 팔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얘기가 있다. 호랑이 굴에 팔려가고 위기의 순간이 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얘기다. 이 말은 위기의 순간에서는 위기를 직시하고 지극히 현실주의적인 시각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옛말에 혹세무민이라는 말이 있다. 혹세무민(惑世誣民),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말이다. 괴롭고 힘들어 하는 백성들의 심리를 잘 알면 혹세무민하기는 참 쉽다. 과거 사이비 종교들이 그랬고, 무당들도 늘 그래왔다.

헛된 희망? 죽음을 앞두고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다. 일단 한번 드셔보시라, 죽어가던 사람도 살려낸다는 기적의 명약입니다, 아니면 말고 하는 식의 혹세무민…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희망이라는 것은 냉철한 현실인식의 바탕 위에 만들어져야 한다. 공부는 하나도 안하고 반에서 30~40등 하면서 일류대학교에 가고 싶다는 꿈과 희망을 갖는다고 해보자. 일류대 진학이라는 꿈을 갖는다는 것은 꿈조차 없는 것 보다는 분명 좋은 일이다. 하지만, 반에서 30~40등 해서는 일류대에 가기 힘들다는 냉정한 현실인식과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공부 방법,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결코 일류대에 갈 수 없다. 영문법 1주일 만에 완정정복하기, 누구나 쉽게 내신 1등급 되는 공부법, 이런 책 대충 몇 권 읽고 용하다는 학원가서 몇 시간 앉아서 학원 선생님이 문제 푸는 것을 적당히 구경해봐야 일류대에 절대 못 간다. 그냥 저냥 하루하루 늘 하던 대로 공부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입시철이 돼서 그저 그런 학교에 갈까 말까 후회하며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곤 한다.

희망은 현실인식이 바탕이 돼야만, 오늘 보다 조금 나은 내일로서의 희망으로 존재할 수 있다. 밑도 끝도 없이 부동산으로 10억을 벌게 해준다든가 버섯만 먹어도 암이 완치된다든가 하는 감언이설에 혹해봐야 결국 다 내 손해일 뿐이다. 하지만 어쩌랴 마음이 동하는 것을. 모두 마음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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