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더위가 가시지 않았던 9월 초 대전에서 근무하는 레지던트 박 모씨의 주검이 아파트 현관에서 발견되었다.  과중한 업무를 견디다 못해 자살했던 것이다.  펴보지도 못한 채 스러진 젊은 레지던트의 죽음, 슬프고 안타까웠다.

한국 레지던트의 평균 근로시간은 약 92시간이다.  이는 평균에 불과한 수치로  레지던트 1,2 년차 및 인턴에게 업무가 더 몰리는 경향을 보면 하루에 잠자는 시간과 밥먹는 시간도 모자란 살인적인 수치이다.  '4-5년 버티고 개원하면서 빛 보지 않느냐?'라고 묻기에는 너무나 비인간적인 근로환경이다.(빛 보려다 '빚'보는 현상도 아울러 조금씩 늘고 있다) 21세기 대한민국 전공의의 삶은 18세기 산업혁명 초기의 노동자들을 연상케 할 정도로 척박하다. 다른 나라는 어떨까? 선진국에서는 이미 법으로 전공의 근로시간을 제한했다. 미국 80시간, 유럽 48시간이다. 한국은? 아직없다.

보건복지부에서는 전공의 근로시간 제한 등 전공의 수련환경에 관련된 법안을 내년에 제출할 예정이다. 하지만 이 법안이 통과되면 닥칠 후폭풍도 만만찮다. 병원협회에 따르면 전공의 근무시간을 주당 80시간으로 제한할 경우 약 4800여명이 더 필요할 것으로 추산했다. 하지만 전체 의사 중 다수를 차지하는 개원의사들은 1년에 배출되는 의사수를 늘리는데 반대할 것임이 분명하다.  개원가 포화상태라는 인식이 확산된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한가지 방책은 PA 등 전공의가 아니면서 전공의와 비슷한 업무를 하는 직업군을 만들어 이들을 뽑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부분적인 해결책일 뿐, 의료의 질 저하 가능성 문제나 병원의 인건비 증가 문제를 충분하게 해결해주지 못한다.

필자가 생각할 때, 결국 중요한 것은 가치판단이다.  전공의의 근무환경 개선이 다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이를 통해 한국의료의 질이 향상될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4-5시간 수면만 하고 다음날 일하는 사람은 운전면허 취소에 해당하는 기준치 이상의 혈중 알콜농도를 가지고 운전하는 사람과 다를 바 없다고 한다.  사람을 다루는 서비스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의 컨디션이 이러하다면, 누가 마음놓고 병원을 신뢰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보건복지부가 이러한 가치판단을 하려면, 무엇보다 병원 의료서비스의 질적 지표를 중요시 여겨야 할 것이다.  영아사망률 등의 객관적 지표도 좋지만 환자의 '만족도 평가' 같은 지표들이 더 중시되어야 한다고 본다.  진단이 치료에 선행하는 것처럼, 의료서비스의 질적지표가 한국의료의 병을 진단해 줄 것이라고 믿는다.  박테리아가 감염의 원인임을 알지 못했던 시절에는 환자의 몸에서 피를 빼는 희한한 치료가 대세였다. 감염병의 근대적 치료는 미생물의 발견 후에야 가능했던 것처럼, 한국의료의 고질병을 치료하려면 의료의 질적문제가 심각하다는 인식개선이 전제되어야 당연할 것이다.(또한 의료의 질적 개선은 전공의 등 의료서비스 종사자의 근무환경 개선으로 이룰 수 있다는 인식개선도 중요하다)

개인적으로 예측하기로는, 전공의 근무환경 개선으로 증가하는 의료비용은 돌아돌아 정부가 부담해야 할 것이고- 이는 결국 국민의 부담으로 지워질 거라는 생각이 든다.  세금인상이 인기 없는 정책이라는 건 알지만, 굴비 쳐다보며 흰쌀밥만 먹고 산 자린고비 이야기를 생각해보라! 돈은 아낀다고 능사가 아니라, 써야할 곳에 쓰는게 현명하다.  또 이를 통해 서비스 고용이 증진된다면, 이는 비용이 아니라 오히려 투자가 아닐까? 국민에게 환영 받는 정책이 결국은 포퓰리즘의 낙인이 찍힌채 실패하기도 하고, 처음에는 환영받지 못하는 정책이었지만 결국 국민들이 알아주는 정책도 역사속에 얼마든지 존재한다. 의료의 질향상을 통해 국민의 행복지수를 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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