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산부인과 레지던트를 할 때만 해도 산부인과는 의대생들이나 인턴들에게 "나름" 인기가 있었습니다. 제가 지원할 때, 9명 정원의 산부인과 전공의 선발에 15명이 지원을 했었으니까요. 저랑 같이 레지던트 생활을 같이 한 선후배들 중에는 수석은 아니더라도 차석 졸업생들도 꽤 있었지요. 물론 이렇게 뛰어나신 분들은 다 여의사분들이었죠. (뭐, 다 아시겠지만 의대에서 성적 상위권은 대부분 여학생들이 차지합니다.) 저만 해도 그렇게 우등생은 아니었지만 폼나는 정형외과를 할까, 재미있는 산부인과를 할까 고민하다 최종적으로 산부인과를 택했더랍니다. 하지만, 이제는 산부인과를 선택하는 의대 최우등 졸업생도, 저처럼 정형외과를 포기하고 산부인과를 선택하는 의사선생님들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 것 같네요.  

 2004년에 그야말로 갑자기, 산부인과 전공의 지원 미달사태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 다른 병원의 경우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느끼기에는 이 사태가 정말 갑작스러운 것이었는데요, 왜냐하면 2003년까지는 우수한 선생님들이 산부인과에 들어오기 위해 경쟁을 하는 형국이었는데, 2004년부터는 지원 자체를 안하는겁니다. 다행히, 가까스로 여기저기서 인턴 선생님들을 "모셔와" 정원을 채우긴 채웠습니다만, 이런 산부인과 기피 추세는 해가 갈수록 더욱 심해졌습니다.  산부인과 학회에 따르면 산부인과 전공의 지원율은 2004년에 93.3%, 2005년에 86.1%, 2006년에 50.9%, 2007년에 49.5%, 그리고 올해도 역시 49.5%로 "5년 연속 미달"이라는 한국 산부인과 역사 상 전대미문의 불명예 행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나마 산부인과 레지던트를 시작한 선생님들마저 중도에 포기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2005년 15%, 2006년 22.5%) 가까운 미래에 산부인과 의사 부족 문제는 심각한 사회 문제로 확대될 징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서울의 대형 대학 병원에서는 정원을 간신히 채우고 있지만, 지방에서는 아예 산부인과 레지던트를 구하지 못하는 병원들이 속출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궁핍한 상황에서도 부익부,빈익빈의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죠.  
 이렇게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첫 째, 지원자 수가 적으면 그만큼 업무 부담이 늘어나 수련 기간이 힘들어지기 때문이지요. 사실, 저도 레지던트 시절에 동기생 두 명이 도망을 가서 그 시절에 늘어난 업무 부담과 험악한 병원 분위기 때문에 상당히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지원율이 올해처럼 50%가 미처 안되는 상황에서는 산술적으로 업무 부담이 두 배가 늘어난다는 것이지요. 잠을 잘 시간이 없어진다는 얘깁니다. 게다가 중도 포기하는 동료가 있으면 설상가상으로 줄줄이 포기하는 사태가 발생하기 합니다.  물론 병원마다 대처 방안은 있겠지만, 이런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만한 용기를 가지기는 쉽지 않을겁니다. 둘 째, 한 번 "비인기과"로 낙인이 찍히면 학업 성적이 우수한 의대생들에게는 철저히 외면당합니다. 비록 학교 다닐 때, 산부인과라는 과목에 흥미를 느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정작 전공을 정할 때에는 비인기과에 대해선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예외도 있을 수 있지만, 이런 현상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지금의 상황이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인 두 가지 문제점인 낮게 책정되어 있는 건강보험수가와 높은 의료사고 위험성에 대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으면 지금의 산부인과 의사 감소추세를 역전시킬 수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정부의 대책은 역주행입니다. 정부는 출산율 저하에 대한 대책으로 "임산부 토탈 케어 정책"과 같이 산전 진찰과 출산에 드는 국민 부담을 현격히 줄이는 정책을 펴고 있지요. 이는 곧 산부인과 의사들의 수입감소로 이어지고,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분만을 포기하는 병원이 속출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악화시킬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임신과 출산에 따른 비용이 줄어든다고 출산율이 증가할까요? 현재의 출산율 저하 현상의 명명백백한 원인은 엄청난 양육 비용에 대한 부담 및 경제활동을 하는 여성의 증가 때문인데 말이죠. 이런 정부의 정책이 계속되면 산부인과가 그리 의롭지만은 않은 대한민국의 의대생과 인턴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게 될까봐 걱정입니다.
 좀 더 욕심을 낸다면, 출산관련 의료분쟁에 대해서 정부의 지원책이 마련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일반분들은 이해하기 힘드실 수도 있지만,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응급 상황들은 불가항력적입니다. 확률적으로 분만을 많이 하는 산과전문병원에서는 일 년에 몇 차례 의료분쟁에 휩싸일 수 밖에 없습니다. 미국에서는 의료분쟁이 워낙 잦아서 의사들이 이에 대비한 보험을 들고 있는데요, 거기서도 산과 의료분쟁이 워낙 많다보니까 치솟는 보험비를 의사들이 감당하지 못해 산부인과의사들이 분만 자체를 기피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이 문제에 대한 모든 부담을 산부인과 의사 개인이 져야하는 것은 대한민국 산부인과 의사의 운명이기도 하지만 정말로 감당하기 힘들만큼 가혹한 것이지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지금과 같이 산부인과 지원 기피 현상이 장기적으로 이어지면 산부인과 의사 부족 사태로 국민 모자보건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피할 수가 없을거라는 겁니다. 쉬운 예로, 출산을 위해선 대도시로 원정을 가야만 하는 "떠돌이 출산"시대를 원치 않게 맞이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국가적으로  적정 산부인과 의사 수를 유지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며, 그러기 위해선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정부, 의사, 그리고 국민들이 지금의 상황을 잘 이해하고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철주야 수술실과 분만실에서 고생하고 계시는 전국의 산부인과 전공의 선생님들, 힘내십시오. 그리고 아무리 잠이 모자라서 힘이 들더라도 환자분들과 산모분들께 항상 친절하고 다정한 의사 선생님의 모습을 보여주시구요. 화이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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