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왜 저만 이런 병에 걸려서 이렇게 힘든 치료를 받는 걸까요? 저는 열심히 산 죄 밖에 없는데요…”

외래에서 이런 질문을 흔히 받는다. 특히 암을 진단 받은지 얼마 안되는 초보 암환자 일 때 이런 질문을 많이 받는다.

“본인이 뭘 잘못해서 암에 걸린 것 아니구요, 제 외래에는 더 안 좋은 분들도 많이 있으세요. 자꾸 안 좋은 방향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고, 그래도 아직 쓸 수 있는 항암제도 많이 남아 있고, 체력도 괜찮은 편이니 항암치료를 더 해봅시다.”

보통 외래에서 이런 대답을 드리지만, 나는 안다. 이런 류의 대답이 그다지 위로가 되지는 않는 다는 사실을….

그런 질문을 할 때의 환자분 마음상태에서는 어떠한 대답을 하더라도 위안이 되지 않는다. 내가 하는 말이 환자분의 마음에는 피상적으로만 와 닿아서 환자분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떠한 말을 하더라도 환자분의 마음에 와 닿진 못한다. 내가 말을 잘 못해서가 아니라 환자분의 마음이 닫혀 있기 때문이다.

암에 걸리고 나면 힘이 든다. 암을 진단 받았는데, 힘들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것 아니겠는가. 문제는 이 힘든 마음의 짐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가장 일반적인 반응은 고통의 원인을 찾아서 이를 없에려는 시도이다. 암을 진단 받고 난 후에 내가 도대체 왜 암에 걸렸을까 하고 생각해 보는 것이 첫번째 반응인데, 대체로 이러한 시도는 효과적이지 못하다. 암의 이유가 너무나 다양해서 정확히 알기 어렵기 때문이고, 설령 알아도 시간을 되돌이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의사인 나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어서, 왜 암에 걸렸는지 모를 때가 많이 있다. 의학적인 연구 결과로 OOO이 암의 위험인자이다 라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어도, OOO이 이 환자분의 암을 일으킨 유일하고 직접적인 원인이냐 라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미 암은 걸려 있는데, 암을 일으킨 원인을 찾는 것은 대체로 암의 치료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가령 유방암의 경우, 여성호르몬이 유방암의 위험인자라는 것이 비교적 잘 알려져 있어서, 이른 초경, 늦은 폐경, 아이를 적게 낳은 것, 등이 유방암의 발생 확률을 높이는 위험 인자라는 것이 이미 다 알려져 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이미 유방암을 진단 받았는데, 과거에 초경을 일찍 했던 것이나 폐경을 늦게 했던 것이나 아이를 몇 명 낳았는지를 지금 따져서 무엇하겠는가. 과거를 돌이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초경시기나 폐경시기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이를 낳는 것도 지금 와서 조절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겠는가.

비교적 인과관계가 뚜렷한 담배와 폐암의 경우도 그러하다. 담배를 많이 피우면 폐암에 걸릴 확률이 높아지고, 담배는 폐암의 원인이다. 그러한 원인을 아는 것이 폐암 환자에게 어떤 도움이 된단 말인가. 담배가 나쁜 것을 몰라서 계속 담배를 피웠던 것인가. 담배피면 암에 걸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수십년간 계속 피우지 않았던가. 그렇다고 해서 이미 암은 진단 받았는데, 30년 전으로 돌아가서 담배를 끊으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같이 담배 피운 다른 사람들은 암에 안걸리고 지금 잘 살고 있는데 나만 왜 암에 걸렸냐는 생각을 하는 것도 쓸데 없는 생각일 뿐이다.

