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리아는 지금 열대질환으로 알려져 있지만 세계1,2차대전 전후로는 유럽이나 북미 지역에서도 지역적 유행이 계속해서 보고될 정도로 세계 곳곳에서 흔한 질병이었다. 2차대전 이후 합성 항말라리아제가 개발되기 전까지만 해도 가장 효과적인 항말라리아제는 남미 원산의 기나나무 껍질을 채취, 가공한 키니네가 유일했다. 19-20세기 가장 성공적으로, 그리고 가장 널리 쓰인 화학요법제로도 언급되는 키니네는 세계사 속에 스며들어 여러 역할들을 해왔다. 무엇보다 키니네는 최초로 국제적 제약 산업 복합체에의해 정책적으로 생산되고 보급된 약품이었다. 자바섬에서 생산된 기나나무 껍질이라는 원료는 유럽으로 수출되어 공장에서 가공된 후 세계 곳곳으로 팔려 나갔다. 한때 키니네는 중산층 이상에서 일종의 일용품으로 취급되었다. 20세기 초반 기록들을 보면 집집마다 식탁 위에는 소금 후추와 함께 키니네가 올려져 있었다고 기록할 정도다. 이렇게 보편적인 상품이 된 것 역시 생산자, 가공자, 유통업자, 정부가 연계된 제약 카르텔의 담합과 마케팅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어찌보면 세계적인 규모의 제약업계가 카르텔을 형성하고 상품화 시킨 것 역시 키니네가 처음일 것이다.

기나나무 껍질이 말라리아 치료에 효능을 보인다는 것이 유럽에 알려진 것은 16-17세기 경으로 추측되지만, 당시에는 이를 재가공 할만한 기술력이 없었기 때문에 원산지인 남미에서 야생 기나나무 껍질을 벗겨 소량 수입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또한 기후나 토양이 다른 대륙에서 키우기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량생산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18세기 중반 기나나무에 대한 연구가 많아져 키니네 함량이 높은 특정 종의 기나나무를 분류할 수 있게 되었고, 1820년 기나나무 껍질을 가공해 비교적 순수한 키니네를 얻어낼 수 있는 기술이 발견되며 상황이 바뀌었다. 1800년대 중반 개발된 유리온실과 식물학의 비약적인 발전은 기나나무 도입과 인공적인 번식을 통한 대규모 농장을 건설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영국의 큐가든 같은 거대한 식물원들이 이런 과정을 통해 발전했는데 여기도 재미난 이야기들이 많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1860년대 몇몇 식물학자들이 남미에서 밀수해온 기나나무 묘목과 열매로 동남아시아에 대규모 기나나무 농장을 확보하는데 성공한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는 곧 세계 키니네 시장의 대부분을 장악하게 되었다.

초기 기나나무 사업 시작 당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영국이었다. 가장 넓은 식민지를 차지하고 있었고, 파견 인력도 많았기 때문에 그만큼 키니네 소비도 많았던 탓이다. 하지만 이를 전략물자로 인식하고 정부 주도 하에 생산자와 과학자들을 한데 엮어 집중적인 투자를 한 네덜란드는 마침내 1870년대 네덜란드 동인도에 대규모 기나나무 플란테이션을 정착시키는데 성공한다. 이후 백만그루 이상의 기나나무가 자바섬에 심어지며 네덜란드는 세계 키니네 공급량의 90%를 차지하는 주요 공급자로 급부상하게 된다. 또한 파견 관료들의 대부분이 과학자였던 이유로 영국이나 프랑스의 기나나무에 비해 상대적으로 키니네 함량이 높은 기나피를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또한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키니네 농장이 성공을 거두자 생산량이 급증했고, 자바섬에서 유럽으로 수출되는 기나피의 양은 1880년 124톤에서 1890년 2900톤으로 20배 넘게 늘어났다.

하지만 공급량의 증가가 언제나 긍정적인 효과를 내는 것은 아니다. 유럽에 기나피 공급이 넘쳐나자 곧 가격이 급락했다. 하지만 요즘 과자값을 보면 알 수 있듯 원자재 가격이 하락했다고 해서 꼭 공산품의 가격이 하락하는 것은 아니다. 키니네의 가격은 여전히 높아 정부 단위, 혹은 중산층 이상이 아니면 구입하기 부담스러운 가격이었고, 여기에는 유럽 내에 자리 잡고 있던 가공 공장들의 결탁이 있었지만 이 이야기는 조금 후에 하도록 하자. 역설적으로 가격의 급락은 네덜란드가 기나피 공급의 독점권을 쥐게 해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기나피 가격의 하락으로 이득이 줄어들자 최대 생산자이던 영국이 기나나무를 갈아엎고 차 농사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농장들도 큰 타격을 입었지만, 생산 중이던 기나피의 질이 워낙 좋았기 때문에 비교적 괜찮은 값을 받아 어떻게 살아남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1896년, 기나피의 가격이 5년 전의 절반으로 떨어지자 이제는 정말 상황이 심각해졌다.

