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세 할아버지, 몇달째 허리 아픈게 낫지 않아 신경외과로 오셨다. 아픈 곳을 중심으로 척추 MRI를 찍어 보니 척추 곳곳에 전이가 된 암병변이 의심되었다. 그 중 일부 척추에 골절이 오면서 신경이 눌렸는지 다리도 저리고 걷지도 못하고 진통제를 써도 통증이 조절되지 않았다.

한두군데 병이 있는게 아니라 너무 병변이 넓어서, 속히 원발암을 진단해서 원인이 되는 암에 따라 항암치료를 하는게 필요하였다. PET-CT에서 뼈 이외의 다른 곳은 이상한 곳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뼈에서 조직검사를 하였다. 뼈 조직검사는 딱딱한 뼈에서 칼슘을 빼고 조직을 처리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다른 조직검사보다 조직을 처리하고 염색하여 결과를 보는데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 아프고 힘들지만 어쩔 수 없이 이상이 보이는 뼈에서 조직검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는 심장이 아주 크다. 그리고 고혈압도 있고 부정맥도 있어서 항응고제를 드신지 꽤 오래되었다고 한다. B형간염 보균자도 아닌데 간경변이 있는 것은 술을 많이 드신 것 때문인것 같다. 동반 질환이 꽤 무시무시하다. 항응고제를 드시기 때문에 조직검사를 하려면 쿠마딘을 끊고 헤파린으로 전환하여 수치를 유지하다가 조직검사하기 전에 약을 끊고 조직검사를 해야 한다. 출혈성 위험과 혈전의 위험이 공존한다. 조직검사를 하고 나니 다행히 검사한 곳은 괜찮은데 잇몸에서도 피가 나고 핏빛 가래를 뱉으신다.

할아버지, 머리도 디게 좋으신거 같아요. 검사받은거, 결과 별 세세한 걸 다 기억하고 계시네요.

그렇게 조직검사를 기다리는 동안 진통제를 아무리 올려도 통증이 조절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원발 암을 아직 진단하지 못했지만 암이라고 간주하고 방사선 치료를 시작하였다. 방사선 치료를 하니 이제  배도 살살 아프고 기운도 떨어지기 시작한다. 원래 방사선은 암성 통증을 조절하는데 아주 효과가 좋은데 할아버니에게는 효과가 없다. 조직검사 결과가 나오는대로 항암치료를 하려고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검사 결과가 복잡한지 빨리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는 사이, 할아버지의 허리 통증은 너무 심해져서 이제 걷지도 못하게 되었다. 운동기능에 장애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방사선 치료를 중단하고 아픈 부위를 수술하기에 이르렀다. 동반 질환이 많기 때문에 수술하기 전에 챙겨야 할 것도 많다. 또 수술 준비를 위해 심초음파 검사도 하고 피검사도 다시 해서 협진을 해결해야 한다. 뭐 하나 할려면 걸리는게 너무 많다. 그렇게 검사를 다니는게 할아버지는 너무 힘들다. 통증 때문에 입이 바싹 말라 말씀도 제대로 못 하신다.

다행히 수술 후 경과가 좋다. 일단 통증이 해결되었다.
보조기를 하고 앉을 수도 있게 되었고 식사도 잘 하시게 되었다.

뼈조직검사에서는 여러가지 염색을 해 보더니 소화기 기관에서 유래한 암일 가능성이 높다며 장에 대한 내시경을 해보라고 하였다. 위내시경, 장내시경을 해야 했다. 조직검사를 할 수도 있으니 또 다시 와파린을 끊고 헤파린을 연결하였다. 정말 너무 많은 검사, 그리고 검사를 위한 다른 검사, 검사를 위한 준비를 하느라 시간이 흘러간다.

보통 암이 의심되면 필요한 검사를 한꺼번에 쫙 하고 결과 나오는 것을 기다려 1주일 안에 진단하고 치료를 시작하려고 노력한다. 저에게 1주일의 시간을 주세요. 그리고 나서 검사를 다 하고 나면 종합해서 설명드리고 치료계획과 병의 예후에 대해서도 설명드릴께요. 그렇게 말했지만 2주가 넘었는데도 여전히 원발미상암 때문에 검사가 반복된다.

힘든 할아버지를 데리고 각종 검사를 다하였다.
그리고 결론은 여전히 원발미상암이었다.

폐암인지 대장암인지 위암인지 그렇게 진단되는 것이 아니라, 원발 병소를 모르는 그런 암인 것이다. 암환자 중 4-5%의 환자는 온갖 검사에도 불구하고 원발미상암으로 진단을 받는다. 어디선가 암조직이 발견되어 암은 진단이 되었으나 그 원발 부위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할아버지가 그런 경우에 해당하였다.

충청도 할아버지, 무시무시한 병은 많아 보여도 정작 당신은 별 불편함없이 잘 지내셨다. 때 되면 농사짓고 때 되면 거두어 들이고. 그에게는 두 아들과 세 딸이 있었다. 다들 넉넉해 보이지는 않는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지만, 아버지 병이 진단되었으니 가족이 다 모여 한번 주치의 설명을 들었으면 좋겠다고 의견을 전달하였다. 할머니는 우리가 들으면 된다고, 자식들 먹고 살기 힘들고 바쁘다고 싫어하셨다. 그래도 난 가족을 모았다. 토요일 오후 직계 가족 10명 정도가 모였다. 이렇게 검사를 많이 하게 된 이유, 치료를 빨리 시작하지 못한 이유 등을 설명드리고 사진도 보여드리고 동반 기저 질환들 때문에 앞으로 항암치료를 하게 되면 남들보다 훨씬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치료 제대로 하지도 못한 채 합병증으로 고생하실 가능성이 높다고 어쩔 수 없이 경고성 발언을 해야만 했다.