고통의 원인을 찾아내서 이를 없에려는 시도는 이래서 무의미 하다. 이미 암은 진단 받은 것이고, 돌이킬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를 자꾸 돌이키려 한다. 그럴 때 계속 마음이 힘들어 진다. 마음이 현재를 살아야 하는데, 마음이 과거에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오지 않은 미래에 가 있어도 힘이 든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암이 나빠지면 어떻게 하지, 내가 죽게 되면 어떻게 하지. 나중에 통증이 생기면 어떻게 하지, 이런 생각이 꼬리를 잡게 되면 마음이 또한 힘들어 진다. 암환자분들의 마음의 고통은 대부분 마음이 과거에서 뱅뱅 맴돌거나, 오지 않은 미래의 일을 걱정하느라 소진할 때에 생긴다. 이런 경우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미래를 불안해 하지 말고 오직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 내라고 이야기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말은 쉬워도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 그래서 삶이 고통이 되어 버린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고통은 고통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우리는 살면서 원하던 원하지 않던 많은 인생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단언컨대 세상에 순탄한 인생이란 없다. 남들이 보기에 탄탄대로를 가고 있는 순탄한 인생을 사는 사람에게도 물어보면 자기가 가장 힘든 삶을 산다고 이야기 한다. 명문대 나온 재벌집 자식들 중에서도 인생이 괴롭다며 자살하는 경우도 있다. 인생에는 수많은 우여곡절이 생기게 되는데,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생기는 외부의 사건으로 인하여 내 인생이 변하는 일은 수 없이 많다. 성공가도를 달리던 사업가가 갑자기 교통사고를 당하여 반신불수가 되는 일도 생기고, 한순간의 태풍이 불어와 1년 농사를 망치는 일도 생긴다. 길가다가 갑자기 날강도를 당하기도 하고,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보이스 피싱 사기를 당하기도 한다. 그게 인생이다. 내 인생에는 그러한 원치 않는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게 절대 뜻대로 안 된다. 그래서 인생을 많이 겪어온 지혜로운 어른신들은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을 경험으로 느끼게 되고, 좋은 일이 생겨도 받아들이고 나쁜 일이 생겨도 받아들이는 달관의 지혜를 가지고 계신다. 인생에서 나의 통제 영역을 넘어서는 일들은 허다하게 많다.

그리고 생각보다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많지 않다. 본디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닌 것을 붙잡고 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냐고 괴로워해봐야 상황은 달라지는 것이 없다. 이럴때 남들은 내 마음을 몰라주게 되어있다. 아니 남들이 내 마음을 알아준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내맘을 나도 잘 모르고 내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아서 괴로운데, 어떻게 남이 내 마음을 알아 준단 말인가.

내 인생에는 이러 이러한 나쁜 일이 생기면 안된다 라는 생각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지금 평균수명이 늘어나서 전국민 3~4명에 한명꼴은 암을 진단받게 되는데, 그 셋중 한명에 내가 속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생각이다. 나는 항상 건강해야 하고, 우리 부모님은 절대로 암에 걸리면 안 된다는 생각 자체가 미안하지만 잘못된 생각이다. 내가 인생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중에서 생각보다 당연한 것은 별로 없다.

그리고 인생에서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외부인자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비가 올 때에는 비를 맞아야 할 때도 있고, 비를 맞다 보면 그치기도 하고, 그런 것이 인생이다. 내가 마땅히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인식의 틀 안에 마음이 갖혀 버리면, 절대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힘들수록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말이 그래서 나오는 말이다. 불교인들이 집착을 버리니 마음이 자유로워졌다고 하는 말이나, 일체유심조, 즉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말이 같은 의미인 말이다. 기독교인들이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당신 뜻대로 하소서 생각했더니 마음이 편해지고 고통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암을 진단 받고 마음이 힘들 때 일수록 원인을 찾고 이를 제거하기 보다, 마음이 현재를 살아야 하고 현재를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 외부의 요인이 내가 원하는대로 변하면서 고통이 없어지는 일은 없다. 이럴때 한발짝 물러나서 나의 일을 나의 일이 아닌 남의 일처럼 바라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선생님 제가 왜 이런 몹쓸 병에 걸린 걸까요? 마음이 무척 괴롭네요.”

“그냥 팔자라고 생각하세요. 내가 암에 걸릴 팔자여서 암에 걸렸나 보다 하고 그냥 그런 거려니하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치료 받으세요. 안 그러면 본인만 힘들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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