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불확실성의 연속이다. 인생은 정해진 순서대로 예측가능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이 정해져있고, 예측가능한 대로만 된다면, 인생 살기가 얼마나 쉽겠는가. 1년 뒤에는 주식이 떨어질 것이고, 2년 뒤에는 부동산가격이 오를 것임을 미리 예측할 수 있다면 얼마나 살기가 편할까. 하지만, 인생이라는 것은 본디 예측이 어려운 과정들의 연속이며, 인간의 힘으로 되는 부분이 있고,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예상치 못한 행운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갑자기 천재지변이 일어나기도 하고, 예측치 못했던 교통사고가 나기도 한다. 우연한 실수로 전 재산을 날리기도 하고, 건강을 잃기도 한다.
 
인생이란 본디 불확실한 일들의 연속이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은 필연적으로 불안감을 만들어 내고, 이 불안감은 때로는 현재를 괴롭힌다. 인간은 늘 불안감을 갖고 살아왔고, 이러한 뿌리 깊은 불안감으로 인해 인간은 불확실성 속에서 확실성을 찾고자 애써왔다. 매년 새해가 되면 토정비결을 본다고 점집을 찾게 만드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불확실성 속에서 확실성을 찾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은 과거에서 패턴을 찾아내는 일이다. 과거 농경시대에는 홍수나 가뭄이 들면 1년 농사를 망치기에, 계절과 분기를 나누고 각 분기에는 어떤 자연 현상이 일어나는지를 열심히 관찰했다. 그 결과 달력이라는 것을 만들어 냈고, 언제부터 언제까지는 비가 많이 오는 시기이고, 언제가 가장 파종하기 좋은 시기이고, 언제부터는 날씨가 추워져 냉해를 입게 되니 그 전에 수확을 해야 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됐다. 과거를 통해 다가올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것이다.
 
이렇게 과거에서 패턴을 찾아내는 일은 상당히 유용한 일이어서, 환자를 볼 때에도 주로는 과거의 치료 경험들을 분석해 어떤 규칙성을 만들어 내게 되고 이를 통계화 해, 어떤 치료 받침을 정할 때 이용하기도 한다. 이러 이러한 경우에는 예후가 나쁘니 빨리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 이러 이러한 경우에는 A치료 보다 B치료가 더 좋았었으니 B치료를 해야겠다. 
 
사람들은 이렇게 늘 불확실성 속에서도 확실성을 찾아내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정확한 것만은 아니다.

“선생님 저희 아버지가 폐암 4기라고 하셨는데, 그럼 얼마나 더 사실 수 있을까요?
“저도 잘 몰라요.”
“선생님, 그러지 말고 이야기 좀 해주세요. 왜 몇 개월이니 하는 그런 거 있잖아요. 선생님은 이런 비슷한 환자분들 많이 보셨으니 대충은 아시잖아요.”

외래에서는 환자분이나 보호자분들로부터 얼마나 더 사실 지를 맞춰달라는 요구를 많이 받는다. 내가 무슨 용한 점쟁이도 아닌데 죽을 날을 맞춰보라는 것이다. 심지어 내 환자 중에서는 점을 보는 역술인 환자가 2명이 있는데, 그들도 자기는 얼마나 더 살 수 있겠냐고 낫기는 하겠냐고 나에게 물어봤다.
 


“예후라는 것은 환자분들마다 다 달라요. 항암치료 하면서 얼마나 잘 반응하는지에 따라서 많이 달라지니 우선 치료를 하면서 경과를 봅시다.”
“그럼 치료를 하면 얼마나 많은 경우에서 호전이 있나요?”
“열 명 중 네 명 정도는 항암치료를 하면 반응이 좋은 것을 돼 있는데, 항암치료 해 놓고 반응을 있기를 지켜봅시다.”
“그러면 선생님 저희 아버지는 이번 항암치료로 반응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시작해 보기 전에는 미리 알기가 어렵습니다. 우선 항암치료를 하면서 반응이 있는지를 살펴봅시다.”
“반응이 있을 것 같다는 말씀이신가요?”
외래를 보다보면 이런 식으로 끝까지 말꼬리를 잡고 집요하게 물어보는 보호자분들이 계시다. 이런 보호자분을 접하게 되면 나도 참 답답하다. 미래의 일을 다 알면 내가 돗자리 깔고 앉아있지 왜 진료실에 있겠는가. 

