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 통합진료과 박원서 선생님과 함께 시작한 핑크 브로셔 프로젝트.
전이가 되어도 생존기간이 긴 유방암 환자들을 위한  특별 프로그램이다.

우리 유방암 환자들이 치과를 갈 때는 우리가 만든 핑크 브로셔에 환자 정보와 의뢰 사유를 기록하여 환자가 치과에 들고가서 접수처에 제시한다. 그 종이를 가지고 온 환자는 critical pathway로 관리되고 검사, 진료를 받게 된다. (한 마디로 이 종이를 가지고 가면 VIP가 되는 것이다!) 

3.

이런 Critical pathway를 개발하게 된 이유는

1. 전이성 유방암 환자의 치료 과정 중에 치아/치주 문제가 발생하는 비율이 생각보다 높아 정작 유방암 치료과정을 방해하고 치료가 제대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구강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예후가 나쁜 암은 사실 지금 치과문제가 중요하지 않다. 암을 치료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나 전이성 유방암은 예후가 좋다. 전이 후에도 생존기간이 길다. 생존기간이 길어지는 동안 삶의 질이 잘 유지되는 것이 보다 중요한 집단이다.

2. 전이성 유방암의 코스를 보면 궁극적으로 전체 환자의 70% 이상 뼈전이가 발생하게 된다.  이 때 반드시 bisphosphonate 제재를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이 약을 쓰던 중에 발치를 하게 되면 잇몸뼈가 아물지 않는 턱뼈괴사 Osteonecrosis of Jaw (ONJ) 라는 치명적인 합병증이 발생한다. 발생빈도는 전체 사용자 중의 1-2% 정도라고 보고 되어 있지만, 임상연구기간 보다 훨씬 오랜 기간 이 약제를 쓰고 있는 유방암 환자에서는 발생 빈도가 좀 더 높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뼈가 노출된 채 상처가 아물지 않으니 입안의 음식물과 뼈가 바로 접촉하게 되고 찾은 감염과 통증의 원인이 된다. 또한 노출된 뼈가 비강 구조와 연결이 될 경우 뇌와 위치가 가깝기 때문에 뇌 감염이 우려된다. 암튼 턱뼈괴사가 발생하면 더 이상 항암치료는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꼭 써야 하는 약인데, 발생율이 높지는 않아도 생기면 대박이다. 그래서 Bisphosphonate 제재를 사용하기 전에 가장 빠르고 간편하게 치과진료를 보고 발치가 예상되는 치아에 대해 미리 조치를 한 후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3. 항암 치료 자체도 구강 내 위생과 감염, 구강건강을 위협하는 요인이 된다.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발치 이외에도 점막염도 흔하고 사랑니 충치, 신경치료, 치주염 등등 각종 치과적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는다. 나도 그렇지만 환자들이 치과는 참을만큼 참다가 가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를 많이 키워서 병원에 간다. 그래서 조기에 치료하면 간단한 것을 방치하여 공사가 커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구강 건강상태가 별로 나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항암치료를 함으로써 쉽게 상태가 악화되고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기 쉬운 상황이 된다. 그래서 뼈전이로 Bisphosphonate 제재를 쓰는게 아니더라도 항암치료를 예상하는 환자라면 본격적인 항암치료 전에 치과진료를 보는게 필요하다.

