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을 드렸던 내 마음

75세 이상 연세가 많으신데 항암치료를 꼭 해야 하는 분들
신장기능이나 심장기능이 좋지 않아 갑작스럽게 상태가 나빠질 수 있는 분들
평소 만성질환으로 전신상태가 좋지 않고 병세가 위중하신 분들
그런 분들께 명함을 드려 왔다.

암 치료의 긴 여정에는 늘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병이 나빠지면서 그러는 것이니 어쩔 수 없는 경우도 많지만, 애를 써서 위기상황을 극복하면 또 소중한 삶의 시간이 주어지기도 한다. 나는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그 회생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싶었다. 그런 내 욕심에 명함을 드렸다.

환자들은 자기 주치의 명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위로를 얻는 것 같았다. 급한 일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하는게 좋을지 모르겠을 때, 그 누군가에게, 특히 의료진에게 연락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지난 3년간 나는 이렇게 위중한 환자들에게 명함을 드려 왔는데, 환자들은 생각보다 별로 연락을 많이 안하시는 것 같았다. 나의 처지를 배려해 주시는 것 같다.

지난주 검사를 하고 왔는데 결과를 미리 알려줄 수 없겠느냐, 입원 일정이 연기되고 있는데 빨리 입원하게 해달라, 이런 문자를 받았을 때는 솔직히 기분이 나빴다. 이런 푸쉬를 받으려고 전화번호를 알려드린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지난 3년간 2-3번 정도에 불과하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전화를 직접 한 것도 아니고 문자를 보낸 건데 뭐….

그녀는 항암치료를 해도 별로 좋아지지 않았다. 단 한번도 약제에 좋은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나빠지기만 했다. 그러는 와중에 자꾸 혈전이 발생해서 폐정맥이 막혀 숨이 차기도 하고 다리 정맥이 막혀 다리가 퉁퉁 붓기도 했다. 케모포트를 넣은 쪽 팔 혈관이 다 막히는 바람에 심장으로 혈류가 흐르지 않아 얼굴이 퉁퉁 붓기도 했다. 주사약을 쓰면 괜찮은데 먹는 약을 쓰면 다시 혈전이 재발하였다. 혈전 때문에 늘 조마조마 하였다. 매번 응급실행이었다.

그 분이 중환자실에서 혈전용해제를 쓰고 퇴원하시던 지난 겨울, 내 명함을 드렸다. 그 이후로 다시 항암치료를 시작했지만 병은 꾸준히 나빠지고 있다. 이제 쓸만한 항암제가 없는 상황이다. 나빠지는 정도가 심하지 않아 최근에는 항암치료를 하지 않고 그냥 경과관찰만 하고 있다. 무리해서 효과도 별로 없는 항암치료를 계속 하는 것보다는 좀 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때 호스피스와 임종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야기 했었어야 했을까?

몇일 전, 외래를 보는 중에 남편에게 문자가 왔다. 환자가 아침에 갑자기 가슴이 아프다며 쓰러져 집 근처 병원 응급실로 왔는데 지금 심폐소생술을 하고 있다는 문자였다. 그날 나는 하루 종일 외래를 보는 날이라 전화를 할 여력이 없어 레지던트를 시켜 그쪽 병원 상황을 알아보게 하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마 또 혈전이 생겨서 심장주위 관상동맥이 막힌게 아닐까 짐작되었다. 내가 직접 전화를 할 수도 없었고 설령 전화를 해 봤자 도움이 될 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남편은 2-3일이 지나 환자가 사망했다는 소식과 함께 나를 원망하는 내용의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또 몇일이 지나 나에 대해 분노하고 있다는 문자를 보냈다. 몇일 간격으로, 또 한번 오면 몇분 간격으로.

그들 부부는 금술이 좋았다. 늘 함께 외래에 오셨다. 치료가 잘 되지 않는데도 나를 잘 믿고 따라주었다. 긍정적으로 살려고 열심히 노력하시는 좋은 분들이었다. 부인을 잃은 남편은 주치의인 내가 자기 부인의 마지막을 책임져주지 않은 것에 대해 원망하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려고 한다. 한번 얼굴 보고 이야기하면 좋을 것 같은데 문자를 자꾸 보내신다.

