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을 소재로한 민담 몇 개를 소개한다.

1. 벼룩과 이와 빈대

옛날 빈대의 아버지가 환갑이 되어 큰 잔치를 벌였는데 많은 벌레들이 초대되었다. 잔치상을 잘 차렸다는 소문이 나서 모두들 모여들어 진수성찬을 앞에 놓고 밤새도록 마음껏 먹고 마셨다.

맨 먼저 벼룩의 얼굴이 빨개졌으며, 성미가 급해서 이와 시비가 벌어졌다. 이는 벼룩에게 조그만 놈이 주착없이 마시고 날뛴다고 나무랐고 벼룩은 벼룩대로 굼벵이 같이 느린 놈이 왜상관이냐고 대꾸해서 싸움이 벌어졌다. 빈대는 둔하지만 주인으로서 그냥 있을 수 없어 둘 사이에 말리고자 하였다.

한 동안의 소란 끝에 모두의 모양에는 변화가 생겼다. 빈대는 말리다가 쓰러질 적에 밑에 깔려서 납작해졌고, 이는 벼룩의 발에 가슴을 차여 멍이 들었고, 벼룩은 구석에 밀렸으므로 조그만해졌고, 술을 많이 마신 탓으로 온 몸이 빨개졌다고 전한다.


2. 이의 보은

옛날 어느 곳에 젊은 홀아비가 살고 있었는데 옛말에도 "홀아비 살림에는 이가 서말"이라고 했드시 빨래를 제대로 해 입지 못한 탓인지 이가 많이 꼬였다. 워낙 천성이 착한 이 홀아비는 차마 생겨나는 이를 모두 죽이지 못하고 뒤뜰에 독을 하나 묻어 놓고는 잡아서는 넣고 또 잡아서는 넣고 하길 수년, 잡은 이가 독으로 하나 가득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꿈을 꾸니 웬 동자가 나타나서 "내일 우리들을 시장에 내다 파십시요. 누가 "이도 장에 나왔군." 하거든 "산삼도 장에 나왔네."하면 놀라 도망치는 사람을 따라 가시오." 하고는 사라졌다.

이튿날 이를 장에 가지고 갔더니 정말 웬 선비가 와서 "허참 이가 다 시장에 나왔네." 하기에 "산삼도 장에 나왔네."하고 받아 넘겼더니 깜짝 놀라 도망을 쳤다. 홀아비는 바로 저 사람이구나 하고 뒤로 따라 가니 어느 깊은 산골로 들어갔다. 그러더니 조그만 굴속으로 쏙 들어갔다. 굴 문을 지키고 섰던 홀아비는 그만 잠이 들어 버렸는데 잠에서 깨어보니 주위 모두가 산삼 밭이었다. 홀아비는 산삼을 캐어 시장에 내다 팔아 큰 부자가 되어 잘 살았다.   



3. 모기의 혼

옛날 홀어머니가 아들 하나를 데리고 매우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매일 나무를 해서 팔아 먹고 살았는데, 하루는 어머니가 아들에게,

"내가 예쁜 다홍 저고리를 해 줄게, 오늘은 나 가서 나무를 많이 해 와라."
고 내 보냈다.

그런데 이 동네에는 「조매기」라는 것이 무척 많았다고 한다. 이 「조매기」는 항상 어머니가 아들의 밥을 해 두면 몰래 훔쳐먹곤 하였다. 오늘도 아들의 밥을 해서 솥 안에 넣어 놓았더니 또 「조매기」가 와서 훔쳐먹는 것을 본 어머니가 야단을 치며 때리려 했다. 그러자 이 「조매기」는 오히려 어머니에게 달려들어 이 어머니의 가죽을 벗겨셔 울타리에 주욱 걸어 놓았다.

