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진료실에서 수많은 환자들을 만나 그들의 아픈 이유를 들어주고 원인을 알기 위해 검사를 하고 아픔을 덜어주기 위한 처방을 내려줍니다.  일하다 다쳐 옆구리를 부여잡고 온 환자들로부터 시작해서 등부위에 커다랗게 부어오른 종기, 그리고 말기 암 환자까지..  제가 만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파하는 사람들입니다.  막연한 의미로 '아픈사람'이 아니라, 몸의 다양한 부위로부터 전해지는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외래에서부터 병동의 환자들까지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야 하는 사람은 바로 의사입니다. 

진통제의 역사는 얼마나 되는 것일까요?  추측컨대, 항생제나 다른 약물보다도 훨씬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고대 문명의 유골에서 보였던 두개골의 구멍은 알고보니 두통을 이겨내려는 외과적 행위의 결과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버드나무 껍질 달인 물이 해열진통효과가 있었다는 민간요법에서부터 외과수술의 통증을 견디게 하기 위해 만취가 되도록 술을 먹였다는 기록까지, 인간의 역사를 통증과의 싸움이라는 의미에서 바라보자면 무척 처절한 시간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고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수많은 진통제와 마취제가 존재함으로 얼마나 다행스런 시대인가라는 생각도 무리는 아닌듯 합니다.

현재의 의학도 통증과의 싸움이라 표현하는 게 무리는 아닙니다.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저를 포함한 많은 의사들이 통증의 원인을 찾아 제거하는 동시에 오늘도 수많은 진통제를 처방을 하고, 수술의 아픔을 모르게 하기 위해 수많은 마취약과 마취법들을 활용하며, 때로는 중독성때문에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마약을 통증조절이라는 의학적 목적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통증이 사라지면 의사와 환자는 다행감을 느끼지만, 그렇지 않다면 의사는 걱정이 많아지고 환자는 괴로움과 원망을 표하게 됩니다.  그것은 몸의 통증이 마음의 통증으로 이어짐을 뜻하기도 합니다.  의사의 스트레스는 이 지점에서 극대화되기 시작합니다.

통증이란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의 자기방어를 위한 신체적 의사표현수단입니다.  ‘아프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어떤 형태로든 위협받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자신의 존재감을 표현하는 본능적인 수단인 셈이죠.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속담의 내용도 보면 하찮은 미물도 자신의 존재감을 내세우는 데에 있어 반응수단으로 본능적 통증을 사용함을 알 수 있습니다.  통증은 의학적으로 신체의 이상을 표현하는 본능적 표현인 동시에 개체의 존재를 표현하는 능동적 수단이기도 합니다. 

통증을 느끼지 않는 생명체가 존재할까요?  가을의 단풍이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는 나무의 추워지는 계절변화에 대한 통증의 표현이라고 하듯이, 아마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은 제 나름의 방식대로 통증을 느끼고 표현할 것입니다.  우리가 속담에 나오는 지렁이같은 미물에게서도 존재감을 느끼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때문일 것입니다.  자연계의 약육강식의 체계 안에서 포식자에게 먹히는 피포식자의 통증도, 우주의 엉겁의 시간의 흐름속에 아주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하찮은 미물들인 인간을 비롯한 수많은 생명체가 통증을 느끼는 이유도 존재감이라는 존재의 존중을 받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통증은 조물주가 모든 생명에게 존중받고 있음을 증명케 해주는 아주 중요하고 귀한 선물인 것입니다.

존재의 통증을 확장하여 생각해 봅니다.  인간이 만든 사회시스템 속에서 구성원 개인의 고통은 사회 안에서 개인의 존재감을 표현하는 일이며 존중받아야 함을 의미하는 일일 것입니다.  구성원이 느끼는 고통에 대해 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시스템이 작동하는 일은 당연하며, 그것은 사회가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긍정적인 방향과 방식으로 움직임을 의미하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회시스템 안에서 존재하고 있는가 라는 고민을 해 봐야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행복감까지는 아니더라도 다행감이나 일말의 보호받고 있음을 느끼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불안감 속에서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불안감을 느끼게 하는 사회시스템은 내부의 통증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점에서 분명 잘못된 사회시스템일 것입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우리 개개인은 어떠한가요.  그 안에서 고통을 당하는 입장인가요, 아니면 고만고만하거나 만족스럽게 살아가는 입장인가요?  공동체적 구성원이라는 입장에서 우리가 속한 공간 안에서 통증을 느끼거나 고통당하는 사람을 보고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나의 통증과 타인의 고통에 대해 사회가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움직이도록 요구하고 움직이고 있습니까?  몸 어느 부위의 통증에 대해 신체의 다른 기관과 조직들이 생리학적으로 또는 면역학적으로 체계를 이루어 반응하듯이, 우리는 그런 사회 시스템을 구성하며 움직이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사회는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고민들이 점점 더 필요해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점점 관심과 예민함을 잃어버리는 듯 합니다.  감각이 사라진 신체부위는 퇴축하거나 다쳐도 인지하지 못해 썩어버리기 마련입니다.  통증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만고만한 만족감으로 시야와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세상, 루쉰의 비유속에 나오는 거대한 철근상자 속에 몽롱하게 자신의 숨에 취해 서서히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즐거워하거나, 배부른 돼지가 자기만족감에 주변을 둘러보지도 않고 홀로 드러누워버리듯, 혹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그런 사회가 아닌지요.  사회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퇴축되어버리기 전에, 썩어 떨어져버리는 살덩이에 내가 포함되기 전에 반드시 시작해야 할 고민인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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