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병원은 오래된 병원이다.
좋게 보면 역사가 있는 병원.
나쁘게 보면 구식 병원.

암센터 원장님이신 노성훈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우리나라 어떤 기업도 30년 이상 명성을 유지하며 규모를 유지, 발전하기 어려웠다고.
기를 쓰고 운영하는 기업도 흥망성쇠의 부침이 있기 마련이고 살아남기 어려운 법인데,
소위 '주인없는 병원'인 우리 병원이 이렇게 오랜 역사 동안 망하지 않고(!) 명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는가. 그것은 바로 병원 발전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쓰고 열심히 일하는 조직 구성원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한편으로는 맞는 말씀이고 감동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과연 그런걸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도 된다.
(이 반골기질! 원장님 죄송합니다!)

'나도 우리 기관을 위해 그런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그렇게 결심할 만큼 나는 순박한 사람은 아닌가 보다. 

저녁에 안산에 갔다가 연대 운동장까지 멀리 한바퀴 돌고 돌아오는 길은 이미 어둑어둑 해졌다.
안이병원 입구로 들어섰다. 세브란스병원은 오래된 병원이라 건물마다 각가 지어진 해가 다르다.
그래서 각각의 조각 조각의 병원을 연결한 계단과 다리가 매우 복잡하다.
가장 빠른 동선으로 이동할 줄 아는 것, 그것이 인턴과 레지던트 생활에서 깨쳐야 할 기본 노하우였다.

안이병원 입구에서 휠체어를 탄 할머니 그리고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아들이 나에게 길을 묻는다.

어린이병원 97병동으로 가려고 하는데 어떻게 가야 하나요?
안이병원 입구에서 거기까지 가는 길을 말로 설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실내 통로를 이용해 새병원 6층 은명대강당을 가는 길을 설명하는 것,
재활병원 가는 길을 설명하는 것 거의 불가능하다.

그냥 절 따라오세요 하는게 차라리 낫다.

그분들을 모시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층 올라와 안이병원 2층에서 암센터 지하 1층을 경유하여 다시 엘리베이터를 탄 후 암센터 3층에서 어린이 병원으로 연결되는 다리를 지나 제중관 4층을 거쳐 어린이 병원 3층 엘리베이터를 타는 곳까지 그분들을 안내하였다. (아무도 알아먹을 수 없는 설명이다)

뒤에서 하시는 말씀이 들린다.

방금 안과 진료를 봤는데요. 아무리 기다려도 모시로 오시기로 한 분이 안 오셔서요.

어둑어둑 해져서 외래 복도의 불도 꺼져있다.
얼마나 기다리셨는지 모르지만, 어쨋든 환자 이송을 도와주시는 분은 못 오고 계신다.

다 이유가 있다.
밤 늦게 안과 협진을 볼 수 밖에 없는 이유
협진을 보고 나서 제때 자기 병실로 돌아가기 어려운 이유
이송반 직원이 시간 맞춰서 일을 못하는 이유

조각조각 이어진 조립형 병원구조가 부끄러운 것은 아니지만 불편하기는 하다.
그런 하드웨어가 주는 불편함을 극복할만한 소프트웨어가 있어야 환자들이 불만스럽지 않을텐데...
뭔가 조금은 불편해도 그걸 해소할 만한 더 나은 뭔가가 있다면 소소한 불편함을 상쇄시킬 수 있다.

다만 아픈 사람은 한번의 사소한 실수와 불편함도 오래 기억하게 된다.
인생의 취약한 시기이기 때문에.
이렇게 늦은 밤 병원을 한번 헤매고 나면 우리 병원에 대해 좋게 이야기하기 어려울 것 같다.

새 암 병원이 세워지면 본관과 암병원을 연결하는 통로는 지상 1층에 있지 않고 제중관을 경유하게 된다고 한다. 길고도 먼 미로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환자는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기에 이제 소비자 의식이 너무 높아져 있다. 그 요구와 욕망을 모두 충족시키기에.

건물이 좀 낡았어도
시설이 좀 낙후되었어도
병원이 좀 불편해도 **** 만 보장된다면 환자들은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가  과연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일이 중요하다.

그러나 어쩌면 ***가 충족되어도 환자들은 더 많은 기대를 하고 좀 더 편리하기를 바라고 좀 더 환자 중심의 병원이 되어주기를 바랄 것이다.

무엇을 얼마만큼 더 맞출 것인가 그걸 고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료의 본질, 의료의 철학이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가 그 기준을 정하고 그 기준을 갖추었다고 생각하면, 그리고 우리 스스로에게 자신있다면, 좀 불편하더라도 감수하시고 저희를 믿어주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싶다.

물론 난 아직 그럴 자신이 없다. 자신할만큼 갖춘게 없으니까.
그렇지만 최소한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웨어로 승부하고 싶다는 오기는 생긴다.
하드웨어는 이미 포화상태에 달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 시내 암 환자를 주로 보는 빅5 병원 모두에서 작년부터 진료수익이 감소하고 있다고 한다.
하드웨어로 승부할 수 있는 시기는 끝난 것 같다. 성공적인 소프트웨어 아이템에 대한 의견은 분분한 것 같다.

대한민국에서 병원이 갈 길, 참 멀다.

내가 갈 길도 참 멀다.
내가 비록 앞에서 줄을 끌어당기는 리더는 아니지만, 뒤에서 발목잡는 사람,
소소한 핑계를 대며 될 일도 안되게 하는 소인배는 되지 말아야지. 

진짜 솔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 병원을 걱정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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