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선생님이 제 애인이에요.

학회를 다녀와서 외래가 밀린다.
평소보다 대기시간이 많이 길어진다.

몸도 불편하고 마음도 불편한 환자들이
한시간씩 진료시간이 지연되면 짜증이 날 법도 한데 내 앞에서는 내색을 못한다.
의사 앞에서 싫은 소리 하면 안되니까 그런 환자도 있겠지만
난 환자들이 내 상황을 많이 이해해주고 있다고 느낀다.

- 학회가서 공부 많이 하고 오셨어요?
- 외국 다녀오셔서 진료보기 힘드실텐데 괜찮으세요?
- 입가에 뭐가 잔뜩 난걸 보니 정말 피곤하신가봐요.

난 그렇게 환자들에게 걱정을 끼치는 의사다.

엄마는 외래볼 때 꼭 화장을 하라고 당부하신다. 그럼에도 거의 그런 적은 없지만...의사가 단정해보이고 아파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이제 나이도 들고 얼굴도 늙어가니 화장을 안 하면 아파보인다는 것이다. 게다가 알러지 때문에 맨날 눈물 콧물을 흘리니 항상 얼굴이 지저분하다. 그래서 화장을 하면 좀 낫다. 그러나 가꾸는 것도 습관인지라 난 그렇게 잘 못한다.

항암치료 하느라 당신은 잘 드시지도 못하면서
만두를 빚어오시고
계란을 삶아 오시고
커피를 사다 주신다.
먹으면서 진료보라고.
내가 늘 배고파 보이나보다.
그렇게 마음이 담긴 선물을 해 주시는 환자들 마음이 너무 고맙다.

- 항암치료를 하는 중인데도 피부가 저보다 좋으신거 같아요.
- 선생님 만나러 오니까 어제 밤에 팩 하고 잤어요. 3주에 한번 보는 선생님인데 잘 보여야죠.
- 여자끼리, 뭐 애인도 아닌데 왜 그러셔요? ㅎㅎ
- 지금은 선생님이 제 애인이에요.

나를 믿고 의지하고 주치의인 내가 자신의 치료 여정을 함께 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주는 마음이 애틋하고 고맙다.

나의 스승님이 언젠가 해주신 말씀이 생각난다.
13년째 전이성 자궁암으로 지내시는 89세 할머니.
드물게 천천히 나빠지는 유형인가보다.

요즘은 아무 치료도 안하시고 폐로 전이된 병변을 가지고 지내신지 몇년이다.
얼마 안남았다는 선고를 받고도 10년 이상 살다보니 이제 가족들 관심도 별로 없다.
언제부터인가 직계 자식이 병원에 오지 않고 요양원에서 함께 지내는 도우미 아줌마와 함께 병원을 다니신다.

선생님 보러 병원 오는게 내 인생의 낙이에요. 자식들은 이제 날 찾아오지도 않아요.
저도 저의 부모님에게는 그런 자식이에요. 병을 가진 환자가 의사에게 갖는 마음. 기대감. 의존감.
병이 깊어갈 수록 그 마음이 커진다.

치료되지 않는 병을 가지고 지내는 환자들과의 외래. 그것은 내가 돈벌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고,
인생을 나누는 시간이다.

나의 천박한 인격탓에 난 여전히 화도 내고 소리도 지르고 우격다짐을 한다.
환자들을 서운하게 하는 의사다.

그래도 밤에는 반성한다. 그들이 있기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니.
그들이 나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긴 여정을 함께 나누며 이 길을 가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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