저녁에 아들이 나무를 해서 한 짐 가득 지고 돌아오니 울타리 가지에 다홍빛 나는 무엇인가가 주욱 걸린 것이 보였다. 이것을 보고는 속으로 좋다구나 했다. 어머니가 저고리 해 주려고 그렇게 한 것인가 보다고 가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사람의 가죽이었다. 아들은 혹 자기 어머니가 아닌가 싶어 옆집으로 가서 물어보니 「조매기」가 들어가는 것만 봤지 모르겠다고 했다. 또 그 옆집에 가도 그런 말만 했으며 셋째 집까지 가서 물어봐도 또 그런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자 그는 어머니가 「조매기」한테 그렇게 당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원수를 갚을까 하고 곰곰히 생각하다가 벼룩을 한 말 잡아다가 온 집안에 뿌려 놓았다. 밤중에 「조매기」가 나타나서 잠을 자려고 마루에 누웠다. 온 몸이 따끔따끔하여 놀란 「조매기」는 "이 서방이 무나, 벼룩 서방이 무나?"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할 수 없었던지 마침내 솥뚜껑을 열고 솥 속에 누운 채 뚜껑을 덮고 잠을 청했다. 아들은 재빨리 부엌으로 들어가 솥뚜껑을 자빠뜨려 놓고는 큰 돌멩이를 올려 놓았다. 그리고는 불을 지폈다. 처음에는 "어 참, 따뜻하다. 어떤 착한 사람이 불을 때 주는구나."하고 좋아했다. 그러더니 조금 후에 "이 서방이 무나, 벼룩 서방이 무나?"하며 버르적댔다.

그래도 한참 불을 지피니 빠지직하고 타 죽어 버렸다. 그래 그것을 가져다 강물에 띄웠더니 모기가 되어 앵 하고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이것을 모기의 혼이라고 한다.


4. "대홍수와 목도령"

동년배 청년의 음모에 빠진 목도령은 하는 수 없이 한 섬의 좁쌀을 모래사장에 흩어 놓고 어떻게 도로 주어 담을까하고 근심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한 마리의 개미가 와서 목도령에게 무슨 일로 그러느냐고 묻고는 어디로 급히 가서 개미떼를 데려온다. 수많은 개미들이 각기 하나씩의 좁쌀을 물어 올려 원래의 자루에 다시 담아주게 되자 노파는 딸들과 동년배의 청년과 함께 와서 보고는 감탄을 하고 친딸을 주려고 하지만, 또다시 동년배 청년이 시비를 한다. 이에 노파는 다시 꾀를 내어 어둔 밤에 두 청년 몰래 두 처녀를 동쪽과 서쪽에 있는 각기 다른 방에 넣고는 두 청년에게 서로 들어가고 싶은 방에 들어가서 배필로 삼으라고 하였다. 이 때 모기떼가 나타나서 목도령의 귀 옆을 지나가면서 "목도령 동쪽 방으로 앵앵"하면서 친딸이 있는 방을 알려주어 노파의 친딸을 얻게 되었고 지금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 부부의 자손이다.


5. 모기와 이 벼룩

모기와 이, 벼룩 셋이서 글솜씨 내기를 한다. 첫째로 모기는 "사람의 귀밑을 앵앵거리며 날아가니,
자기 손으로 자기 귀를 때린다."고 읊었다.
그러자 이는 "사람의 허리춤에 몰래 기어가니, 사람이 모두 외눈박이가 된다."고 하였다.
끝으로 벼룩은 "사람 앞에서 깡충깡충 뛰어가니, 사람이 모두 제 손으로 입을 막는다."하였다.
이처럼 셋 이는 시를 짓고, 빈대에게 우열을 가려달라고 했다.

빈대는 모기의 시가 가장 좋고 벼룩, 이 순서라고 했다.
꼴찌를 한 이가 빈대에게 따지자, 빈대는 결정에 불복하는 것은 나쁜 행위라며 이를 때렸다.
이를 때린다고 모기와 벼룩이 달려들어 빈대를 깔고 앉아 수없이 때리는 바람에 빈대의 몸이 납작해졌다.

그리고 나서 셋이는 서로 제 시가 가장 낫다고 다투었다. 이 때 허리를 차인 모기는 허리가 잘록해지고,
벼룩은 등을 다쳐 허리가 꼬부라졌으며, 이는 불알을 뽑히어 몸을 제대로 세울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6. 노승과 벼룩

아주 옛날, 비단행상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청년이 있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그는 아주 효심이 지극했다. 어느 날 비단짐을 짊어지고 강원도 대관령 고개를 넘어가다가 고갯마루에서 잠시 쉬고 있던 그는 이상한 노스님을 한 분 발견했다.

