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을 처음 진단받으면 누구나 말한다.
돈은 문제가 아니라고.
돈은 얼마든지 들어도 좋으니 최고의 치료, 최고의 검사를 하게 해달라고.

그러나 언제나 돈은 문제가 된다. 아주 부유한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오랜 투병기간,
잦은 검사와 입퇴원의 반복, 교통비, 가족들의 부양과 가족에 따른 간접비...
끊임없이, 소소히 돈이 많이 든다. 그래서 암환자나 희귀질환자들의 진료비 감면 혜택의
범위가 넓고 보장율이 높은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나 개인적으로는
암환자가 진료비의 5%만을 부담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편인데,
그렇게 개인 지불 비용을 줄이는 것 보다는 자기가 부담할 돈을 20% 정도를 더 늘리더라도,
더 많은 신약과 좋은 약의 보험 적용 범위를 넓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의학적으로 우월한 효과가 입증된 약들이 하루 빨리 환자들에게 적용되려면
환자 개인도 지불비용의 증가를 감내해야 한다.
그래야 전체적인 의료의 질이 나빠지지 않고 발전의 혜택이 개인에게 돌아갈 수 있다.

환자 상태가 나빠지고 병이 조절이 안되고 있는데
이럴 때 어떤 약으로 치료를 하면 얼마만큼 좋아질 수 있다는 근거자료와 연구가 다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약을 쓸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아직 우리나라에 들어오지 않은 신약들도 있고, 들어와 있다해도 보험적용이 안되면 한달에 수백만원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모든 약을 다 보험으로 처리해 줄수는 없다. 지구상에 그런 나라는 없다. 우리나라 의료보험제도는 비용 대비 최고의 효율을 자랑한다고 생각한다.

임의비급여로 약을 쓰면 불법이며 환자가 환급을 요청하는 순간 전액 보상되어야 한다.
죽어도 써서는 안되는 것이 임의비급여이다. 간혹 마음이 약해져서 삭감을 각오하고 쓰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매번 다짐한다. 절대 임의비급여는 쓰지 말아야지. 불법진료를 하면 안된다. 물론 불법의 유무는 의학적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니다. 사회적 기준이다.

이런 사항을 다 설명해 주지 않으면 설명의 의무 위반이 된다. 더 나은 옵션으로 무엇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환자의 권리라고 한다.

그런데 다 설명한 다음에 '그렇게 치료하는 것은 현재 불법이니 당신이 돈이 아무리 많아서 다 내겠다고 해도 난 그냥 보험이 되는대로 치료하겠소' 하면 모든 환자와 보호자들이 어이없어 한다. 내가 돈을 내겠다는 대도 치료를 안해주겠다고 하니 말이다.

진료의 기준은 의학적 적합성이 아니라 보험이 되느냐의 여부이며 보험이 적용되도록 수많은 문서 조작도 서슴지 않는다.

의학적으로는 HER2 양성 환자에서 허셉틴과 탁솔을 쓰다가 병이 진행되면 젤로다와 타이커브를 쓰는게 순서다. 그렇게 안 한다면 의사로서 악행에 해당한다. 명백히.

그러나 우리나라 보험에서는 바로 젤로다와 타이커브로 넘어가면 안된다. 그 전에 아드리아마이신을 쓰고 그 다음에 병이 나빠진 다음에 젤로다와 타이커브를 써야 한다. 몸을 더 상하게 하고 더 나빠진 다음에 써야 한다. 난 그래서 그 환자가 왜 지금 아드리아마이신을 쓸 수 없는지에 대해 의무기록을 잔뜻 작성한다. 온갖 근거를 갖다 대고 환자 몸이 너무 약하고 항상 숨찬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

나중에 발각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우리병원 심사팀으로부터 심평원의 지적 사항을 전해 듣고 삭감의 위기에 처한 나의 환자 사례들을 접하게 된다.

난 오늘도 의무기록을 다시 쓰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눈물로 호소한다.
고진선처를 바란다고.

진료실을 떠나도 환자에게는 손이 많이 간다.
마음도 많이 쓰인다.

그렇게 애쓰는 마음을 좀 이해해서 사회적 기준을 의식하지 말고
의학적 기준에 맞춰서 마음놓고 진료할 수 있으면 좋겠다.
권리만 주장하고 의무는 다하지 않는다는 말 들을까봐

사전신청서류나 작성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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