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스마트기기의 발달로, 요즘에는 언제 어디서나 본인이 원할 때 각종 현장의 상황을 녹음하거나 동영상 촬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00녀, xx남 동영상들은 스마트폰이 널리 보급되면서부터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고, 나 역시 필요한 상황마다 스마트 기기를 사용한다.

간담췌 외과 파트 인턴이 해야 하는 중요한 일 중 하나가 "복강경하 담낭절제술" 동의서를 받는 일이다. 이 수술 자체가 그리 복잡한 수술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의과대학생이라면 실습 중 여러 번 참관하는데다가, 담낭절제술의 적응증 또한 중요한 시험 기출문제이기 때문에 사실 인턴이 동의서를 받아도 큰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교수님이 수술하는 요일이 정해져 있고, 환자들은 대개 그 전날 입원하기 때문에 하루에 5~6개 이상의 동의서를 받아야 하는 일도 허다하다. 비록 간단한 수술이지만 수술을 받는 환자들은 궁금한 것이 많다. 그래서 내가 아는 한도에서는 잘 대답해주려고 노력했고, 어설픈 주치의로서 이런 일련의 일들이 환자와의 관계를 잘 만들어 가는데 큰 도움이 다고 생각했다. 큰 수술이 아닌 경우 외래를 거쳐 입원한 환자들이 담당 의사와 2~30분 넘게 이야기 하는 일은 사실 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환자와 보호자에게 동의서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건성으로 듣던 환자가 자꾸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다. 뒤집었다가 다시 뒤집기를 반복한다. 조금은 신경이 쓰여 스마트폰을 힐끗 보니 어렴풋이 "녹음기 어플"이 액정에 비춰졌다. 순간 오싹했다. 여태까지 내 설명을 녹음했던 것이다. 로컬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그 일이 설마 나한테 일어나다니.


"수술 받고 합병증으로 복막염이 오면 패혈증으로 가서 사망할 수 있고......"
"수술이 잘 되도 나중에 담즙이 누출되고 담도가 협착되면 그것때문에 간 기능이 크게 떨어지고 다시 수술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망할 수 있고......"

환자가 수술 설명에 대한 것을 녹음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 일 것이다. 첫번째는 정말로 궁금하고 알고 싶고, 가족들과 공유하기 위해서 녹음하는 경우다. 내가 아무리 쉽게 설명해도 비전문가인 환자와 보호자에게 있어서 다소 어려운 내용일 수도 있을테니 환자의 알 권리 측면에서 봐도 충분하게 이해가 가는 일이다.

두 번째는 행여나 문제가 생겼을 때 걸고 넘어가기 위한 용도다. 어떤 부작용이 생기면 "이전에 수술 설명할 때는 나 한테 알려주지 않았다." 라는 식으로 문제 제기를 위한 것이다. 요즘 같이 의료사고에 대한 소송이 증가하는 시기에 있어서 어찌보면 상당히 중요한 열쇠일지도 모른다.

그 환자가 녹음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 였을까. 설명을 시작할 때부터 건성으로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열심히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린 모습을 보아하니 왠지 후자같다는 생각을 했고 그 이후부터 기분이 왠지 이상해졌다.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의사랍시고 수술설명을 하고 있으니 믿지 못하나? 우스워 보인걸까?"
"녹음을 하려면 티 안나게 하던가......"
"문제 생기면 도대체 뭔 행패를 부릴려고......"

아직 이런일을 겪어보지 못했던 나는 그때부터 상당히 방어적으로 동의서를 받기 시작했다.

"수술 받고 합병증으로 복막염이 오면 패혈증으로 가서 사망할 수 있고......"
"수술이 잘 되도 나중에 담즙이 누출되고 담도가 협착되면 그것때문에 간 기능이 크게 떨어지고 다시 수술해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망할 수 있고......"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쓸데없이 과도하게 겁을 주면서 동의서를 받았다. 설명만 들으면 수술받고 싶은 마음이 사라질 정도로 말이다. 우리나라 법에서, "도청"은 불법이지만, "대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방에게 알리지 않은 녹음은 불법이 아니다. 나 또한 환자가 더 알고 싶어서, 혹은 가족에게 잘 설명해주고 싶어서 수술설명을 녹음해 가는 것을 반대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학생 때 강의내용을 녹음해서 들었던 것과 같은 것일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이런 경우 자초지종을 설명해주고 동의하에 녹음해 갔다면 나 또한 기분상하는 일이 없지 않았을까? 어쩌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줬을지도 모른다. 꼭 그렇게 몰래 눈치보며 슬그머니 녹음을 해갔어야 할까? 새파랗게 어려보여 의자에 허리 깊숙히 파묻고 기대서 한쪽 다리 떨면서 건성으로 설명들을 만큼 만만해 보였던 의사한테 왜 그런 것은 당당하지 못했을까? 아니..그냥 내가 예민하게 반응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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