누더기를 입은 노스님은 길 옆 풀섶에 서서 한참이 지나도록 꼼짝을 않는 것이었다.

청년은 궁금했다.
"왜 저렇게 서 있을까? 소변을 보는 것두 아니구. 거참 이상한 노릇이네"

한참을 바라보던 청년은 궁금증을 견디지 못해 노스님 곁으로 다가갔다.

『스님! 아까부터 여기서 무얼하고 계십니까?』
눈을 지그시 감고 서 있는 스님은 아무 말이 없었다. 청년은 다시 물었다.
여전히 눈을 감고 서 있는 노스님은 청년이 재차 묻자 얼굴에 자비로운 미소를 띠우며 입을 열었다.

『잠시 중생들에게 공양을 시키고 있는 중이라네.』

「저렇게 꼼짝도 않고 서있기만 한데 중생에게 공양을 시키다니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말이로군.」

청년은 궁금증이 더 커졌다.

『어떤 중생들에게 무슨 공양을 베푸십니까?』

『옷 속에 있는 이와 벼룩에게 피를 먹이고 있네.』

『그런데 왜 그렇게 꼼짝도 않고 서 계십니까?』

『내가 움직이면 이나 벼룩이 피를 빨아 먹는데 불편할 것이 아닌가.』

스님의 말을 들은 청년은 큰 감동을 받았다. 청년은 비단장수를 그만두고 스님을 따라가 제자가 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순간, 청년의 뇌리에는 집에 계신 홀어머니가 떠올랐다. 청년이 잠시 망설이는 동안에 노스님은 발길을 옮겼다. 생각에 잠겼던 청년은 눈앞에 스님이 안보이자 비단 보퉁이를 팽개치고 어느새 산길을 오르고 있는 노스님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7. 도깨비 퇴치-벼룩 껍질

옛날 한 대감이 벼룩을 잡아 키우고 있었다. 벼룩이 어찌나 큰지, 허물을 벗은 껍질이 염소 껍질만 했다. 대감이 딸이 하나 있었는데, 벼룩의 껍질을 보여주고 무슨 껍질인지 알아맞히는 사람을 사위로 삼는다 하였다.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그 껍질을 보았으나 아무도 맞히는 사람이 없었다. 하루는 도깨비가 찾아와 냄새를 맡으며 돌아다니더니 대감에게 그 껍질이 벼룩의 껍질이라고 하였다. 대감은 하는 수 없이 약속을 지켜 도깨비에게 딸을 시집보내게 되었다. 딸을 도깨비에게 빼앗기게 된 대감은 시름으로 세월을 보내게 되었는데, 하루는 한 노인이 찾아와 이 사정을 듣고 세 아들을 데리고 와 딸을 구해주겠다 하였다. 노인이 세 아들과 함께 도깨비굴을 찾아가 대감의 딸을 구해 도망치는데, 도깨비가 이를 보고 뒤를 쫓기 시작했다. 첫째 아들이 부적을 써 던지니 가시덤불이 생겨 도깨비의 앞길을 막았다. 도깨비는 이를 보고 쇠로 된 신발을 신고 가시덤불을 넘어 쫓아왔다. 그러자 둘째 아들이 부적을 써 던지니 큰 바다가 생겨 도깨비 앞을 막았다. 도깨비는 이번에는 뗏목을 만들어 바다를 건너 쫓아왔다. 노인의 세 아들은 성으로 피해 들어갔는데, 도깨비가 사다리를 만들어 성벽을 넘으려 하였다. 노인의 셋째 아들은 활을 잘 쏘았는데, 활시위 소리와 함께 도깨비가 화살에 맞아 죽게 되었다. 대감은 은인인 노인의 세 아들에게 각기 벼슬을 주고, 딸은 다른 곳에 시집보내어 행복하게 살았다.



8. 백련암의 모기
백련 스님은 가야산 중턱에 있는 백련암에서 참선에 몰두하고 있었다. 여름이 되어 시원한 산골의 바람과 매미 소리에 피곤함을 물리치기 어렵게 되었다.