“한 1년은 사실까요? 인터넷에 올라온 다른 환자들 이야기를 보니 1년 정도 사신다고 하던데요.”
“1년보다 길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습니다.”
“1년이면 1년이고, 6개월이면 6개월이지, 1년보다 길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다니요?”
과거의 통계 숫자 중 평균 생존기간이라는 개념이 있다 (편의상 평균 mean으로 쓰지만, 엄밀히는 중앙값 median의 개념이다). 이런 평균생존기간에 대한 숫자를 언급할 때에는 항상 신경이 쓰인다. 어디까지나 평균치이기 때문에 그 수치보다 더 길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정확히 평균만큼 살다가 딱 돌아가시는 분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평균적으로는 1년 정도 생존한다는 이야기를 하면, 환자분이나 보호자분들은 평균(중앙값)이라는 의미는 잊은 채 ‘1년 살다 죽는다’로 받아들인다. 전후 맥락을 다 잊어버리고 1년이라는 숫자만 받아들인다. 그리고 1년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생각해버린다. 의사가 1년밖에 못산다고 했다며…
 
확률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다.
3:3로 동점이 된 9회 말 마지막 공격. 2아웃 주자 3루에서 대타를 내보내려 하는데 타율이 0,210인 타자가 있고 0,290인 타자가 있다. 당신이 감독이라면 누구를 내보낼 것인가. 당연히 2할9푼을 치는 대타를 내보야 한다. 하지만 이 대타 작전이 성공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2할9푼이라는 것도 과거의 패턴일 뿐 현재의 타석에서 2할 9푼인 타자가 안타를 치고 2할 1푼인 타자는 안타를 못 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불확실성 속에서 조금이라도 확실성이 높아 보이는 선택을 했을 뿐이다.

의사도 마찬가지이다. 의사도 과거의 패턴과 경험, 의학적 근거(evidence)에 기반을 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과거의 평균을 참고자료로 활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곧 좋은 치료성적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2할9푼인 타자가 더 좋다고 해서 대타 작전을 했는데 왜 안타를 못 쳤냐고 항의해봐야 소용이 없다. 안타를 치면 100%이고 못 치면 0%이지, 그 대타가 2할9푼을 친다는 것은 관점을 달리하면 거짓이다.

옛날 히포크라테스 시절, 히포크라테스가 명의였던 것은 치료를 잘 해서가 아니라 언제 죽을지를 잘 맞추어서였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당시에는 의사가 별로 해줄 것이 없었다. 치료라는 것이 별다른 것이 없으니 질병의 자연경과 (natural course)만 잘 알면, 죽을병인지 살 병인지, 환자가 언제 죽을지 맞추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치료를 통해 가역적으로 환자분들의 몸 상태를 좋게 만들 방법이 많아 지다보니 예후를 맞추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예전 같았으면 벌써 이 세상 사람 아니었을 분들이 살아계신 경우를 주변에서도 흔히들 보지 않는가.

기술의 발전은 더 예측이 어렵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불확실성 속에서 그나마 알고 있는 확실성을 높이는 선택을 하는 일이고, 진인사 대천명의 마음으로 좋은 결과로 이어지기를 기다리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과가 과정을 대신해준다는 강박증에서 벗어나야 하고, 무엇보다도 인생이란 본디 불확실한 일들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래야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의 불안으로 인해 오늘의 행복을 놓치는 우를 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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