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의 수많은 에세이와 단편의 글들 중에 추려내어 엮은 이 책을 통해 나는 나를 되돌아 볼 수 밖에 없었다.  굳이 오웰의 글이 아니더라도 정말 매력적인 글을 써내는 사람들의 모습은 부러움과 동시에 나를 돌아보게 하는 기제이다.  글을 쓴다는 일은 나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느냐의 문제인데 그것을 기술적인 문제와 글로 표현할 생각의 깊이와 폭의 문제로 나누어보면 나는 이에 관한 다양한 고민들이 머릿속에서 떠오르기 시작한다.

기술적인 면은 글쓰기라는 재능으로 자연히 해결이 되거나 글쓰기 연습을 통해 채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가지는 많은 재능은 연습을 통해 어느 정도 수준은 이룰 수 있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보면 오웰의 글이 보여주는 간결하고 명쾌한 면모는 매우 매력적이다.  그것이 그만의 천부적 재능인지 노력의 산물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보여주는 문장의 모습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매우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하지만 기술적 요소가 글의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권정생 선생님의 글이 때로는 장황해지고 의미가 먼 길을 돌아오기도 하지만 그 분의 생각은 읽는 이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듯이, 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의 깊이와 폭일 것이다.  즉, 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생각이 얼마나 통찰있고 분석적이며 어디까지 경험하고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경험이 글의 깊이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  생각은 삶의 어느 순간 예기치 않은 자극과 마주하는 순간 발생한다.  생각이 작동하는 순간 그것이 얼마나 깊고 폭넓어지는가는 내가 그와 연관하여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이해하는지에 좌우되는데, 개인적으로 그런 작용을 극대화시키는 촉매는 과거와 현재의 경험이라 생각한다.  단 한번이라도 호미질을 해 본 사람만이 땅을 일구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가를 알게 되듯이 말이다.  내가 오웰의 글에서 통찰과 깊이를 존중하는 까닭은 오웰이 스스로 자초한 경험때문이다.  그 경험이 오웰 자신의 양심에 근거했다는 점에 있어 더욱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얼마전부터 나의 글은 너무 공허하기만 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의 공허감은 한때, 블로깅을 잠시 그만 두어볼까하는 생각까지도 들게 만들었지만 나는 블로그만은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고집으로 그 뒤에 애써 공허함을 감추고 있었다.  어디에 쉽게 말하기도 어려워 오랜만에 만난 블로그 친구에게 고해성사를 하듯 털어놓은게 공허감에 대한 유일한 표현이었다.  고민이 이어짐이란 원인을 찾아보는 작업이기도 하다.  나의 공허함은 그런 점에서 따져보니 경험의 부족이었다.  그리고 깊게 파고들려 하지 않는 어떤 게으름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생각과 쓰고자 하는 글은 내가 자리하고 있는 위치에서 사뭇 동떨어져 있기도 했거니와, 내 자리에서 가장 잘 쓸 수 있는 글마저도 치열함이 부족한 때문인지 경험은 금세 바닥을 드러내고 매너리즘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기술적 표현력도 부족하지만, 의미의 공허는 쉽게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생업을 잠시 접고 다른 경험들을 해볼까도 종종 생각하고 있지만, 이 역시 현실앞에서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스스로의 발목만 붙잡고 있는 나의 처지..  그런 나에게 오웰은 수많은 에세이를 통해 좀 더 삶에 치열해지기를 주문한다.  70여년전의 글들이 지금도 마음을 붙잡을 정도로 통찰과 사상이 살아있는 글을 통해, 고민하는 나를 내리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자신도 용기도 없다.  그것은 어쩌면 안일하기를 바라는 내 안의 정치성인지도 모른다.  모든 글은 정치적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나의 태도도 현실을 핑계로 자리하는 정치적 자세인지 모르겠다.  좀 더 진지하고 치열하며 경험적 기회를 만들어나가야 할 것인가..  아마도 공허감은 그렇게 해야만 해소되고 채워질 것 같긴 하지만, 난 여전히 안일함의 정치적 견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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