치과도 전문분야가 잘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환자를 의뢰하면 치과 내 전문 분과 별로 환자를 진료하게 된다. 좋게 보면 다면적 전문적 진료가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지만, 나쁘게 보면 환자가 정작 자기에게 중요한 암치료 이외 추가적인 검사, 치료를 과도하게 받게 되는 상황도 발생하게 된다. 치과와 종양내과 관계가 그다지 유기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정작 주치의도 환자에게 어떤 프로세스로 치과 진료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전이성 암환자라는 특수성을 감안하여 치과 진료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 모든 문제의식을 통합진료과 박원서 선생님이 공유해주셨고, 선생님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여, 우리는 critical pathway를 만들어 보기로 결정하였다. 통합진료과 오송연 선생님도 결합하게 되었다. 아직은 시스템적으로 아주 공고화된 것은 아니지만, 지난 4월초부터 유방암 환자가 치과를 갈 핑크 브로셔를 가지고 가서 검사, 진료를 받기 시작하였고 진료 결과에 대해 우리는 2주에 한번씩 만나 환자 케이스별로 논의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일을 시작한지 이제 2달이 되었다.  치과 선생님이 항암치료의 원리, 과정, 표적치료제, 호르몬치료, 예후, 유방암의 subtype 이런 사항들을 잘 모르고 환자의 치과 진료를 해 오시던 것처럼, 종양내과인 나도 환자의 입안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앞으로 어떤 문제가 추가적으로 생길 가능성이 높은지, 그것이 치료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모른채 환자를 치과에 의뢰하기만 하고 나몰라라 했었다.

2주에 한번씩 통합진료과 선생님들과 환자 케이스 토론을 시작하였는데, 모임을 거듭할수록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환자들의 구강상태가 너무 좋지 않다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조만간 어떤 문제가 생길지에 대해서도 설명을 듣게 되었다. 그렇게 치과 정보를 이해하고 환자를 진료하니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된다. 환자들도 아주 좋아한다. 잘 발전시키고 싶은 프로젝트이다.


놀라운 것은 치과 엑스레이를 보고 있으면 환자들의 삶이 모두 입안에 다 녹아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환자를 진료하다보면 이 환자의 삶이 얼마나 어려운 상황인지, 암치료 이외 다른 문제들로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환자에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못하고 속전속결로 진료하는 내가 감히 그 몇분의 시간 동안 환자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도 있는,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그에게 아무 도움도 안되면서 상처만 건드리게 될 수도 있는 그런 질문을 던질 자격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그저 마음으로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런데 그들의 구강 엑스레이 사진을 보면 문외한인 내가 봐도 치아 문제가 심각하고 잇몸 상태가 좋지 않음을 알 수 있는 환자들이 많다. 그들에게는 음식을 씹고 먹는 행위가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다. 그녀에게 아무리 식욕촉진제를 주어도 몸무게가 늘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치과 선생님은 치아마다 붙어있는 번호를 들먹이며 엑스레이를 가리킨다.
몇 번 치아는 뭐가 문제고 앞으로 어떻게 될것 같고 지금 꼭 치료해야 하는 치아는 몇 번이고
이 환자는 스켈링만 하면 될 것 같고 이 환자는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으니 그냥 정기적으로 점검만 하고

그렇게 한명 한명 치과적 문제와 대안을 토론하면서 치과선생님은 모르고 있는 내 환자들의 삶과 병이 오버랩된다.
어떤 본질이 존재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가보다. 환자의 치아를 통해 삶의 과정을 유추해 보게 된다.

 프랑스 사회학자 미셀 푸코는 1990년대 중반에 치아와 권력이라는 책을 썼었다. 그 책의 포커스는 치의학이라는 학문의 발전이 사회권력 혹은 미시권력의 작동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의 입안에는 미세권력 (micropolitics)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 확실한 것 같다. 치아는 참으로 계급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아련히 잊어버렸던 단어, 치과 엑스레이를 보면서 그 '계급'이라는 단어가 문득 떠오른다. 

치아/잇몸 상태가 너무너무 나쁜 그녀. 한번도 치과에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이제 이가 몇 개 남지도 않은 그녀의 엑스레이는 노곤한 그녀의 삶을 유추하게 해준다.
환자들은 의사가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는 무수한 불편함을 감수한 채 치료받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우리 핑크 브로셔 팀이 적절한 치과적 intervention 을 통해 전이성 유방암 환자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주고  이들에 걸맞는 프로그램을 잘 개발하여, 좋은 모델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너무 힘들고 아프기 전에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이차 예방적 성격을 가진 프로그램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인것 같다.
박원서 선생님, 오송연 선생님, 같이 화이팅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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