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추가 모자보건 관련 사업 준비를 위해 기초 조사를 다니고 있는데 충격적인 사실들을 몇 접하게 되었다. 1980-90년대까지 탄자니아의 모자보건 지표는 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에 비해 크게 열악한 수준은 아니었다. 1960년대 분만 100,000건당 모성 사망률 450여건이던 수치는 사회주의 국가제도 하에서 크게 향상된 의료보건 접근성으로 1990년 190건까지 낮아졌다. 하지만 80-90년대를 휩쓸었던 구조조정의 광풍에서 기초보건은 크게 훼손되었고 1996년에는 불과 6년만에 529건으로 치솟았고, MDG를 위시한 대대적인 외부자금과 지원의 유입에도 2010년 기준 454건으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모자보건 지표가 가장 낮은 국가로 솝꼽히게 되었다. 탄자니아는 아프리카 국가 중 인구 당 보건 시설 보급률이 가장 높은 지역임에도 이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현장을 방문하자 이유는 분명히 드러났다. 90년대 중반을 지나며 지속성과 효율성을 이유로 무상으로 제공되던 의료 서비스가 환자들에게 일정 부분 자부담분을 매기게 되었고, 이에 따라 접근성이 크게 낮아졌다. 이후 공공의료에 대한 신뢰도는 큰 타격을 입었고, 이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국가 의료 시스템의 공공성이나 능력도 약해져 기초 인력이나 물자조차 제대로 보급되지 않고 있었다. 하루 평균 환자 50명 이상, 월간 분만 30건 이상을 시행하고 있는 보건지소에 배치된 인력은 간호사(혹은 간호조무사) 2명 정도가 전부다. 보건소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은 주말에 48시간 단위로 교대 근무를 돌고 있다. 일회용 라텍스 장갑은 분기당 - 월간도 아니라 - 50켤레 정도만이 지급될 뿐이다. 전기는 커녕 물조차도 강에서 떠온 물로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으니 무균술이 가능할리가 없다. 항생제나 소염제 같은 기초 의약품 조차도 정부에서 보급되는 양으로 시설 운영이 불가능 해, 지역 주민들에게 부담금을 매겨 구입해 쓰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지역 주민들은 정부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필요를 해결하는 자구책들을 마련해 두었다. 90년대 초반 양성된 전통 산파들이나 지역 보건원들을 활용해 공공 의료에서 제공하지 못하고 있는 서비스를 메꾸고 있다. 이들이 별 다른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하더라도 5km를 걸어 보건소에 가서 세시간을 기다렸다 약이 없으니 자비로 사 먹으라는 이야기를 들을거라면 차라리 집에서 앓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정부에서 상하수도시설이나 위생시설을 지원하지 않으므로, 지역 보건 조직이 화장실 건설을 주도하고 있다. 과거 구조조정 시절 긴축 조치를 통해 국가가 시민과의 사회계약을 저버렸을 때 많은 사람들이 비공식 경제에 의존해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었던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AIDS in the twenty first century’(http://www.amazon.com/Twenty-First-Century-Revised-Updated-Edition/dp/1403997683)에서는 공식적인 사회 안전망에서 더이상 지원을 보장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이 자구책을 찾아 나서는 것을 ‘coping’이라 표현하는데, 일반적인 번역으로서 ‘대처한다’는 의미 보다는 ‘간신히 버텨낸다’는 정도의 의미가 더 어울릴 것 같다. 사회 안전망이 파탄난 상황에서 아이들은 학교 대신 농사를, 여성들은 가정 대신 성매매를, 노인들이 아이들을 돌보고, 공공 부분의 전문 인력들이 영리 부분에 뛰어 드는 현상이 일어났고, 이런 비공식 부분이 안전망 축소의 충격을 상당 부분 흡수해 냈다. 즉 시민들이 국가에 요구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NGO들의 대대적인 개입도 이런 비공식 부분의 확장에 한몫 해왔으며, 일종의 대안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국가의 자율성, 의사 결정권을 훼손하는 결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공공의료는 무너져 있지만, 국가는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할 의지가 부족하고 제대로 대처하고 있지도 못하다. 결정적으로 사회 안전망을 대체하는 비공식 부분의 확장은 국가와 시민들 사이의 갈등을 드러내고 조정 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해 버리는 결과도 낳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지역 주민들의 의사결정 구조는 자본을 지니고 있는 외부의 대형 NGO들이 ‘만들어낸 욕구’에 휘둘리는 경우도 많고, 동시에 풀뿌리에서 민주적인 과정을 통해 조율된 갈등들이 반영된 목소리가 상부로 올라가는 것을 막는 완충제 역할을 하기도 한다. NGO들이 구멍난 안전망을 간신히 틀어 막고 있기 때문이다. 브라질 사회학자인 에미르 사데르가 말한 것 처럼 NGO가 정당과 사회운동을 대체하고 있는 상황을 우리들은 어떻게 바라 보아야 하는 것인가. 그런 질문들이 계속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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