원발미상암은 보험이 되는 용법이 한가지 뿐이다. 5FU와 Cisplatin.

아주 고전적인 항암제이다. 이 치료를 하다가 나빠지면 보험이 되는 약제가 없다. 비보험으로 항암치료를 하면 항암제 비용이 50배 이상 많이 든다. 그리고 예후도 별로 좋지 않다. 그래서 지금으로서는 할아버지의 예후를 낙관할 수 없다고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그러니까 이번에 컨디션이 좋아져서 퇴원을 하게 되면 온 가족이 힘을 합쳐 우리 할아버지랑 여행도 다니고 할아버지 댁에 방문도 자주 하시고, 원없이 효도하셨으면 좋겠다고 주제넘은 코멘트까지 하였다.

가족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내 설명을 듣고 헤어져 대책회의를 하셨다.
원발미상암이라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진단명을 이해하기 어려워 하신다.

막내딸이 묻는다.
진단명이 뭐 그래요?

할아버지는 자기 병이 암이라는 것만 아신다. 할머지가 그 외는 설명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신다. 저래뵈도 마음이 너무 여린 사람이라고, 일단 치료 시작하고 나중에 상태 안 좋아지면 그때 얘기해 달라고 하신다. 시골할머니. 내가 무슨 설명을 하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신다. 나 못알아 먹으니, 알아서 치료 잘 해달라고 말씀하신다. 애처럽게 늙은 남편을 바라보는 할머니께 이 암의 특징이 어떻고 어차피 완치되지 않는다면 암으로 사망하실 수도 있고 동반 질환이 악화되서 돌아가실 수도 있으니 지금 진단과 함께 관련된 설명을 하는 것이 환자에게 필요할 수 있다는 고지의 의무를 무작정 강요할 수 없었다. 결국 그냥 스리슬쩍 치료를 시작하였다.

항암치료 이틀째, 할아버지는 항암제 맞고 나니 컨디션이 더 좋다고 하신다. 허리도 안 아프고 잠도 잘 오고, 하루하루 명랑해지신다.

할아버지, 통증이 조절되니 얼굴도 안 찌뿌리시고 좋아보여요. 할아버지 옛날에는 아가씨들한테 인기 많았겠어요.


그 말이 아주 마음에 드셨나보다. 내 진료 지침에 아주 잘 따라주신다. 항암치료를 받는 하루 종일 자기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잘 보고하신다. 지금 생각해보니 옛날에 무슨 검사를 했었는데 그때 결과가 어떻게 나온 적이 있다며, 그것이 지금 병이랑 관계가 있는 것인지도 물으신다. 공식 병원 기록은 없지만 할아버지의 의무기록 기억능력이 탁월하시다. 별 말씀이 없으신 분인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할아버지, 머리도 디게 좋으신거 같아요. 검사받은거, 결과 별 세세한 걸 다 기억하고 계시네요. 

할아버지는 그 말도 아주 마음에 드셨나 보다. 주치의로서 이제 겨우 신뢰를 만회한 것 같다.

어제 퇴원 예정이었는데,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차는 것 같다고 하신다. 엑스레이에서 심장이 약간 커져 보인다. 수액을 다 끊고 이뇨제를 드렸다. 할아버지 퇴원을 위해 가족들은 대책회의를 해서 병원에서 퇴원시킬 사람, 차로 충청도까지 모실 사람, 퇴원 후 자식끼리 돌아가면서 주말마다 할아버지를 방문할 방문 시간표. 이런 것들을 다 준비하셨다. 한번 퇴원이 미뤄지니 다음 퇴원은 둘째 사위가 직장에서 휴가를 낼 수 있는 날로 정해야 한다.

병원 입원 일수가 길어서 병원비도 많이 나오고 병원 생활도 지겹고...
나도 장기 입원환자가 있으면 부담스럽고 오랜 병원 생활로 인한 합병증도 걱정되고...

그렇지만 할아버지가 갖고 있는 위험요인을 생각하면 장기입원을 감수하고 안전하게 치료하고 퇴원하는게 좋겠다. 항암치료 성적도 별로 좋지 않은 암을 치료하면서 괜히 합병증으로 고생하게 하고 싶지 않다. 내 예상보다 치료반응이 좋기를 바라지만 그렇지 않을 반대상황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괜히 항암치료 했다는 생각 안 들게 안전하게 치료하는게 중요하다.

이미 재원일수가 30일이 넘어 장기재원환자로 등록되었지만, 조급하게 퇴원하지 말자고 하였다.
내가 병동의 다른 환자들한테는 하루라도 빨리 퇴원하시라고 하는 걸 지켜 본 할아버지는 자기가 VIP 라는 걸 아신다.

내가 VIP 로 챙기는 이유는 위험요인이 많은 환자이기 때문이라는 건 모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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