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국은 엄청 덥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히려 탄자니아에 있는게 피서처럼 느껴지네요. 매일 21-28도 사이에 호수 바람이 불어오는 온화한 날씨만 계속되는 곳이라 오히려 한국이 더 열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열대의학을 공부하려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게 아닌가 하는 농담을 하기도 하는데요. 어쨋든 계속되는 더위와 열대야에 쉽게 잠들지 못하는 분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준비한 기생충 이야기, 수면병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기생충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분들도 수면병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기생충 감염증 이름 치고는 조금 독특한 이름이지요. 수면병이라니. 때문에 수면병 걸리면 불면증이 없어지는 것 아니냐, 잘 잘 수 있으면 좋은 것 아니냐, 요즘 잠이 부쩍 늘었는데 수면병 감염된 것 아니냐 물어보시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하지만 수면병은 이름과는 달리 매우 치명적인 질병입니다. 그럼 수면병에 대해 좀 알아볼까요.

수면병은 혈액 속에 기생하는 파동편모충이라는 기생충에 의해 일어납니다. 여러가지 생화학적으로 독특한 특성들이 있어 유전학이나 단백질학 등의 연구에서 모델로 종종 쓰이기도 하지요. 파동편모충은 체체파리라는 흡혈파리에 의해 전파되는데요, 북위 15도에서 남위 25도까지가 체체파리가 서식하는 지역으로 아프리카에서 ‘파리벨트’ 혹은 ‘체체벨트’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체체파리와 수면병의 피해가 워낙 극심하여 마치 한국의 그린벨트처럼 개발이 불가능한 지역들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지요. 현재 전세계에서 매년 약 100,000명의 신규 감염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약 6000만명의 사람들이 감염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지요.

아프리카 파동편모충(Trypanosoma brucei)에는 크게 세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주로 동물을 감염시켜 목축업에 큰 피해를 입히고, 하나는 사람에게서 급성 감염을 일으키며, 마지막 하나는 만성 감염을 일으킵니다. 목축에 큰 피해를 입히기 때문에 단백질이나 영양 부족의 주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수면병 때문에 쓰지 못하는 지역이 450만 병방마일 - 미국 전체 지역보다 넓은 - 에 달하며, 매일 10,000마리 이상의 가축들이 수면병으로 죽어가고 있는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동물 수면병의 존재는 1917년부터 알려져 있었는데 독일의 기생충학자가 동물 파동편모충이 들어있는 혈액을 자신과 지역주민 ‘자원자’들에게 직접 주입해서 사람에게는 감염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체체파리가 사람을 물면 파동편모충이 옮겨지는데, 일단 혈액 내에 들어간 파동편모충은 분열을 시작합니다. 여기서 독특한점은 약 1% 정도의 파동편모충들은 저번 세대와는 다른 단백질 외투를 둘러 쓴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매 분열 단계마다 일부 기생충들이 외투를 갈아 입으면서 사람의 면역계는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사람의 면역계가 아무리 능률이 좋다고 하더라도 매번 갈아입는 외투를 모두 인식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렇게 사람의 면역계가 인식할 수 없는 외투가 등장하면 그때부터는 기생충의 시대가 시작되는겁니다. 면역체계는 신경쓰지 않고 번식할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혈액을 점령하고나면 림프절이나 비장, 중추신경계까지 흘러넘치게 됩니다.

증상은 파동편모충의 종류에 따라 상당히 다르게 진행되는데요, 급성 파동편모충의 경우에는 신경계로는 잘 들어가지 않지만 림프절을 붓게하고 고열을 일으키며 두통과 근육통을 동반합니다. 감염 후 몇달 안에 사망에 이를 수도 있지요. 과거 노예무역이 성행하던 시절에는 림프절이 붓는 증상이 보이면 노예가 살아남지 못할 것으로 짐작하고 배 밖으로 던져버리기도 했습니다. 목의 림프절이 크게 부어오르는 것을 윈터보톰 사인이라고도 하지요. 하지만 이 파동편모충의 경우 증상의 진행이 너무 빨라서 수면장애 등의 신경계 증상을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기생충이 멀리 침범하기 전에 감염자가 사망해버리기 때문이죠.

만성 파동편모충의 경우에는 조금 다릅니다. 중추신경계를 침범해서 ‘수면’병의 증상들을 일으키지요. 감각이 무뎌지고, 일에 싫증을 느끼게 되고, 인지력이 떨어지며, 균형감각이 나빠집니다. 혀나 손 발에 경련이 오기도 하고, 마비 증세가 일어나기도 하지요. 중추신경계에 기생충 감염이 심해지면 잠이 늘어나서 밥을 먹거나 서있다가도 잠에 빠져듭니다. 사실 잠이라기 보다는 의식을 잃는것으로 보는것이 더 옳겠습니다만. 엄밀히 말하자면 계속 수면상태에 있다기 보다는 수면 사이클이 어그러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24시간 생활 사이클이 뒤죽박죽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증상이 지속되다 보면 이제 깨어날 수 없는 잠에 들게되지요.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지 아직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합니다. 기생충이 혈액-뇌 장벽을 충분히 통과할 수 있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요, 대체로 기생충의 수가 중추신경계 안에 너무 많이 늘어나 기능장애를 일으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 이외에 정확히 어떻게 수면장애를 일으키는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수면병에는 치료제가 있기는 하지만 부작용이 많습니다. 보통 급성기 혹은 초기 단계의 치료에는 비교적 안전한 약품들이 - 손이 많기 가기는 하지만 - 몇몇 개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만성 감염이 되어 중추신경계에 기생충이 침범하면 비소계 약품을 써야합니다. 과거 사약에 들어가던 물질이 사약이지요. 기생충에게 치명적인만큼 사람에게도 많으 부작용이 있지요. 따라서 투여 받은 사람들은 비소 중독과 비슷한 증상을 보이기도 합니다. 종종 의사들이 ‘부동액에 비소를 타놓은 약이다’라고 하기도 하지요. 약품 자체의 부작용으로 사망하는 사람들이 8% 가량 됩니다만, 치료하지 않을 경우 치사율이 거의 90% 이상에 이르기 때문에 약품의 부작용을 감수하고서라도 투여하곤 합니다.

수면병은 발굽 있는 모든 가축들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소, 말, 심지어는 낙타까지도. 이슬람 제국이 한참 팽창하던 당시에도 아프리카 중남부 이남으로는 세력을 확장하지 못했는데요, 주로 낙타의 기동력에 전투력의 상당부분을 의지하고 있던 이슬람군이 수면병에 걸려 중남부 이남으로는 진출하지 못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수면병이 자연 방벽 역할을 한 셈이지요. 수면병을 옮기는 체체파리가 주로 개울가나 덤불 근처에 살아가기 때문에 수자원이 풍부한 지역이나 가축을 기르기 적합한 땅을 개발이 불가능한 상태로 묶어두고 있습니다. 이는 경제적으로는 무척 나쁜 소식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현재 생태계가 급격한 개발로 급속히 파괴되지 못하도록 제약하는 하나의 방어벽이 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즉 수면병이 사라지면 생태계가 파괴되고 중부 아프리카의 사막화가 더 빨라질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이지요.

저작권자 © 코리아헬스로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