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똥펀팩트 에서 똥화석을 비료로 사용했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이미 화석화가 진행되어 돌덩어리가 되어버린 똥을 비료로 쓸 수 있는가 하는 질문들이 떠올랐다. 똥화석은 이미 화석이 되었지만 기본적으로 인산염이 풍부하기 때문에 적절한 처리를 거치면 훌륭한 화학비료의 원료가 될 수 있다. 이야기는 1815년 영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워털루 전쟁에서 나폴레옹을 물리치고 평화를 얻은 영국은 급속한 성장기에 접어든다. 1800년대 초반 50년은 영국에서 가장 빠른 인구 성장이 있던 시기로, 불과 50여년만에 인구가 두배로 늘어났다. 늘어난 인구는 도시로 밀려들었고, 경제성장과 공업의 발달로 식량 공급도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식량 생산을 늘리기 위해서는 대량의 비료를 필요로 했다. 이전까지 영국에서는 대부분 동물의 분뇨를 비료로 쓰고 있었지만, 생산이 공급을 따라가기 어려웠다. 1828년 캐나다에서 발견된 인산광이 비료로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특히 남아메리카에서 얻을 수 있는 구아노에 있는 인산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거리 수송, 공급 불안정에 단가가 높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식량 소비량이 워낙 높았기 때문에 막대한 양이 수입되었다.

다른 대안이 필요했다. 숯부터 조개껍질이나 물고기, 해초, 뼈 등 다양한 재료들로 인을 추출하기 위해 노력해 보았지만 수율이 그리 높지 않았다. 인산 비료 생산 초기 가장 각광 받던 것은 뼈였는데, 영국에는 뼈를 수거하는 직업군까지 생겨났을 정도였다. 18세기 초반 영국은 연간 30,000톤의 뼈를 수입하는 세계 최대의 뼈 수입처가 되었고, 이집트 미라의 뼈부터 북아프리카 사막에서 잘 말려진 뼈무더기, 워털루나 크림반도의 전쟁터에서 발굴되는 사망자의 뼈들, 심지어는 시칠리의 카타콤에 있는 뼈들까지 닥치는대로 수거해댔다. 한 학자는 “대영제국은 마치 구울 같다. 대륙들을 떠돌아 다니며 제국의 농장을 먹여살리기 위해 뼈를 찾아 헤메인다”고 적기도 했다. 하지만 뼈는 흙에서 분해되어 다시 식물에 흡수되는데 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고, 농업 생산량을 단기적으로 증진시키는 역할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과정에서 찾아낸 것이 바로 똥화석이었다. 잉글랜드 동남부에는 수백만톤의 화석물이 집중적으로 매장되어 있는 퇴적층이 있다. 1842년 옥스포드 대학의 지질학자 중 한명이 이 퇴적층을 연구하다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똥과 뼈화석이라면 똥처럼 비료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일련의 실험 후 황산에 녹여본 결과 상당한 양의 인산을 얻어낼 수 있음을 알아 내었고, 곧 영국 전체를 먹여살릴 수 있을만큼의 인산을 생산해 낼 수 있으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화석 채굴을 시작해 공장을 차리자마자 주간 200여톤의 인산을 생산해내기 시작했고, 가격은 구아노의 절반에 불과했다. 또 이 방법을 사용해 화석을 처리 가공해 판매하는 사람들에게 로얄티를 매기기 시작해 막대한 수익을 올리게 되었다. 화학 비료가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몇년 지나지 않아 대량 채굴이 가능한 영국 동남부 캠브리지 주변에 골드러시에 비견할만한 화석러시가 시작되었다.

화석러시와 함께 재미있는 부수적 효과가 있었는데, 화석 발굴이 급속히 확장되면서 잘 보존되어 있는 화석 표본들이 다량 발굴되어 수집가들에게 고가로 팔려나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어쩌면 영국의 고생물학과 화석 수집의 붐을 일으켰던 것은 똥을 줍다 부수적으로 일어난 효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과연 똥은 버릴것 하나 없는 대단한 물건이 아닌가.

읽을거리 : O’Connor, Bernard. “The origins and development of the British coprolite industry.” Mining History 4.5 (2001): 4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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