어느 날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자 백련암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스님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아침에 깨어보니 햇살은 백련암을 밝게 비추고, 산새들의 노래 소리와 산봉우리를 휘감은 아침 안개가 신선들이 사는 곳으로 착각할 정도의 경치가 펼쳐졌다. 백련 스님은 떠나온 고향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낳아 주고 길러 주신 부모님, 함께 뛰어 놀던 형제와 친구들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심란해졌다. 깜짝 놀란 스님은 잠시라도 부처님의 품을 떠난 것이 후회가 되어, “이래서는 안 되겠다. 이러다가 속세로 다시 돌아가겠으니 잠을 쫓아내는 방법이 없을까?”하고 골똘히 생각했다.

“이 해인사에 있는 모든 모기를 끌어 모아 백련암에 두면 내가 모기떼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할 것이다.”하고 주문을 외우니, 그때부터 백련암에 모여든 모기들이 스님이 주무시려고 할 때면 물어 잠을 깨도록 하여 백련 스님이 대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모기가 살기에는 좋지 않은 환경인 산 중턱의 백련암에 여름밤이면 모기들이 사람들을 괴롭힌다고 한다.

9. 장군과 모기

강감찬은 고려의 인물로 명장이다. 1011년(현종 2)에는 동여진 부족이 동해로 남하하여 동해와 남해 주변을 약탈하므로 이를 격퇴하였으며, 1018년(현종 9) 12월에는 거란의 성종이 대규모의 군사를 움직여 동평군왕 소배압(蕭排押) 도통의 지휘로 거란군 10만을 거느리고 쳐들어오매, 고려에는 서북면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 강감찬을 상원수로 하고 강민첨을 부원수로 하여 군사 20만 8300명으로써 영주(寧州)에 주둔케 하여 거란군을 범접치 못하게 하였다.
다시 흥화진(興化鎭)으로 나아가 날랜 병사 1만 2천 명을 뽑아 산곡 사이에 매복시키고, 큰 줄로 소가죽을 꿰어 성동(城東)의 큰 내를 막고 있다가 거란군이 이르기를 기다려 물을 트고 복병을 발하여 적을 쳐 거란을 크게 패하게 하였다.
대장군 강감찬이 진주가 고향인 강민첨과 함께 어느 날 하동을 지나게 되었다. 날이 어두워 오늘날의 읍내 구시장터에서 유숙(留宿)하는데 밤에 모기가 너무 많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던 강감찬 장군은 벌떡 일어나 군사를 호령하듯, “요망한 모기들이 무엄하게 덤벼 잠을 잘 수 없구나. 썩 없어져라.”고 기백 찬 호통을 치자 모기가 모두 도망을 가고 없어져 잠을 편히 잤다고 한다. 그때부터 구시장에는 모기가 없어졌다고 한다.(경남 하동)

10. 콩의 애기 폿의 애기

아주 오랜 옛날 콩의 애기 어머니가 아파서 죽자 아버지는 후처를 얻었는데, 후처한테는 콩의 애기보다 한 살 어린 폿의 애기가 있었다. 의붓어머니는 콩의 애기를 항상 미워하여 맛이 없는 콩죽만 먹였고, 폿의 애기에게는 맛이 있는 팥죽을 먹였다. 의붓어머니는 날이 갈수록 콩의 애기를 미워하고 힘든 일을 시켰지만 콩의 애기는 한 마디 대꾸도 없이 순종하였다.

하루는 영등산 영등굿을 하는 데 간다고 의붓어머니와 폿의 애기가 단장을 하느라 야단이었다. 콩의 애기가 같이 가고 싶다고 하자 커다란 물항아리를 가득 채우고, 피를 말려 껍질을 깐 뒤 삼을 다 짜고 올 테면 오라고 소리를 지르고 가버렸다.

