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하도 힘들다고 했더니 겁 먹었나 보네요. 그래도 선생님이 하라면 해야지 고집 부리기는...
제가 이따 가서 얘기해 볼게요.

한명은 유방암
한명은 난소암
그들의 원래 주치의는 내가 아니었다.
각기 다른 의사였다.

그런데 어찌어찌 해서 지금은 내가 그들의 주치의가 되었다.
그들은 서로 모르는 관계였는데 최근 요 몇달 새 요양원에서 만나 알게 되고 같은 병원에서 암 치료를 받는다는 이유로 친해진 것 같다.

병원을 왔다갔다 하니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중에 내 얘기도 한 모양이다.
뭐라고 했을까?

최근에 나에게 치료를 받기시작한 환자는 첫 대면하던 날  이제 호르몬 치료는 별로 효과가 없는 것 같으니
항암치료를 해야할 것 같다고 험악한 말을 하게 되었다.

나는 차트에 의거해서 그를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은 사항은 잘 모른다.
나중에 들어보니, 수술하고 나서 한 8번의 항암치료가 너무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나를 처음 만난 그는 이런 말을 한다.
자기가 힘들었다는 얘기를 꺼내기 보다는 다른 사람의 입을 빌어 말하고 싶었나 보다.

선생님, 누구누구 아시죠?
저랑 같은 요양원에 있어요.
그이가 지난번에 항암치료 받고 나서, 설사 때문에 죽을 뻔 했대요.
다시는 항암치료 안할 거라고 하던대요?

맞아요. 원래 설사가 심한 항암제가 아닌데 그분께는 설사로 부작용이 나타난거 같아요.
지난번에 고생많으셨죠.
그래도 이번에 용량도 줄이고 입원해서 2차 항암치료 받으셨어요. 또 설사할까봐 지금 입원을 유지하며 경과를 보고 있는데, 용량을 줄여서 그런지, 지금은 괜찮아서 별 고생없이 계세요. 낼 모레 곧 퇴원할 예정이에요.
  

그래요?
그이는 나한테 다시는 항암치료 안 할거라고 했는데...
그래도 저는 항암치료 하기 싫어요. 그이 고생하는거 보니까 내가 이렇게까지 고생하면서 항암치료를 받아야 하나 싶었어요. 다른 치료 하면 안되나요?

환자분이랑 그 환자분이랑은 병도 다르고 쓰는 약도 달라요.
그러니까 다 똑같이 생각하시면 안되요. 지금은 더 이상 항암치료를 미룰 때가 아닌거 같아요.
빨리 치료 시작합시다. 치료하면 많이 좋아질 수 있어요.

싫어요. 하루만 더 생각해 볼께요.

첫 대면이라 얘기가 잘 안된다.
외래에서 겨우 설득해서 입원하시도록 했다. 호르몬 치료 시작한지 몇개월 안되었는데 아마 호르몬치료에 별로 반응이 없는 세포들인 것 같다.

평균적으로 기대되는 약효를 보지 못하고 나빠졌다. 원래 있던 뼈병변이 나빠지면서 이번에 골수까지 새롭게 전이가 되어 혈소판 수치가 낮은 상태이다. 상당히 심각하다. 지금 호르몬제를 바꿀 상황이 아니다.

입원을 하고 이 얘기 저 얘기 하면서 환자의 의중을 파악하였다. 하루라도 빨리 항암제를 써서 치료해야 겠기에 내 마음은 바쁜데 정작 환자는 항암치료를 안 받겠다고 하신다.

요양원에 있으면서 항암치료 후 고생하는 환자들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에 걱정이 되서 도저히 치료를 못하겠다고 하신다. 예전에 유방암 수술 후 했던 항암치료가 너무 힘들었던 기억이 지금 항암치료를 거부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것 같다.

마저 회진을 돌다가 같은 요양원에 있었다는 다른 환자를 만났다.

그 환자 입원해 있는거 아시죠? 가서 얘기 좀 해주세요. 처음 한번은 고생했지만 이번에 용량감량을 하고 보니 괜찮다구요. 그러니까 빨리 항암치료 시작하라고 가서 얘기 좀 해줘요.

제가 하도 힘들다고 했더니 겁 먹었나 보네요. 그래도 선생님이 하라면 해야지 고집 부리기는...
제가 이따 가서 얘기해 볼게요.

이 환자도 겁이 많고 치료가 썩 잘 되고 있는 상황도 아니라 여러모로 어려운 점이 많지만 이이는 내가 하자는 대로 잘 참고 따라와 주는 스타일이다.

