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녀의 원래 주치의가 아니었다.

원래 선생님의 형편 상 내가 항암치료 뒷 부분의 두세번 진료를 봐 드린 것이 전부이다.
그래서 최초에 어떤 연유로 유방암을 진단받게 되었는지 치료 과정에서 어떤 점을 가장 힘들어했는지
그녀의 심리적, 신체적 과정을 잘 모른다.

애기피부 같죠? 살 빼고 나니까 다 좋아진거 같아요.

환자가 병을 진단받은 최초의 순간부터 마지막까지를 함께 하는 인연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환자가 훨씬 많다.
그러므로 새로운 환자를 만나면 이 병의 의학적/질병의 과정에서 현재 이 사람이 어떤 위치에 처해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를 만나기 앞서서 어떤 치료를 받았고 이번 검사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순식간에 파악해야 한다.
그렇게 분석한 정보를 바탕으로 앞으로 그는 어떤 궤적을 밟게 될 것인지를 설명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순발력, 순간 집중력 등이 필요하다.
그녀는 수술 후 항암치료를 마치고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유방암 정기검사를 하고 엊그제 외래에 오셨다.
컴퓨터 기록상 내가 한두번 진료를 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누군지 잘 모르겠다.
그저 기록에 의존해서 그녀를 파악해 본다. 6개월에 한번씩 하는 정기검사를 하고 오셨다.
재발의 징후는 없었다.
모든 영상 검사 정상.
피검사를 보니 간이나 콩팥 등 각종 장기들의 기능을 시사하는 검사 결과도 정상.
많은 환자에서 항암치료를 마치고 1년-2년 사이에 지방간이나 고콜레스테롤혈증, 고혈당 등의 만성질환을 시사하는 결과치들이 눈에 띄는 경우가 많은데 이 환자에서는 아주 낮게 잘 유지되고 있었다.
지방간이나 고지혈증, 고혈당 등의 징후는 항암치료 및 호르몬 치료로 인해 난소기능이 억제되면서 여성호르몬 레벨이 떨어지고 이로 인한 내분비적 변화가 초래되면서 발생하는 이벤트이다.
열심히 운동하고 살을 빼면 좋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렇지 못하고 고혈압이나 당뇨, 고지혈증 등의 만성질환에 걸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모든 검사 결과와 피검사 수치들이 정상이고 좋아보이네요.
콜레스테롤도 낮게 잘 유지되고 있군요.
그럼요 제가 지난 3-4개월 사이에 22kg이나 살을 뺐거든요.
그녀의 말을 듣고 과거를 떠 올려보니 예전 이미지가 떠오르고 비로소 그녀가 누구인지 어렴풋이 기억이 나려고 한다.
대단하시네요.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죠?
단기간에 너무 심하게 다이어트를 하면 요요가 올지도 몰라요.
하루 세끼 식사는 다 했어요.
대신 음식에서 달고 기름진 건 다 뺐구요.
운동 완전히 열심히 했구요. 야식은 절대 안 먹었어요.
나의 긍정적인 리액션에 그녀가 신이 났는지 자신의 다이어트 노하우를 술술술 풀어낸다.
사실 다이어트 전략이라는걸 들어보면 별거 아닌거 같은데 막상 자신이 실천하려고 하면 사소한 것 하나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해 실패하기 마련이다.
그래도 난 그녀의 다이어트 성공담에 귀가 솔깃한다. 그녀의 말을 막지 않고 계속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원래 전 걷는 걸 싫어해서 항상 엘리베이터 타는 편이었고 뚱뚱하다보니 누구랑 어울려서 운동을 하는건 생각도 못했어요. 많이 걸으면 허리도 아프고 무릎도 아프고 그랬죠. 그러니까 점점 더 운동을 안하고 살도 더 찌고 그랬던 거 같아요.
달리기나 조깅을 한다는 건 생각도 못했어요. 숨이 차서 할 수도 없었어요.
밤에 일할 때에도 스트레스 쌓이는 건 야식으로 풀어야 한다며 사람들이랑 같이 어울려 야식 먹는 걸 좋아했어요.  
그렇게 살다보니 생활습관이 좋지 않았던 거 같아요.
몸도 더 않좋아지는거 같고 쉽게 피곤하고  너무 늘어지는거 같았어요.
이러다가 내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내 생활패턴을 바꿔야 겠다고 결심했죠.
그렇게 3개월 살았어요.
피부도 좋아보여요.
원래 호르몬제 먹으면 피부도 푸석푸석 해지고 살도 2-3kg 찌기 마련인데...
애기피부 같죠? 살 빼고 나니까 다 좋아진거 같아요.
수술 전 복부초음파에서 이미 중등도의 지방간이 보였고 콜레스테롤도 300 가까이 되던 그녀.
지금은 지방간도 없고 콜레스테롤도 150 정도밖에 안된다. 그리고 날렵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고
일상에서 자신감도 되찾고 병을 잘 이겨내고 있다는 정서적인 안정감도 되찾고 그녀는 유방암을 진단받고 치료받는 과정이 자기 인생에 전화위복이 된 것 같다고 한다.
달리기를 하는 매 순간 그녀는 달릴 수 있는 현재 자신의 상태에 감사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예전에 비만했을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지금 할 수 있게 되어서 말이다.
"긍정적으로 사고하라"
"위기가 온 후에는 반드기 기회가 온다"
"역경과 어려움도 새로운 기회가 되고 나를 더 성숙시킬 수 있다"
난 이런 식의 교훈적 문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개인의 의지를 너무 강조하는 것 같아서...
내 자신이 그다지 의지가 강하지 않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살아가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런지 이런 류의 이야기를 접하면 별로 끌리지도 않고 마음으로 내키지도 않는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들에게는 이런 식의 격려를 해야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런데 오늘 그녀를 보니 전화위복을 만들어 낸 그녀의 의지가 대단한 것 같다.
그렇게 노력하며 젊은 여성에게 찾아온 인생 일대의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다면 이후 인생에서 어떤 어려움과 역경이 찾아와도 또 다시 그것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환자들이 나를 스쳐 지나간다.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의학을 배우고 인생을 배운다.
그 누군가가 말해도 진부했을 것 같은 이야기를 환자가 해주면 남다르게 들린다.
그들은 모두 암이라는 생애 절대절명의 위기의 순간을 고생하며 견뎠고 지금도 견디고 있고
자기의 힘으로 수많은 어려움들을 극복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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