커다란 물항아리는 밑이 터져 있었지만 까마귀의 도움으로 송진을 이용하여 구멍을 메우고 물을 채웠다. 널어 둔 피는 새들이 날아와 다 까주었다. 외양간에 놓아 둔 삼은 소가 먹고 똥을 싼다는 것이 삼이 짜져서 나오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콩의 애기는 난데없는 꿩의 도움으로 고운 옷과 신발을 신고 영등굿 구경을 갔다. 그 곳에서 콩의 애기는 하늘 애기 배필로 뽑혀서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폿의 애기는 하늘 애기와 결혼할 사람은 자기밖에 없다고 생각하다 콩의 애기가 뽑히자 꾀를 부려 콩의 애기를 못에 빠뜨려 죽이고 콩의 애기인 척 하늘 애기를 속였다. 그런데 콩의 애기가 빠진 못에 있던 연꽃이 오색구슬로 변하자, 폿의 애기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 구슬을 궤 속에 넣고 꽉 잠가 놓았다.

며칠 후 하늘 애기가 방에 있는데, 궤 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더니 궤의 문이 스르르 열리며 예쁜 여자가 걸어 나왔다. 콩의 애기였다. 하늘 애기가 “이게 어찌된 일이냐?” 하고 묻자 콩의 애기는 그 동안의 일을 이야기했다. 분을 참지 못한 하늘 애기는 폿의 애기를 죽여 버렸다.

콩의 애기는 원수를 갚기 위해 폿의 애기 살을 한 토막씩 잘라서 소금에 절인 뒤 폿의 애기인 척 꾸미고 의붓어머니를 찾아갔다. “어머님, 요거 쉐궤기 젓 거 단지 앗안 왔수다. 먹읍서.” “아이고, 나 아기 어멍 셍각허연 앗안 왔고나게. 착다.” 계모가 좋아하여 어쩔 줄을 몰라 하니, 폿의 애기 살로 절인 것을 주고 돌아왔다.

며칠 후 다시 의붓어머니에게 갔더니 의붓어머니가 하는 말이,

“어떵난 쉐궤기에 손콥 발콥이 셔라.”
“쉐궤기 소곰허영 다 먹어 가민 손콥 발콥이 나온댄 데다. 써 다 먹읍데가?”
“ 먹었저.”
“아이고, 미친 년! 두린 년! 사름 궤기 몰르곡 쉐궤기 몰랑. 사름 궤기 잘 먹어라! 지 새끼 궤기 잘 먹어라! 푸지게 먹어라!”
하고 콩의 애기는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폿의 애기 살을 먹은 것을 알고 의붓어머니는 “아이고, 나 아기 죽었고나! 나 아기 죽었고나! 설룬 나 아기 마 죽었고나! 나 아기 광 꽝이랑 늬, 베록, 모기, 리나 뒈영 사름이나 튿어 먹곡, 나 아기 피랑 대죽 입사귀 어욱 입에 강으네 긋긋 물이나 들라.” 하고 말했기 때문에 이와 벼룩, 모기 등이 나와 사람의 피를 빨아먹게 되었고, 수수잎에나 억새잎에 붉은 색이 물든 것이라고 전한다


11. 칠갑산과 모기

대산면 대산리에 가면 큰 느티나무가 있고 이 느티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고목이다. 옛날 이조때에 산세의 정기를 받고 장수가 된 한 장수가 자기와 같은 장수가 나올 산세가 충청도를 두루 살피다가 칠갑산에 유게 되었다. 그가 칠갑산에 와선 산세를 두루 살피다보니 정말 칠갑산은 장수가 나올만한 산세였다. 그래서 그는 그때부터 장수가 나올라면 산봉에 골이 100개가 되어야 됨으로 산을 두루 살피게 되었다.

장수가 봉우리를 헤아리면서 산세를 살피고 갈 때 그는 한고개 한고개 지나며 ”경탄 경탄”하고 놀래는 것이었다. 한국의 산세는 대개의 경우 산이 거칠고 계곡이 날카로운 곳 에 반드시 장수가 나오는데 칠갑산의 산세는 거칠면서도 부드러운데가 있어서 정말 武脈(무맥)보다는 文脈(문맥)같기도 하고 문맥 같으면서도 무맥 같기도 해서 그가 놀래는 것이었다.