그런 문자를 자주 받게 되니 나도 힘들다. 하필이면 요즘 다른 환자로부터 그런 원망성 문자를 자주 받고 있다. 나를 욕하는 내용도 있다. 입원하게 해달라는 문자도 많이 온다. ‘지금 힘든데 어떻게 할까요’ 그런 상의가 아니라 ‘입원장 발급해주세요’ 그런 명령조의 말투도 나를 거슬리게 한다. 

 나는 진료실에서 미쳐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으로 나의 블로그를 이용한다. 누구나 비밀글 형식으로 글을 올려 관리자인 나만 볼 수 있게 질문을 할 수 있다. 우리 환자들이 자기 이름과 병원등록번호를 밝히고 질문을 하면 나는 EMR로 환자 정보를 확인한 후 답변을 한다. 외래 시간이 너무 짧으니 이렇게라도 환자들과 소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암이라는 병 자체를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만, 병과 관련된 증상, 치료와 관련된 증상, 부작용도 다양하고, 치료기간이 길어지면서 생기는 경제적, 심리적 어려움 등도 만만치 않다. 한번 외래에 40-50분씩 시간을 할애하며 진료하는 외국 시스템과 비교하면 뭐하겠나. 나는 5분 진료의 한계를 블로그를 통해 극복하고 싶었다. 전체 시스템적인 해결책은 아니지만 난 최소한 내 환자를 진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었다.

블로그에는 매일 암환자를 진료하면서 느끼는 나의 고민을 담은 글을 올리기도 하는데, 환자들이 그걸 읽으면서 의사인 내 입장을 잘 이해해 주는 것 같았다. 내가 보험회사 소견서를 쓰면서 왜 열을 받는지, 왜 환자가 돈을 내겠다고 해도 비급여 약제를 못 쓰는지, 러시아 환자에게 40분 이상 진료시간을 할애하는 것에 대해 왜 열을 내는지, 왜 병이 나빠지는데도 치료하지 않는지, 왜 미리 검사하지 않았는지 등등. 사회제도적인 것에서부터 의학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내가 암환자를 진료하며 느끼는 어려움, 갈등을 일기처럼 블로그에 기록해 왔다. 그들은 나의 고백(!)에 동참하여 나의 상황과 심정을 이해해주는 것 같다. 그래서 나의 약처방에 실수가 있어 수납을 다시 하고 약 처방전을 다시 받게 되어도 실수를 눈감아 주는 것 같았다.

환자들의 이야기를 사례처럼 기록할 때는 특별히 주의를 많이 기울인다. 환자 사적 정보가 공개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환자와 찍은 사진을 올릴 때는 미리 양해를 구하기도 하고 블로그에 글을 올려도 되냐고 미리 묻기도 한다. 그렇게 주의한다고 하면서 글을 쓰고 있는데 최근에 올린 글 하나가 문제가 되었다. 환자 자신은 괜찮다고 했지만, 환자를 알고 있는 주위 사람들과도 관련이 있어서 글을 삭제하게 되었다. 내 블로그에 올린 글을 지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여기저기 연락을 해서 관련 글을 다 삭제해 달라고 부탁을 해야 했다.

그래서 요즘 나는 아주 많이 소심해져 있는 상태이다.

환자를 위해서, 소박한 마음으로 실천했던 일들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몇가지 경험을 하고 나서 그렇다. 여기저기서 욕 먹고 싫은 소리 들어도, 내 환자에게 만큼은 최고의 의사가 되고 싶었는데, 정작 환자들에게 원망을 듣고 후회되는 일들이 생기고 보니 새삼 내 자질이 의심되고 부질없다는 생각도 들고 그렇다.

블로그에 글을 쓰지 않은지 3주가 지나가고 있다.
블로그에 글을 쓰지 않으니 환자에 대한 마음도 멀어지는 것 같다.
어떤 인간관계에서든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너무 뜨겁지 않은 마음으로, 너무 썰렁하지 않은 마음으로, 너무 심각하지 않은 마음으로 환자를 대할 수 있는 의사가 되기 위해, 지금 배움과 고행의 시간을 겪고 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엊그제 SNS로 한 선생님께 메시지를 받았다. 우리병원에서 치료받다가 집이 지방이시라 댁 근처 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으시는 환자를 만났는데, 그 환자를 진료하신 후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셨다. 나를 좋은 의사를 기억하는 환자들이 있으니 힘내시라는 격려의 메시지.

이제 많이 쉬었으니 힘 낼 때가 온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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