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진료실에 들어서자마자 큰 종이가방에서 약봉지 꾸러미를 내 놓는다.
언제 무슨 약을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말씀하시는데 목소리에서 불평과 짜증이 잔뜩 묻어있다. 멀리 경상도 끝에서 태풍을 뚫고 외래에 오셨는데 눈물바람이 더 매섭다.
 
“지금 뭐가 제일 힘드세요?”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어. 걸을 때 꼬꾸라지려고 해.”
 
전이성 유방암에 대해 아드리아마이신 6번 쓰고 심장기능이 저하되어 심장내과 약을 종류별로 쓰고 계신다. 간으로 전이된 병이 조금씩 나빠지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일단 치료를 보류하고 있다.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아 유방암 치료는 생각도 못하고 있다.

원래 당뇨, 고혈압이 있으시다. 당뇨나 혈압은 그때그때 환자 상태에 따라 약이 조절, 변경되기 때문에 약 처방이 조금씩 변한다. 연세가 많으셔서 그런지 한 번씩 크게 아플 때마다 컨디션이 팍팍 떨어진다. 그래서 부신피질기능이 떨어져서 스테로이드를 보충해야 한다. 다리 힘이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스테로이드를 드신다. 스테로이드를 줄이면 기운이 떨어지는 걸 본인이 느끼는지, 짜증도 늘고 불평도 많아진다.

스테로이드를 먹으니 골다공증이 더 악화될 것 같다. 골다공증 있으니 칼슘 비타민 D도 드신다. 칼슘을 먹으니 소화가 잘 안 돼 소화제도 드신다. 스테로이드를 드신 이후로 밤에 수면 장애도 생겼다. 그래서 수면제도 드신다. 긴 병에 몸 컨디션이 안 좋으니 우울증도 왔다. 그래서 우울증 약도 드신다. 혈전 때문에 쿠마딘도 드신다.

뼈 전이 때문에 쓴 비스포스포네이트 때문에 잇몸뼈가 녹아버렸다. 그래서 밥을 못 드시고 지난 1년간 죽만 드시고 사신다. 영양가 있는 음식을 제대로 못 드시니 지난 1년간 10kg이 훨씬 넘게 몸무게가 빠져버렸다. 그만큼 몸무게가 감소하면 기운이 없는 것도 당연하다.
 
사연이 이렇게 길다보니 여러 약들이 과를 바꿔서 입원할 때마다 조금씩 변경되고 소화제를 비롯하여 비슷한 약들이 중첩돼 처방되고 먹기 힘들게 왕으로 큰 엄지손가락만한 종합비타민제도 끼어 있다. 어느 성의 있는 전공의가 할머니를 위해 처방했나 보다.
 
“너무 약이 많다.”

약봉투를 나에게 내밀며 약을 어떻게 먹어야 하냐고 이렇게 많은 약을 다 먹어야 하냐며
눈물 바람이다. 약 다 안 먹고 죽어버리겠다고 하신다. 나를 만나자 마자 이렇게 신세한탄을 하시면 나도 사실 마음속으로 짜증이 나려고 한다. 솔직히. 그렇지만 할머니는 이상하게 약제 부작용이 금방 나타나고 치료 효과보다는 약 부작용으로 고생을 많이 하신분이다.
 
치료를 위해서 당연히 처방했어야 하는 약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환자는 다른 환자들에게는 흔히 나타나지 않는 부작용으로 너무 고생을 많이 했다. 그래서 짜증을 내고 싶어도 의사로서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꾹 참고 할머니에게 말씀드린다.
 
“할머니, 제가 약을 아침, 점심, 저녁 용으로 분류해 드릴게요. 제가 분류한 대로만 드셔요. 제가 봐서 당장 필요할 것 같지 않은 약들은 좀 뺄게요. 약 종류가 너무 많으니까 드시기 힘들 것 같아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각 과별로 처방된 약을 확인, 분류하고 끼니별로 나눈다.
나도 모르는 약이 많아서 약 모양, 색깔을 맞추느라 EMR 약 정보와 사진을 확인하며 분류해야 한다. 5분이 아쉬운 외래에서 15분 넘게 약을 분류한다. 세 봉지로 나눠 분류해 드렸다. 연세도 많으시고 기운도 없으신데 멀리서 버스타고 와서 이 정도는 챙겨 가셔야 본전은 하실 것 같아서. 꽉 죽어버리고 싶은데 죽지도 않는다며 눈물바람이시다.
 
약봉지와 함께 초콜릿도 덤으로 싸드렸다.

“할머니, 기운내세요.”
 
사는 동안 잘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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