칠갑산은 일곱 개의 줄기가 뻗어 있고 그 중 한줄기가 크게 뻗어 있는 줄기에 봉우리가 3개 나란히 서 있는데 이 줄기에 골이100개만 있으면 문무를 겸한 슬기로운 장수가 나오겠다고 골을 하나 하나 헤아려 갔었다. 그가 여든까지 골을 헤아리고는 아마 백개가 넘겠다고 생각하고 안심을 하고 또 헤아려 갔다. ”골이 백개가 넘으면 임금님이 나올 것이다.아마 백개는 넘을 것이다.이거야말로 큰 발견이다.”하고 그는 마지막 손길을 하기위해 더욱 길을 재촉하며 하고 헤아리다가 언뜻 앞을 보니 골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그는 그 자리에서 실마을 하고 덥석 주저 앉았다.

”혹시 잘못 센 것이 아닐까”

그는 이렇게 생각하고 다시 일어나서 되돌아오며 골을 헤아려봤다.다시 헤아려봐도 아흔 아홉밖에 되지 않았다. 그는 잘못 헤아 렸다고 다시 헤아리며 아래쪽부터 살피며 또 헤아려봤다. 그러나 아무리 헤아려도 아흔아홉골 밖에 되지 않았다. 그는 낙심하고 산세를 또 한번 훑어 봤다.

”참 아깝구나 이런 산세에 아흔아홉골이라니……”

하고 손에 들었던 지팡이를 되는대로 내동댕이쳤다. 지팡이는 한쪽 구석에 가서 당에 곱히더니 두어번 흔들흔들한다. 장수는 세 번이나 칠갑산의 99비를 헤아리다가 지쳤는지 땅에 눕자마자 코를 드르렁거리며 깊은 잠이 들었다. 장수가 한참 잠을 자는데 꿈속에 산신령이 나타났다. 자기가 장수되기 직전에 가리킴을 받았던 사부가 죽어서 산신령이된 그 노인이었다. 노인은 꿈속에 나타나선 한 번 크게 땅이 떠나갈 듯이 크게 웃더니

”이봐라 무슨 연고로 여기에 와선 준령을 세고다니느냐! 칠갑산에서 장수가 나오면 어떻게 하게 산세를 잘 살피라고…..산세가 네가 알기로는 문맥이 반 무맥이 반이라 하는데 천막의 말씀이야 여기야 문맥이지 그러니까 선비가 나와야지 안 그런가 이사람아 안 그래 하…..하….”

하고 또 한번 크게 웃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장수는 꿈에서 깨어나 주위를 살펴봤다. 아무도 없었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다리를 쳐다보니 큰 모기가 자기으 다리에서 피를 빨고 있었다. 그는 그때서야 다리가 가려워서 발을 흔들었다 모기가 날아갔다. 그는 잽싸게 움직여서 칼을 던졌더니 모기가 (웽)하고 떨어졌다. 그러자 모기가 벌떼처럼 숲에서 웽하며 대들었다. 그때 그는 생각했다.

”옳지 너희들이 산등성이 하나를 까뭉개 버렸구나 이 모기새끼들아”

하고 부적을 번쩍 들자 그 많던 모기들이 한꺼번에 죽어갔다. 장수는 생각하기를 틀림없이 산등성이가 100개였는데 이 모기를 등살에 산등성이 하나가 숲이 말라비틀어지면서 그후 비가 와서 산등성이가 없어져서 칠갑산을 버려놨다 하여 이곳의 모기는 모두 없애 버려야겠다고 또 북적을 들자 칠갑산 기슭에서 모기 소리가 (웽웽)들려왔다.

그래서 지금 칠갑산 기슭에 가면 대산면 대산리에 모기없는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은 장수의 덕을 보는 마을이라 한다. 또한 장수가 아흔아홉골을 헤아리다가 실망을 하고 잠자리에 들 때 내 동댕이친 지팡이가 살아서 나뭇잎이 피고 하더니 오랜 세월에 크게 자라서 지금 대치리에 있는 고목으로 변했다고 한다.