본래 기나피에서 키니네를 추출해내는 과정은 비교적 복잡했기 때문에 대규모로 생산되기 어려웠고, 소규모 공방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1820년 알콜과 황산을 이용한 손쉽고 간단한 방법이 개발되자 생산 공정은 점차 소규모 자영업자에서 대형 공업시설로 이전되었다. 또한 식민지 농장에서 기나피 공급이 원활해지자, 공장의 규모는 점차 커져갔고 제약 공장이라고 불릴만한 시설들도 탄생하게 되었다. 기나피 공급은 꾸준히 늘어나 원자재 가격은 하락했지만, 유럽 내에서의 키니네 수요도 점차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에(기나피 공급량에 따라갈 수 있을 정도의 수요는 아니었지만) 제약 공장들은 제법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이에 유럽 제약 공장들은 비공식 연합체를 형성해 기나피 수입 가격과 키니네 판매 가격을 담합하기에 이른다. 제약사업에서는 처음 이루어진 가격 담합이자 제약 카르텔의 형성이었다.

공급은 초과 상태인데 원자재 가격마저 낮게 책정되자 자바섬의 기나나무 농장주들은 심각한 재정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식민지 총독과 본국 정부에 키니네와 기나피 시장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을 정식으로 요청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당시 보이지 않는 손과 자유시장경제체제를 신봉하고 있던 정부 관료들은 ‘인위적인 처방을 내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을 늦출 뿐 막을 수는 없다’는 이유를 들며 묵살해버렸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널리, 오래 쓰이고 있는데다 몇 존재하지도 않던 효과적인 ‘인위적인 화학요법제’의 원재료인 키니네 시장에 대한 개입 반대 이유로는 꽤나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당시 자바섬 기나나무 농장의 총괄책임자로 부임해 있던 관료는 화학자 출신으로, 물론 과잉 생산이 가격 하락의 주 원인임을 인정하면서도 전략적으로나 인도적으로나 중요한 물자인 기나피와 농장을 정부가 보호할 의무가 있음을 역설한다.

이후 정부와의 긴긴 토론에서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는 것에 실패한 그는, 시장경제나 가격과 이익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보다는 도덕적 책무를 거론하기 시작한다. 이 역시 제약산업에서 이익과 상관 없이 약품의 생산이 공공의 이익을 위한 도덕적 책무임을 주장하는 첫번째 사례가 아닌가 한다. 그는 ‘식민지 역사의 한장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는 이 일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기나나무 산업을 보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물론 한참 경제논리에 매몰되어 있던 정부에는 설득이 먹힐리 만무했다. 1894년, 총독이 교체되자 비로서 기회가 찾아왔다. 적극적으로 로비 그룹을 형성한 농장주들은 마침내 정부농장의 기나피 공급량 억제와 일정량의 세금감면 혜택을 얻어내었고, 마침내 자바섬 내에서 키니네를 가공 생산 할 수 있는 제약 공장을 설립하게 된다. 내부 소비를 통해 공급량을 조절하고 경쟁력을 가지고자 한 것이다.

기나피 과잉 공급에 의한 키니네 가격의 하락은 자바섬의 경제적 환경보다 더 중요하고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키니네는 제국 확장의 핵심적인 기술력이었다. 아시아나 아프리카로 파견되는 군대나 관료들은 키니네를 필수품으로 챙겨갔는데, 당시 말라리아는 주요 사망원인이자 일순간 군대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자연재해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비교적 여러종류의 항말라리아제가 개발되어 있던 세계2차대전 당시 태평양 전선에 파견된 미군 내에서 발생한 말라리아 발병건만 573,000여건이었다. 때문에 효과적이고 순도 높은 키니네를 확보해 식민지 확장 전선에 나가는 것은 필수적인 항목이 되어 있었는데, 키니네 가격 하락은 보급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다. 키니네에 대한 접근성의 향상과 전략물자로서의 보급은 말라리아 고유행지역이던 열대지역으로의 파견과 주둔을 원활하게 해주는 역할을 했다. 즉 제국의 확장을 직간접적으로 도운 셈이다.