독성이 있지만 단 한번에 이 약을 포기할 수 없으니 용량을 줄여서 다시 한번 시도해 보자는 말에 그러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생각보다 독성이 나타나지 않고 배도 안 아프고 치료를 잘 받고 퇴원하셨다. 퇴원하기 전에 요양원 친구 환자에게 들려 내 말을 전하신 모양이다. 환자가 나를 도와준 셈이다.

나는 진료 중 때때로 다른 환자들의 씩씩한 삶의 이야기를 전하며 환자들의 고달픈 몸과 마음에 위안을 주려고 노력한다. 환자는 내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속 주인공에게 자신의 미래를 투사하기 때문이다. 나도 그이처럼 잘 될 거야 그런 희망을 가질 수 있다. 희망은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잘 치료받고 잘 사는 그들의 모습에서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족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좋아지지 않는 내 몸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돈도 많이 들고 확 때려 치우고 치료를 접고도 싶고 그렇지만 마음 속 깊이 치료가 잘 되서 예전처럼 잘 살고 싶기도 하고 그런 마음이 하루에도 수십번씩 왔다갔다 한다.

그렇게 의지가 약한 내 자신이 못나보이고 살려고 아둥바둥하는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고 여기 저기 아프다는 말도 더 이상 하기 싫고 그렇게 힘겨운 일상에서 같이 항암치료를 받는 동료를 만나면 왠지 더 말도 잘 통하는거 같고 우애감도 생기는 것 같고 때론 피붙이보다 정겹기도 하고 그렇다.

그것이 환자들 사이에 맺어지는 치료적 동맹관계인 것 같다. 의사가 무미건조하게, 원칙적으로 이것 저것 말하는 것 보다 선배 환자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충고가 훨씬 피부에 와닿는다.

그래서 나는 암 치료를 마친 이들이 후배 환자를 위해 자원봉사를 해주고 일정 기간 동안 정서적 멘토링도 해주는
그런 특별한 자원봉사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

지금 치료를 받는 환자는 우울감도 있고 자존감도 낮기 때문에  섣불리 사람을 매칭해서 멘토-멘티로 엮어 버리면 멘토가 되는 사람입장에서 정서적으로 부담을 많이 느낄 수 있기 때문에 프로그램이 성공적으로 진행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적절한 선에서 관계를 규정짓고 서로간에 자기 삶의 일정부분을 공유하며 그만큼 도움을 주고 받는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멘토들을 잘 교육하는 것이 관건이다.

나는 조기유방암 치료 후 완치되어 정기 추적검사만 하고 있는 암경험자/생존자들이 조기 혹은 진행성 암환자를 위한 자원봉사 프로그램에 합류하여 자기가 겪었던 그 힘들고 절망의 순간을 극복했다는 자존감을 갖고 제2의 인생을 사는 내가 어떤 마음으로 새롭게 출발해야 하는지를 다잡는 계기로 또한 동병상련의 공감을 담아 지금 치료중인 환자들을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지원해주는 그런 활동을 하는 기회를 만들고 싶다.

환우회에도 부탁하고 싶다. 여전히 6개월에 한번씩 병원 출입을 하고 있는 나도 아직 재발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롭지 않고 불안하다. 몸과 마음에 새겨진 상처가 다 나은 것은 아니지만 어쩌면 궁극적인 해답은 남을 돕는 과정에서 나올 수도 있다고. 내가 씩씩하게 치료를 잘 받고 지금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나는 그들에게 희망이 되고 좋은 역할 모델이 되고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멘토가 되어 줄 수 있다고. 

그런 시간 후에 내 상처도 완전히 아물수도 있는 것이라고. 그런 부탁을 드리고 싶다.

왜냐하면 한 명의 환자가 끝까지 잘 치료받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의사의 역할이 중요하긴 하겠지만 의료진 말고도 주위에 다양한 지지 그룹이 있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 의사가 아니어도 환자를 도울 수 있는 일은 많다. 어쩌면 의사보다 더 잘 도와줄 수 있는 일도 많은 것 같다.

어떤 선배는 나에게 말했다.
암환자를 진료하는 의사는  치료과정에서 너무 과학적인 근거에만 집착하지 말고 따듯한 손길로 환자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그렇게 노력해야지. 환자를 만나는 매 순간에는.

그러나 환자의 자아가 흔들리지 않고 긴 치료의 여정, 중심을 잃지 않고 앞으로 잘 나아가기 위해서는 동병상련의 경험을 가진 선배 환자의 도움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론 의사보다 더 큰 힘을 줄 수 있다.

그런 소모임을 꾸리고 운영하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닌데...
아직 실천하지 못하고 마음 속에만 묻어둔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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