12. 미역수 절과 빈대

고려 초기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미역수마을 뒷산에 절이 있었으니, 이름은 편각사 또는 백련암이라고 한다. 삼국 통일 이전 김서현(金舒玄)이 만노태수로 왔을 때 이 절에는 매우 큰 대웅전이 있었고, 백 칸이 넘는 승방이 있었으며, 불공을 드리러 오는 신도가 쉬는 방도 50여 칸이나 되었다고 한다.

부처를 믿는 사람들은 하루에도 몇 백 명씩 절을 왕래하였으며, 다른 절에서 이곳을 찾는 중들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기에 날마다 식사 시간이 되면 몇 백 명이 먹을 쌀을 씻어야 했고 미역도 많이 빨아야 했는데, 미역을 빤 물이 아랫동네까지 내려갔다 하여 동네 이름을 미역수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절이 이처럼 번성하던 어느 날 빈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불공을 올리고 돌아갔는데, 이후 그 사람에게서 떨어진 빈대가 날마다 불기 시작하여 반 달 만에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그러나 중이 지키는 오계(五戒) 중 그 첫 번째가 일불살생(一不殺生), 즉 살아 있는 생물은 개미 한 마리라도 죽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중들은 빈대가 있어도 죽이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었다. 빈대는 달이 가고 해가 거듭할수록 자꾸 불어 갔다.

먼 곳에서 불공을 드리러 오는 사람은 절에서 자야만 했는데, 절의 어느 방에나 빈대가 우글거려 밤이 되면 사람의 피를 빨아 먹으려고 달려들었다. 그러면 뜨끔하게 아파서 아무리 곤하게 자고 있던 사람이라도 잠에서 깰 수밖에 없었다. 신도들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빈대 잡기에 하룻밤을 새워야만 했다. 벽에는 빈대 피가 여기저기 불그스레한 무늬를 이루게 되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몇 달이 지나는 동안 신도들은 어떻게 할까 근심뿐이었다.

중들은 벽에 있는 빈대 피를 보자마자 종이 붙이기에 바쁜 날을 보내야만 했다. 종이는 여러 겹이 되었다. 불공을 드리러 왔다가 자는 신도들은 종이를 붙인 사이에서 기어 나오는 빈대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벽에 붙인 종이는 하룻밤 사이에 빈대 피로 벌겋게 물들게 되었다. 하룻밤이 지나 아침이 되면 밤을 새운 사람들이 빈대가 있지 않나 하여 옷 터는 소리가 야단스럽게 들리곤 하였다.

법당에서 불공을 올리는 사람들도 빈대가 오르지 아니하였나 하여 불공을 끝낸 후 밖에 나와 옷을 털어 내기에 바빴다. 빈대는 대웅전까지도 번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빈대절이라는 소문이 먼 곳까지 퍼지게 되었다. 끝내 불공을 드리러 오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어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만이 간간이 절에 올 뿐이었다. 먼 곳에 사는 사람은 한 사람도 오지 않게 되었다.

그 후 하루에도 몇 백 명씩 신자들이 찾아오던 절이 열 명도 채 오지 않는 절로 바뀌게 되었다. 절에 있는 승려들도 빈대에 못 이겨 차츰차츰 다른 절로 떠나 버렸다. 그리하여 끝내 절은 텅 비게 되고 말았다고 한다.

10년 전만 해도 절이 있던 곳의 주춧돌을 뒤집어 보면 빈대 껍질이 있었다. 이것으로 보아 빈대가 얼마나 많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주춧돌 밑에서 껍질만 남겨 놓은 빈대의 모습은 천여 년 전의 비참했던 모습을 말해 주는 듯하다. 절이 있던 곳에 가서 땅을 파 보면 조그마한 불상이 나오는데, 그곳에 있던 유물들은 근방의 절에서 가지고 갔고 지금은 허허벌판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13. 용디미와 빈대

옛날에 깊은 연못에 있던 용(龍)이 비바람이 불고 번개가 번쩍이며 날씨가 사납던 어느 날에 승천(昇天)을 하기 위하여 힘차게 도약하여 하늘로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용이 한참 하늘로 오를 때 마을에서 논에 물길을 보러 나가던 어떤 여자가 그 광경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다. 그 때 들에서 우의를 쓰고 물길을 보던 사람들이 모두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여자의 외침이 끝나자 날아오르던 용이 산의 정상(頂上)에 떨어졌다. 그러자 산 정상이 둘로 나뉘어졌는데, 이곳을 사람들은 그 때부터 ‘용디미’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이 용디미에 큰 절이 하나 생겼다. 그런데 용디미에 위치한 사찰(寺刹) 자리는 천하의 명당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그래서 그 자리를 구경하느라고 풍수를 배우는 사람들이 밤낮으로 몰려들었다.