하지만 군대와 관료들이 소비하는 용도로 키니네를 보급하는데는 한계가 있었고, 잠시 동안 수요와 공급이 안정화 되는 듯 싶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공급량이 다시 수요를 초과하기 시작했다. 이에 제약 카르텔이 생각해낸 방법이 중저소득층로의 시장 확장이었다. 이는 인도적인 이유와는 크게 관련이 없었고, 가격을 크게 낮추어 말라리아 고유행지역에 있는 식민지 주민들이 사먹을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된다면 충분히 이익을 남길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1900년대 초반 가격은 19세기 후반에 비해 10분의 1 수준까지 낮아져 수요는 꾸준히 늘어났지만 여전히 공급량이 수요를 초과하고 있었다. 가장 큰 한계는 키니네는 다른 차나 고무처럼 기호식품이나 추가가공이 가능한 원재료가 아니라 의약품이라는 제한적인 용도로 밖에 쓸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제약 카르텔은 식민 정부와 본국 정부를 압박해 정부 보조금을 받아 식민지 주민들에게 키니네를 공급할 수 있도록 압박했다. 여기서 동원된 논리는 식민지 주민들의 건강과 안녕을 도모하는 것은 정부의 의무 중 하나라는 것이었다. 의도가 어찌되었건 약품 공급의 도덕적 의무가 다시 한번 수면 위로 올라오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채 지지부진한 토론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1차대전이 터졌다. 이 시점을 계기로 키니네와 공중보건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고 전혀 다른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1차대전 당시 말라리아에 큰 피해를 입은 각국 정부들은 감염성 질환, 특히 말라리아 박멸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1차대전 대규모 군대의 파견으로 세계 곳곳 더 넓은 지역으로 말라리아가 퍼져나갔고, 전쟁의 부가적인 피해로 중동, 지중해 인근, 러시아 등지에서 폭발적인 말라리아 대유행이 생겨났다. 19세기 식민지 파견 군대와 관료들 정도에서나 흔히 쓰이던 약물은, 전쟁 중 광범위하게 보급되면서 사람들에게 보다 익숙해졌고, 말라리아 박멸의 주요 수단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환경 관리나 매개체 억제 등의 방법 보다도 화학요법을 선호하게 된 것은 당시 과학자들의 강력한 주장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 중 로베르트 코흐의 역할이 컸다. 뉴기니에서 연구를 수행하고 있던 코흐는 키니네를 통한 화학요법이 단순히 개개의 감염자를 치료할 뿐 아니라, 충분히 광범위하게 사용될 경우 말라리아 열원충을 모두 죽여 전파 사이클을 끊어 놓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 정부에서 국가 단위로 진행하는 보건 사업에 편입되면서 키니네 제약 카르텔은 거대한 산업체들로 성장하게 된다.

1924년 UN의 전신인 국제 연맹은 말라리아 위원회를 편성해 말라리아 박멸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하는데, 이때 가장 강조된 것인 키니네, 즉 화학요법제를 이용한 말라리아 치료였다. 과거 말라리아 관리에 사용되던 사회적 접근법은 점차 무시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키니네 제약 카르텔의 적극적인 로비도 한몫했다.(말라리아와 정치의 관계는 사이언스온에서 : http://scienceon.hani.co.kr/37728) 1924-1925년에 걸쳐 광범위한 홍보활동이 진행되었고 주요 과학 저널들에 국제 연맹의 말라리아 박멸 활동에 키니네가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음을 강조하는 논문과 사설들을 계속해서 투고했다. 이들은 심지어 말라리아에 대한 아무런 증상도 보이지 않는 사람도 유행지역에 있다면 예방적 목적인 투약이 필요함을 강조하기도 했다. 천만다행으로 국제연맹에서는 전체 인구에 대한 투약을 승인하지 않았지만, 이후에도 이들의 로비는 계속되어 다수의 과학자들을 섭외해 관련 서적을 출판하고 말라리아 이외의 질환에서 키니네의 효능을 강조한 팜플렛을 전세계 8160명의 의대 교수들에게 뿌리기도 했다. 이런 로비의 성공에 힘입어 1930년대의 경제 불황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높은 수익을 올렸고, 꾸준히 성장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키니네와 기나나무 산업이 종말을 맞은 것은 2차대전 일본이 자바섬을 점령해 기나나무의 공급이 완전히 마비되고, 이에따라 클로로퀸이라는 새로운 합성 항말라리아제가 개발되는 시점에서였다.

키니네와 제약산업의 형성은 여전히 우리에게 흥미로운 생각거리들을 던져주는데, 한세기 전에 오고가던 갈등과 논쟁들이 약 이름이나 회사 이름만 바꾸어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제약 카르텔의 약값 담합과 이를 통한 부당이득, 인도주의적 차원에서의 약품 공급과 이에 대한 도덕적 책무, 그리고 그 책임소재가 제약회사인지, 정부인지, 혹은 구매자인지에 대한 문제. 또한 제약산업의 발달에 힘입은 공중보건 정책의 형성과 그에 따른 폐단까지. 여전히 우리가 풀지 못한 수수께끼들이며 갈등들이다.


읽을거리 : Goss, Andrew. “Building the world’s supply of quinine: Dutch colonialism and the origins of a global pharmaceutical industry.” Endeavour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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