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자면 현재의 시대에 있어 맑시즘이 어떤 의미를 지닐지 잘 모르겠다.  맑시즘에 기초한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한 지 20년도 넘었고, 사회주의의 변형태라 볼 만한 중국식 사회주의나 북한의 사회주의는 철저한 통제에 기반하여 자본의 본질을 더욱 추종하는 자본주의로 변화되거나, 권력세습에 몰두한 변질된 독재사회로 남았을 뿐, 시대적인 영감을 세상에 부여하는 힘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분배의 공정한 재구성이라는 면에서 보자면 남미국가들의 실험적 시도에 주목해 볼 수도 있겠지만, 맑스의 자본론이 보여주는 역사적 시나리오와 권력의 순환관점에서 보자면 남미국가들의 시도는 매우 온건하고 불완전해 보이는 면이 있다. 

 현실사회주의도 결국은 정치적 현실이었다.  맑스의 자본론은 그런 점에서 맑스자신이 예상해 본 일종의 시나리오였고, 때문에 곳곳에서 오류와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현실사회주의 속에서 노동자계급의 존중과 우대는 그리 두드러지지 않았고 오히려 계급독재와 계획경제 아래에서 고통만 수반했을 뿐이다.  폴란드 사회주의를 그린 만화 '마르지'에서 표현되는 계획경제 배급시스템은 물자부족과 역할관계에 있어 비인간성만 만들어내었을 뿐이라 묘사한다.  맑스는 노동자의 역할에 있어 전세계적 규모를 강조하였지만, 그런 바탕아래 구성된 인터내셔널은 베트남의 호치민이 이야기했듯이 자국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정책하에 고통받는 식민지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기만 했다.  시나리오의 불안정성은 자본의 악의적 본성마저도 극복하지 못했다.  맑스는 자본의 축적이 공황기를 거쳐 전세계 노동자들의 대혁명을 통해 계급의 전복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했지만, 자본의 공황뒤에 찾아온 것은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전쟁이었고, 자본은 계급의 전복없이 다시금 제모습을 찾아 이윤을 찾아 구르기 시작했다. 

현실사회주의는 붕괴했다.  냉전이라는 정치적 구도가 사라진 이후 자본은 이윤율 추구와 경쟁의 심화과정을 통해 성장을 지속하고자 했지만, 미국발 경제위기를 기점으로 그 과정은 점점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맑시즘은 다시금 주목을 받았는데 관심의 주체가 아이러니하게도 자본가들이었다.  그들은 맑시즘을 세계경제의 근본적 대안으로서 주목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윤과 권력을 유지하는데 잠시의 양보와 보폭을 조절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바라본 것이었다.  이 쯤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역사의 현실안에서도 실험으로만 끝나버렸고 현재에 와서는 근본적 변혁의 수단이 아닌 체제유지수단으로서 주목되고 있는 맑시즘은 과연, 우리에게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에릭 홉스봄도 맑시즘을 대안이 아닌 시대적 참고사항으로 제시하고 있음은 어떤 면에서는 조금 비관적인 느낌이 없지 않다.

한가지 더 생각해 볼 것은 자본주의건 맑스식 사회주의건 간에 자본의 끊임없는 순환과 생산을 전제로 유지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인간의 생존관점에서 환경이 대두되고 있고, 심각한 환경의 훼손이 명백해지고 있는 이 시대에 대두되는 환경론 앞에서 맑스의 자본론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자본주의의 파괴적 속성이 사회주의적 체제로 변환된다 해서 환경론적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맑스의 자본론이 제시하는 시나리오가 완벽하지 않다는 전제하에, 이는 어떤 변화와 응용으로 이 시대의 문제에 대입시킬 수 있는 것일까? 

에릭 홉스봄은 90이 넘는 인생 자체가 맑스주의 역사의 증언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바라볼 수 있는 시야와 통찰은 무척 넓고 깊고 광활하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은 사상의 역사적 이해가 풍부하지 않으면 읽기가 어렵다.  최소한의 기본지식을 갖추고 수준을 만들어놓아야만 그나마 쉽게 읽힐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부족하기만 한 사상과 개념적 이해수준을 가지고 이런 수준의 독후감이나 끄적거리고 있다니, 난 대체 뭘 얼마나 이해하고 이렇게 써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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