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평소 존경하던 선생님의 장인어른이 돌아가셨다는 문자를 받았다. 장인어른의 상까지 내가 문상을 가야하나?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할 여지없이, 문자를 받자마자 장례식장을 찾았다. 이제 막 영정사진이 자리를 잡은 장례식. 나는 그 초입에 인사를 하러 간 사람이 되었다. 선생님은 내과 선생님이시지만 지금은 파트도 다르고 환자 관련해서 뵐 일도 거의 없는 위치에 계신다. 병원 보직을 맡으셔서 바쁘시기도 하지만 나 같은 피라미는 선생님 그림자도 접할 일이 없다. 그런데도 장례식장을 찾은 이유는 내가 마음으로 진정 존경하는 선생님이기 때문이다.
 
우리 선생님은 모든 내과 레지던트들의 결혼식에 직접 가신다. 결혼식 전에 청첩장을 가지고 찾아가서 미리 인사를 하지 않아도 선생님은 직접 결혼식장을 찾으신다. 다 내 후배니까 가야한다고 생각하신다고 했다. 후배가 인사를 하건 하지 않건 간에, 나는 선생이니까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신다고 했다. 심지어 청첩장을 가지고 오지 않으면 서운해 하신다.
 
어느 내과 레지던트의 결혼식. 6월말 막 더워지기 시작한 초여름, 입고 간 옷이 땀으로 후줄근하게 구겨지던 여름날 결혼식. 결혼식장은 비좁고 하객은 너무 많아 지하철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밀리는 사람들 와중에서 멀리서 결혼식을 지켜봐주시던 선생님을 보았다. 선생님 양복이 땀으로 젖고 많이 구겨져 있었다. 항상 깨끗한 가운으로 정갈한 카리스마 선생님이 하객들 틈에 섞여 후줄근하게 보이니 기분이 좀 그랬다.

선생님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티 안 나게 내과 후배들을 챙겨주시는 분이었다. 선생님은 겉으로는 나에게 친절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으셨다. 오히려 너무 무서우셨다. 나는 2년차 때 그 선생님 파트를 돌았는데, 어찌나 선생님이 무서운지 두 달 내내 아침마다 회진 전에 설사를 할 정도였다. 내가 아침에 회진 돌면서 환자 관련 노티를 하면, '그런데 왜 이 검사는 안했죠? 엑스레이는 본건가요? 그 약을 쓴 근거가 뭐죠?' 정말 혼 많이 났다.

그러나 난 그렇게 무서운 호랑이 선생님께 많은 걸 배웠다. 정말 매일 매일 울고 싶었지만 꾹 참고 회진을 돌았다. 그렇게 두 달을 일하고 다음 달 지방병원으로 파견을 나갔는데, 그 지역에서 맛있다는 한우 고기를 한 상자 사서 선물로 보내드렸다. 마음으로, 진심으로 선생님께 감사해서. 그렇게 선생님 파트를 돌고 나니 선생님 뵐 일도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갔다.



 
그러던 얼마 전, 선생님이 나에게 메일을 보내셨다.
 
내가 본과 3학년 때 선생님 파트 학생으로 실습을 돌았는데, 2주간의 실습을 마치고 내가 선생님께 메일을 보냈었던 모양이다. 기억이 난다. 그때도 역시 너무 많이 혼나고 2주간 정말 괴로웠던 것이 생생하다. 그렇게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나서 반성문처럼, 그리고 선생님에게 부족한 나에 대해 뭔가를 항변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것 같은 애매한 성격의 메일이었다.

선생님은 그 메일에 대해 내가 쓴 메일의 세배 정도에 해당하는 답신을 보내주셨다. 나에게는 남아 있지 않은 그 메일들. 선생님은 내가 보낸 메일과 당신이 쓴 메일을 다 같이 파일로 보관하고 계셨고, 나에게 그 파일을 보내주시면서, 그때의 마음을 되새겨 보라고 말씀하시고 싶었던 모양이다.

겉으로는 잘 지내냐고. 우연히 메일을 발견했는데 반가운 마음에 보내본다고 하셨지만, 선생님은 또 다른 메시지를 나에게 전하고 있었다. 정말 우리 선생님은 나의 영원한 선생님이 시구나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선생님이 힘든 일을 당하셨으니 그분이 장인어른이든 누구든 나는 제자로서 당연히 가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은 예의 그 단정한 가운 차림이셨다. 옷을 갈아입으실 시간도 없이 영안실로 내려오셨나 보다. 선생님을 가까이서 뵌 지도 너무 오래되었고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도 몰랐다. 그냥 인사만 드리고 나왔다. 난 제자니까 그렇게 하는 게 맞다. 나는 세브란스에서 의사가 되었고 그리고 지금의 의사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존경하는 선생님들로부터 배운 그 무엇들 때문이다. 그런 선생님들이 계시기에 나는 연세대학교를, 세브란스를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가 우리 병원을 나간다 하더라도 내 마음에 영원한 선생님으로 남아계실 것이다.

선생님,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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