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는 의사에게 적응합니다.
물어봐도 괜찮을 것 같은 사람에게 질문하고 하소연해도 괜찮을 것 같은 사람에게 하소연 합니다. 말이 안 통할 것 같으면 환자도 자기 마음의 문을 열지 않죠. 의사에게 상처받기 싫으니까. 의사소통이란 원래 그렇게 상대방의 입장을 파악하는 상태에서 형성되는 과정적 행위 아니겠어요?


병에 따라 의사-환자 관계는 다르게 나타납니다.
의사의 판단과 결정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상황이 있습니다. 모든 상황에서 진단과 치료과정에서 의사와 환자의 의사소통은 기본적으로 중요하지만 각종 사고로 인한 응급외상, 수술, 심장마비, 뇌혈관 장애로 막힌 혈관을 뚫어야 할 때, 내부 장기 출혈이 있을 때 등의 상황은 환자의 의견보다는 의사의 판단과 결정, 그리고 신속한 대처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의사에게 결정권이 더 많이 부여되죠. 의사는 설명하고 환자는 이를 수용하는 방식이 되기가 쉽습니다.

반면 종양내과에서 항암치료를 받는 환자들과는 다소 수평적인 의사소통 구조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환자가 자신의 몸 상태와 증상을 충분히 설명하고, 불편한 점을 호소하면 의사는 그걸 듣고 많은 것을 판단합니다. 지금 환자의 상태가 괜찮은 건지, 검사를 해야 하는 건지, 경과관찰 해도 되는 건지, 신속하게 약제를 변경해야 하는 건지 등에 대해 의사가 적절한 판단을 하는 것이 비용을 절감하고 효과를 높이는 치료를 하게 도와줍니다.

그래서 저는 가능한 환자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려고 애씁니다. 객관적인 CT 검사도 중요하지만, 주관적인 환자의 이야기에서 많은 실마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게 암환자 진료의 기본인 것 같습니다. 때론 환자가 너무 과도하게 설명을 요구하거나, 왜 그런지를 집요하게 물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걸 다 설명하려면 의학적 체계와 기본지식이 아주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설명을 해도 환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적인 분야를 건드리게 될 때도 있습니다. 저는 가능하면 환자의 질문에 대해 설명 드리려고 노력을 하는 편이지만, 환자도 '그냥' 의사의 설명과 판단을 믿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의사의 설명을 들어도 다 이해하기 어려운 게 의학, 의료의 실체입니다.

미국의사는 환자 한명 볼 때 30분 이상 쓴다더라, 환자 가족 상황도 다 알고, 안부도 물어준다더라, 환자가 물어보면 친절하고도 이해하기 쉽게 상세히 설명 한다더라, 그런 이야기를 많은 들으셨겠지만, 미국의 의료보험 제도는 전체 국가 GDP의 20% 가까이를 의료비용으로 지불하는 나라의 이야기고, 개인적으로도 보험료를 많이 내는 나라의 상황입니다. 그래서 미국으로 여행 갔다가 맹장수술하면 3,000만원이 들고 의사가 대장내시경을 해서 폴립을 제거하면 폴립 하나당 수가를 매겨서 역시 2,000만~3,000만원 가까이 돈을 내야 하기 때문에 전문간호사가 하는 직장경이 선호되기도 합니다. 의사와의 면담 한 번, 시술행위 한 번이 다 엄청난 돈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의료보험료도 낮고 의료행위의 수가도 너무 싸기 때문에 박리다매를 하지 않으면 병원운영이 불가능합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환자를 봐야 하는 것은 개인의원이나 대학병원이나 다 마찬가지. 슬픈 현실입니다. 그런 환경에서 의사의 진료 행위 패턴이나 의사-환자의 의사소통 구조도 왜곡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모든 현실적인 어려움을 감안하여 저는 가능하면 환자들과의 소통할 수 있는 진료실 밖 구조를 찾으려고 블로그를 운영합니다. 제가 아마 우리병원 블로그 1등 일거에요. 글 올리는 것만 보면요. 제가 유명한 명의가 아니라 언론에 나갈 일이 없어서 언론 홍보성 기사나 그런 거는 없습니다. 그냥 순수하게 환자와의 의사소통을 위해, 암환자를 진료하는 의사의 입장 등을 블로그에 적어봅니다.

제가  블로그를 운영하고 진료하며 받는 느낌은 저희 환자들이 제 블로그에  꽤 많은 분이 방문해 주고 계시다는 거, 그리고 의사로서 제 형편을 이해해 주시는 것 같다는 사실입니다.
저의 진료 방식과 결정을 많이 이해해주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진료시간이 지연되어도 설명이 필요한 급한 환자가 있었으니 어쩔 수 없겠거니 이해해 주시는 것을 느낍니다.

어느 집단이나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어서 저 때문에 속상하고 서운해 하시고 원망하는 분도 계십니다. 제가 더 잘 해야겠지요. 뭔가 측정할 수 없고 보이지 않지만 환자와 무형의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올 가을 암환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중심으로 한 학회와 세미나들이 열릴 예정인데 저도 좀 더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기회를 삼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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