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언니. 언니는 이미 impact factor가 중요한 사람이 아니야.
언니는 늘 글을 쓰고 많은 사람들이 언니의 글을 읽고 있어.
그게 언니의 능력이야.
대단해.

출신 대학, 출신 수련병원에서 계속 일하는 것에는 여러 장단점이 있지만
내가 그중 장점으로 꼽는 것은 동기다. (그러면 안되지만)

절차를 뛰어넘어 일을 진행할 필요가 있을 때가 있다.
특히 환자가 관련되면 정식 순서를 기다리기 어려운 상황이 가끔 있다.

전화를 건다.

누구야, 미안하다.
이렇게 하면 안되는줄 아는데, 근데 이번 한번만 해주라.
상황이 좀 안 좋아. 급하다. 환자한테 이런 사정이 있어서 그래. 내가 밥 한번 살께.

밥은 무슨 밥. 내가 할 줄 아는게 이것밖에 없는데 뭐.
부담갖지 마, 누나. 환자 번호가 뭐야?

그렇게 전화 한방이면 해결해주는 동기.

다른 환자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도 급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그렇게 동기들 빽을 믿고 환자 검사시키고 치료 스케줄을 짠다.
급한 일이 생기면 바로 전화해서 물어본다.

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이건 도대체 왜 그런거냐?

언니, 그거 진짜 몰라서 물어보는 거야? 완전 실망인데. 요즘 공부 안하는구나!

그렇게 구박을 하면서도 자세히 잘 가르쳐 준다. 내가 모르는 부분이 어딘지도 짚어가면서. 그리고 다른 의사 만나면 그렇게 무식한 티내지 말라고 센스있게 요령도 알려준다.

누구야, 네가 한 판독 봤는데
이 사진에서 어디가 이상한거냐? 난 잘 모르겠다. 환자한테 어딘지 짚어줄 수가 없네.

응, 그 사람 좀 어려운 케이스야. 나도 한참 들여다 봤어.
이미지 몇번 세트에서 몇번 커트를 봐. 거기 척추뼈 보면 아래 관절면이 좀 이상하지? 거기야.

그래도 잘 모르겠어.

그럼 내가 화살표로 표시해 줄께. (전화 넘어 그는 자기 컴퓨터로 화살표를 표시한다)

이제 보여?

오케이. 고마워.

일하면서 편리하고 고맙기 때문에 동기가 좋은 것만은 아니다.
나랑 일곱-여덟살 차이나는 동기들.
이미 슬기엄마가 되어 본과생활을 시작한 나에게
당시 동기들은 철딱서니 없는 어린아이들 같은 느낌을 주었다.

좋게 보면 해맑고 나쁘게 보면 철없는 아이들.
그렇게 내가 어린 아이취급했던 동기들,
과가 달라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르고 지내던 어느 날, 자기 분야의 전문가가 된 그들을 만날 수 있다.

와, 대단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능력있는 그가 샘이 나서
반가운 내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겉으로 쿨한 척, '잘 지내지?' 그렇게 인사하며 지나친다.

그런 멋진 동기 중에서 학생, 인턴 때
특히도 애기같고 착하고 코맹맹이 소리를 내면서 '언니이~~~' 그렇게 나에게 매달렸던 그녀와
엊그제 통화를 할 일이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뭔가를 물어볼게 있었다.

원래 완벽하고 꼼꼼한 성격의 그녀는 자기 대답이 시원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오늘 A4 용지 세장으로 내가 질문한 사항에 대해 참고문헌이 될만한 논문들을 적어서 보내준다.
그녀는 예전에도 매사에 꼼꼼했었다. 지금도 여전하구나.
그리고 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

언니, 그런데 요즘 의사들은 내가 무슨 과 의사인지, 이 과의 본질은 무엇인지, 이런 과의 의사라면 어떤 일을 꼭 해야하는지 그런 정체성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 안하는 거 같아.

다들 impact factor 가 높은 저널에 논문 내는 것에만 관심이 있어보여.
그래서 자기 과 고유의 연구에는 등한시 하는거 같애.

예를 들면 우리 과 고유의 연구 논문은 이러이러한 주제를 다루는 건데, 그런 주제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읽고 관심이 있겠어? 꼭 그럴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런 논문은 우리 파트 전공자끼리의 관심에 불과하겠지. 그러니까 당연히 인용지수가 낮고 impact factor가 낮은 것 아니겠어? 그래도 그런 논문이 필요하긴 한거 아냐?

근데 요즘에는 아무도 그런 연구 안하는거 같아.

다학제 연구나 통합 연구라는 이름으로 연구비 키우고 다른 과 임상데이터 공유해서 높은 점수 저널에 내는 것에 혈안이야. 그래서 점점 기초가 약해져 간다는 느낌이 들어. 우리 과는 그런 기본과 기초를 다지는 과인데 말이야.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내가 패배자인가?

연구의 대의를 강조하고 중대한 연구를 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난 그게 다 진실은 아닌것 같아.
impact factor라는 건 결국 누가 얼마나 읽어주느냐의 문제잖아.
우리과 저널을 누구나 다 읽을 필요는 없는거 아냐?.
이 분야 전문가들이 읽고 지적하고 토론할 수 있으면 되는거 아닌가?

자신의 관점에서 요즘의 세태를 분석하고 지적하고 대안을 내려고 노력하는 그녀.

어휴, 얘, 많이 똑똑해졌네. 옛날에도 저렇게 똑똑했었나?
자기 삶의 공간에서 고민을 많이 하고 사는구나.
멋지다. 

새삼 그녀를 다시 보게 된다.

근데, 언니. 언니는 이미 impact factor가 중요한 사람이 아니야.
언니는 늘 글을 쓰고 많은 사람들이 언니의 글을 읽고 있어.
그게 언니의 능력이야.
대단해.

속상하고 힘들어 하는 나를 세련되게 위로할 줄 아는 그녀.
지혜로운 눈으로 세상을 읽고 게으름없이 노력하는 그녀.
그런 동기에게 도움을 받고 위로를 얻을 수 있으니
그게 바로 우리 병원에서 내가 얻는 큰 기쁨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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