사방으로 절터가 명당이라는 소문이 나자, 절터 주변으로 묘가 들어서기 시작했고, 절터에다가 묘를 쓰고 싶은 사람들은 스님들 몰래 절에다가 빈대를 많이 잡아넣었다.

그 후 절에는 빈대가 들끓어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스님들은 하나 둘씩 떠났고, 마침내 절은 망하여 폐허가 되어버렸다. 절이 망하자 그곳을 노리던 사람들이 그 곳에 묘를 썼다고 한다. 그 절에 있었던 일부 스님은 집현산에 위치한 응석사(凝石寺)로 갔다고도 한다.


14. 유학산 빈대 절 터

아주 오랜 옛날, 건립 연대도 사찰 이름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쉰질바위 밑에는 조촐한 절이 있었다. 절의 건립 당시에는 스님도 제법 많아 법당에는 염불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불공을 드리는 신도들의 왕래로 조용한 가운데도 활기에 차 있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시주하던 신도들도 차츰 줄고 그 많던 스님들도 하나 둘 절을 떠나 종국에는 노스님이 혼자서 절을 지키게 되었다.

이렇다 보니 노스님은 자신이 먹을 식량까지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노스님은 매일같이 여러 마을을 다니며 시주를 받아야 했으므로 이런 나날이 계속되자 수행을 하고 도를 닦을 시간도 없게 되었다. 하루는 동냥에 지친 몸으로 절에 늦게 돌아온 노스님은 고단함을 참고 공양을 드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네 정성이 가히 불쌍하구나. 내일 아침 일어나 절 뒤편에 바위에 구멍이 난 곳을 살피면 쌀이 나올 것이니 한 사람의 연명에는 족할 것이다. 그 쌀로 너는 절을 지키고 수행에 정진하도록 하여라.”

하고 일러 주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잠이 깬 노스님은 날이 밝기를 기다려 절 뒤편의 바위 절벽으로 가보니 과연 부처님이 꿈에서 이른 대로 절벽 밑에 뚫어져 있는 작은 구멍에서 쌀이 솔솔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쌀을 받으니, 정확하게 한 사람 몫의 쌀이 나오고는 딱 멈추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어 노스님은 끼니때마다 마치 뒤주에서 쌀을 내어 밥을 짓듯 바위 구멍에 가서 쌀을 받아 매일의 식량을 해결하게 되었다. 이렇게 양식 문제가 해결되자, 스님은 시주를 받으러 마을에 나가는 것을 그만두고 부처님의 지시대로 수도에 전념하여 오랜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조용하기만 했던 절에 세 사람의 신도가 불공을 드리기 위해 찾았고 며칠 동안 절에 묵게 되었다. 그런데 끼니때가 되자 노스님은 걱정이 생겼다. 바위 구멍에서 나오는 한 사람 몫의 쌀로는 네 사람의 밥을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저녁 지을 쌀을 받으러 간 노스님은 더 많은 쌀을 나오도록 하기 위해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로 바위 구멍을 후비고 쌀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기다리던 쌀이 아니라, 흰 빈대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빈대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해서 나와 절을 침범하고 절 구석구석에 들끓게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불공이 중단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빈대 때문에 견딜 수가 없어 신도들도 절을 떠나고 말았다. 홀로 남은 노스님은 쌀 구멍에서 더 이상 쌀이 나오지 않아 굶주리기도 했지만, 더 큰 문제는 들끓는 빈대를 견딜 수가 없어 절에 불을 질러 모두 태워 버리고 절을 떠나 버렸다. 이런 사연 때문에 사람들은 이곳을 ‘빈대 절 터’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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